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인권변호사를 그리며
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인권변호사를 그리며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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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 변호사 · 前 부패방지위원회 위원
강원도 양구마라톤에 이어 참가한 철원의 DMZ 평화마라톤(풀코스)에서 우연히 셔츠에 한반도기와 ‘조선인민민주공화국’이란 큰 글씨를 새긴 60대의 재일동포와 같이 달리며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됐습니다. 2년 전 베를린 마라톤에서 셔츠에 한반도기를 달리고 뛰던 일이며 DMZ 너머의 북녘과의 통일을 언제나 이룰지를 헤아려보기도 했습니다. 월남가족으로 이제는 고인이 된 김 변호사를 떠올리며 우리의 삶과 죽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침 서울법대 동기동창들이 ‘나의 인생이력서’라는 제목의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고 있어 대학 시절 등 짧지 않은 삶을 되돌아보고 있던 참이라 이 추모의 글을 쓸 용기를 냈습니다. 저는 김 변호사와 서울법대에 66년 입학을 같이 해 함께 변호사라는 법조인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무엇보다 한때는 소위 인권변호사로서 민주화운동의 동지였는데 지난 4반세기 동안 서로 다른 삶을 살아 온 것 같습니다.
 
동기동창이라 하지만 저는 법대에 1년 다니다 군에 입대해 3년 후인 1970년에 복학했고 대학 1학년 때도 인왕산 성취암이란 사설 암자에서 기숙해 김 변호사 등 동기생들과 어울릴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후 김 변호사와 다시 만난 것은 80년 중반 김 변호사의 인권 변호사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외환은행에 근무하다가 결혼도 하고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 1979년 김신유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를 시작했고 2년 후 미국으로 가 미 의회 펠로우 생활과 조지워싱턴 법과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1984년 말 귀국해 위 사무소로 복귀했습니다.
 
“민주헌법을 쟁취하자”
 
김 변호사는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 중이었는데 85년 4월 대우자동차 파업사건을 필두로 같은 해 9월 민청련 의장 김근태 씨 전기고문사건, 86년 7월 서울대 출신의 위장취업자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 등 중요한 시국 사건들을 변론하면서 인권 변호사로서 활약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위 두 사건은 당시 군부독재권력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으로 ‘87년 박종철고문살해사건’으로 이어지면서 87년 6월 민주항쟁이 촉발됐던 것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인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적인 헌법 개정과 대통령 직선제가 달성돼 소위 87년 체제라는 역사적인 민주적인 과업 또한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4반세기 전에 일어나 이제는 역사 속에 각인된 6월 민주항쟁 시 김 변호사와 저는 위 항쟁을 앞에서 이끌어 온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상집위원(상임집행위원)으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민주화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국본은 군부독재에 대항한 민주세력의 총 결집체로서 우리는 사회정의와 인권옹호를 사명으로 여기는 변호사로서 특히나 ‘민주헌법을 쟁취하자’는 국민들의 여망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 변호사는 이미 판사시절인 1975년 긴급조치 시절 유신반대 데모 학생들은 물론 김대중 씨 선거법위반사건 등의 재판에서 판결로써 유신독재에 반대해 오다가 변호사 개업 후 민변의 전신인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시국사건 변론을 맡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변호사 74명이 가입한 국본의 상집위원으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나섰습니다.
 
김 변호사가 1993년 10월 출간한 ‘7일간의 서울시장’ 제2부 선택의 순간들 중 ‘양심운동 호소와 국민운동본부 참여’의 글에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소개돼 있습니다. 위 변호사 명단에 저와 김 변호사 이름이 각각 세 번째와 네 번째에 올라가 있는데, 우리 앞에 서명한 대한변협 회장 김은호와 한승헌, 고영구 이렇게 세 분의 선배 변호사님들이 각 고문,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소장인 저와 김 변호사는 이상수 변호사와 함께 상집위원으로 선임됐습니다.
 
위 변호사들의 국본 참여는 6월 항쟁의 절정인 6‧10 평화대행진을 5일 앞두고 이뤄졌고 6‧10 광화문 변호사회관에 모여 시위에 나서 지독한 최루탄 가스에 맞서 싸우며 그 후 소위 6‧29 선언 시까지 농성 시위 등으로 계속됐습니다. ‘6‧26 대행진’을 앞두고는 합정동 마리스타 수녀원에서 비밀리에 열린 국본 회의에서 야당(민추협)측의 연기 제의가 나왔는데 김 변호사와 저는 ‘계속 밀어붙이자’고 주장해 대행진 강행을 선도했습니다.
 
