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선각자
행동하는 선각자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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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 · 前 문화일보 사장
나는 김상철 변호사를 1980년대에 알게 됐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질풍과 노도의 시대’라 할 1980년대는 우리 국민이 권력자로부터 실질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를 쟁취해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 건설을 완성한 시기였다.
 
1987년의 6‧10항쟁과 그것이 가져온 6‧29민주화 선언으로 당시까지의 형식적이던 민주주의는 비로소 국가의 확고한 기초로 정착됐다. 내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7년 정도의 판사생활을 마감하고 재야 법조인으로 변신해 다른 변호사들이 담당하기를 꺼려하는 시국사건을 기꺼이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낼 무렵부터였다.
 
판사 재직 시 김대중사건 재판 때 배석판사를 맡아 권력의 미움을 사서 지방으로 좌천 발령을 받은 일이 있는 그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등장하자 법복을 벗어던졌다. 김근태 권인숙 박종철 사건 등을 담당한 인권변호사로서, 군부정권에 맞선 반독재투사로서, 그리고 북한민주화와 북녘동포의 인권 문제를 초기에 제기한 대북운동의 선구자로서 그가 남긴 공적은 컸다.
 
특히 6‧10항쟁 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상임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직접 거리에 나섰을 때 그의 활약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나는 언론이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은 언론 고유의 신성한 의무라는 신념 아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직선개헌문제, 그리고 6‧10항쟁을 대서특필하던 때여서 그에게 아주 호감을 느꼈다.
 
이 시기의 민주화는 그 후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초가 됐다. 그러나 동시에 이때 단순히 전환기적 현상이라고만 치부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들을 우리 사회에 남긴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이념적 혼돈과 국가적 혼란이었다.
 
1980년대 초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부터 반미운동과 함께 싹트기 시작한 주사파운동은 민주화운동에 편승해 독버섯처럼 자랐다. 이 세력들은 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가 성취되자 합법화된 노조운동을 이용해 더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단호한 성격의 김상철은 이때 분명한 목소리로 이념 문제에 선을 그었다.
 
만약 지식인들이 빠지기 쉬운 지적 기회주의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극우’라는 욕설에도 개의치 않고 그가 그처럼 감연히 일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약 30년이 흐른 지금 종북세력이 국회에까지 진출할 정도로 그 세력이 늘어난 현실을 감안하면 당시 김상철은 남보다 앞서서 장래를 내다볼 줄 아는 선견지명을 지닌 사람이었다.
 
김상철은 그가 병으로 쓰러진 2008년경까지 활동하면서 이념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가 생존 시 피차가 바쁜 입장이었으므로 이런 문제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 글을 준비하면서 그의 칼럼 몇 편을 새삼스럽게 정독해 보았다.
 
되짚어 보는 그의 문장들
 
이념문제에 관한 한 김상철은 아주 직설적이었다. 1989년 부산 동의대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학교 건물에 방화를 해 학교 안에 들어가 있던 경찰관 7명이 불타 죽은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는 통렬한 어조로 운동권 학생들을 질타하는 글을 신문에 써서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상철은 학생운동권이 이미 김일성 주체사상파에 의해 좌지우지 된 지가 오래라고 지적하고 이들은 “어느새 만연된 스스로의 허위와 불의에 대한 잘못을 고백하고” 폭력노선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또한 이 같은 학생들의 폭력사태를 방치하고 외면하는 무책임한 사회 지도층에 대해서도 자못 비장한 어조로 “우리는 불의와 폭력의 세력과 대결하되 오직 양심의 승리로서만 극복할 수 있음을 안다. 그런데 아, 이 침묵하는 양심들이여…” 하고 절규했다(조선일보 1989.5.4.자, ‘침묵하는 양심들이여…’).
 
김상철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1990년 소련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는 모습을 보고, 사회주의는 집단과 집중에 집착해 모든 것을 망쳤다고 지적한 다음 “우리가 갈 길은 어디인가. 무엇보다도 인격의 존귀성이다. ‘인내천’(人乃天)이라 해도 좋고 천부의 존엄이기도 하다”고 역설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오류에서 출발하여 결국 인간을 황폐시켜 왔을 뿐임을 한 세기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썼다(조선일보 1990.7.31.자,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
 
김상철은 이어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지축을 울리며 등장했던 과학적 사회주의, 유물론적 인본주의는 저들의 맹신에도 불구하고 황폐의 열매를 맺었을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그 황폐의 열매를 맺게 한 ‘악의 씨’는 “바로 지적 오만과 독선, 그리고 정의로 위장한 증오와 평화로 위장한 파괴심”이라고 지적했다(조선일보 1990.7.12.자, ‘이 시대를 보는 눈’).
 
김상철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보았는가. 아주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그간 적잖은 무리와 비리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기초가 올바로 놓여 있음을 피차 재확인해야 한다. 그 기초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곧 인격의 존귀성이며, 토대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이다. 이데올로기나 사회제도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며, 자기가 믿는 정의라 해서 억압적 제도와 통제적 계획을 통한다면 결국 자발성과 창의를 쇠퇴시킬 뿐”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정권에 대해서는 ‘김일성과 같은 희대의 폭압자, 인권의 말살자’가 우리 대학가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한민국이 지켜온 인간의 존엄과 가치체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의 애국시민들은 반김정일과 자유통일을 외치는 국민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미래한국 2003.4.27., ‘김정일 끝내기’).
 
이런 글들을 보면 그가 이념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치열하게 사색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그의 굳은 신념이 노무현 정부 출범 첫해인 2003년 3․1절을 맞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 10만 명(경찰 추산)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반핵반김 자유통일 국민대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했다.
 
그는 당시 굴지의 보수논객이면서도 ‘아스팔트 보수세력’의 대열에 기꺼이 참여하는 행동파였다. 그는 해야 할 많은 일을 남겨둔 채 요즘 기준으로 아직 젊은 나이인 65세에 세상을 떴다. 더구나 그는 작고하기 4년 전부터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 활동을 못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특별한 아쉬움을 갖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김상철 변호사에게 미안한 점이 한 가지 있다.
 
1991년 그가 한미우호협회를 창립했을 때 나에게 발기인으로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이 단체를 앞장서서 만들기로 한 것도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통일을 위한 일념에서 나온 점을 나는 잘 알았다. 그러나 당시 나는 언론사의 현직 간부가 특정국가와의 우호단체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그에게 내가 참여하지 못하는 데 대해 양해를 구했다.
 
그 후 모 대기업 오너가 한중우호협회를 발기한다고 같은 부탁을 해왔을 때도 나는 같은 이유로 사양했다. 영웅과 인물은 난세에 나온다고 했는데 그가 세상을 뜬 지금도 난세가 치세로 바뀌지 않고 있으니 그가 끝내 세상을 뜬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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