내가 만난 김상철 장로님
내가 만난 김상철 장로님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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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군사정권이 끝난 후 자유의 문턱에서 저는 ‘심야토론’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누가 제발 내말 좀 대신해달라는 심정으로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분이 내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지금은 헐 때가 아니고 세울 때’라며, 갈피없이 들끓는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시켜야 한다고 젊은 변호사가 말했습니다.
 
당시 젊은이의 자유의지를 대변한다는 다혈질의 ㅂ 총장, 또 모 교수는 젊은 정의감을 막지 말라고, 게다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당시는 지금의 토론문화보다 거칠어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냉철하면서도 겸손하고 절제된 김상철 변호사님의 지혜와 용기에 반했습니다.
 
그후 김 변호사님의 칼럼을 더러 읽으며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얼마 후 ㅂ 총장님은 시위대 뒤에는 반국가적 불순세력이 있다며 시위 자제를 외치는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3년 2월 26일 김 변호사님은 서울시장에 임명되신 후 호화주택과 농지에 정자를 짓고 그린벨트를 훼손해 복구하라는 두 차례의 공문도 묵살했다는 등의 언론 보도로 비난에 휩싸이면서 1주일만에 낙마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기득권자의 타락은 예외가 없다며 실망했습니다.
 
그후 김 변호사님을 같은 교회에 다니며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되면 멀찍이 떨어져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문제의 주택은 내가 전에 더러 찾던 분재원 건너집으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아담한 목조주택이었고 요란한 비난들이 악의적인 정치적인 해프닝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제 오해가 풀려 김 장로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순박하고 따스했으며 열정을 비범한 분별력과 신앙으로 다듬은, 모처럼 ‘존경’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은 고귀한 영혼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김 장로님이 정의와 선을 이루기 위해, 나라 사랑을 위해 돈도 시간도 없어 돌보지 못한 뜨락, 그 좋아하시는 식물들을 가꾸지 못한 것이 안쓰러워서 이 아마추어 조경사가 조금 도와드리기도 했습니다.
 
같이 가위질하면서 김 장로님의 깊은 지혜에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적 관계를 꺼려 하던 제가 김 장로님이 하시는 탈북난민 돕는 일에도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하게 됐습니다.
 
김 장로님이 보수정론지 <미래한국>을 발행하면서 이 매체를 통해 ‘남북화합 운운하며 북한인권 실정에 침묵하고 세습독재, 전쟁정권을 용납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린 불의한 집단’이라고 몰아치는 논조는 너무 과격해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화를 하려면 상대를 인정하고 화합(통일)을 하려면 절충도 양보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 장로님이 이념투쟁에 휘말려 균형과 이성을 잃고 투사가 돼가는 것 같아 아슬아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을 보니 김 장로님의 판단이 대단히 정확한 경고로 생각돼 감탄할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념 갈등은 여전하고 죽음을 무릅쓴 탈북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좋은 씨 올바른 씨를 뿌리고 가셨습니다. 남은 저희들이 김 장로님의 뜻을 따라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데 헌신하겠습니다.
 
생전에 못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2012. 12. 17.
서울교회 집사 김형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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