상집위원인 우리는 김 변호사의 위 글 표현처럼 ‘구속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민주화운동에 늦게 동참한 것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과 민주화를 꼭 이뤄야 한다는 책임감을 크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 항쟁의 결과인 전두환 정권의 6‧29선언이 나온 직후 개최된 국본회의에서 저는 백기완 선생 등과 대행진 계속을 주장했으나 대세는 대통령 직선제만 되면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소위 선거혁명론에 빠져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6‧29선언은 전두환 정권이 하나회 소속 친구인 노태우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과정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 후 저는 국본 헌법개정위원으로 87년 체제의 근간이 된 헌법 개정에 열심이었고 김 변호사도 헌법재판제도와 적법절차조항 도입 등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국본의 상집위원장이던 오 목사와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다시 만나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대행진 등을 계속했으면 우리 역사가 달라졌을 것”임을 인정한 바가 있습니다. 변호사인 상집위원 3명은 당시도 의견 차이가 있더니 그 후 행보는 너무나 달라 놀라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따로 또 같이 걸어온 각자의 길
 
6월 항쟁의 결실로 치러진 87년 대선은 권력욕이 앞선 양김 YS, DJ의 분열로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연장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민주화 운동세력의 분열 특히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소위 4자 필승론의 오류가 치명적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선 당시 저는 양김의 단일화와 민중운동권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이애주 서울대 교수 등과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본부장을 맡아 고군분투했는데 당시 김 변호사와 이상수 변호사는 각각 YS와 DJ를 지지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음 해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 변호사는 우리정의당을 창당해 강남에서, 저는 소위 운동권 정당이던 한겨레민주당으로 송파을에서 각각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수 변호사는 평민당으로 중랑을에서 당선,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청문회 스타가 됐던 것입니다.
 
이후 김 변호사의 ‘7일간의 서울시장’의 마지막 장인 ‘시대의 격랑’에 자세히 실린 대로 김 변호사와 저는 1989년 1월 재야운동권 통합 단체인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단체연합)’의 결성을 계기로 갈라서게 됐습니다. 김 변호사는 위의 결성식장에서 목도한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이란 대형구호가 상징하는 전민련의 노선에 반대해 그날 중앙일보에 시평 ‘저항과 순응의 병리’를 게재함으로써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적극 옹호했던 것입니다.
 
저는 전민련의 인권위원장으로서, 전민련의 조직적 결의로 결성된 1991년 민중당의 인권위원장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류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김 변호사는 소위 인권 변호사의 모임인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을 탈퇴하고 전교조 등 소위 진보적 운동에 반대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나아가 한미우호협의회 창립 등으로 한미동맹, 반(反)김정일운동의 기수로 나섬으로써 민주화 운동권으로부터 ‘배신과 변절’의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 후 김 변호사와 제가 다시 만난 것은 김 변호사가 1993년 2월 소위 ‘7일간의 서울시장’을 그만 둔 직후였는데 김 변호사는 저희 사무실을 찾아와 언론에 울분을 터트리며 제가 1991~1992년 노무현 의원을 대리해 언론을 상대로 승소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소송을 부탁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김 변호사 우면동 집에도 몇 차례 방문해 현장을 알고 있었으므로 언론이 문제 삼은 ‘불법 형질 변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의 정치적인 함의를 같이 생각해 보자고 조언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해 전화로 몇 차례 통화만 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그 후 태평양아시아협회 회장,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본부장, 미래한국신문 발행인 등 폭넓은 운동을 펼쳐오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한미-남북문제에서 소위 우파 쪽의 입장에서 큰 목소리를 내다가, 결국 건강을 해쳐 일찍 세상을 떠나게 돼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한때 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동창을 위해 병문안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보낸 지 어언 1년이 지난 오늘 뒤돌아보니 민주화의 열망에 불타 있던 그 젊은 시절이 그립습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너무나 퇴보하고 남북‧미중 관계의 대결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요원해진 이즈음 젊은 날의 열정을 다시 한 번 일으켜야겠다는 각오를 해보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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