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은 사실 앞에서 약할 수밖에 없다
거짓은 사실 앞에서 약할 수밖에 없다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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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월간조선 차장대우
내가 ‘김상철’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 대학 시절 잡지 고시계(考試界)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김상철 변호사는 ‘고시계’의 발행인이었다. 인권 변호사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다시 그의 이름을 접한 것은 1988년 4월의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였다. 그는 우리정의당(正義黨)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내가 살던 서울 강남을(乙) 선거구에서 출마했다. 문득 ‘그동안 인권 변호사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이름을 좀 알리더니 결국 국회의원 한 번 하려는 것이었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고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는 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대중이라는 공룡들이 격돌하는 상황에서, 무소속이나 다름없는 신생 정당 소속으로 출마를 해? 돈키호테 아닌가?’ 김상철 후보는 낙선했고, 그의 이름은 나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5년 후 김상철 변호사는 김영삼 정권의 첫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의 나이 46세. 그리고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린벨트 내 자택의 형질 시비가 일어 ‘7일만의 시장’으로 쓸쓸히 퇴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김상철’이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잡지나 신문을 통해서였을 뿐이었다.
 
일개 고시생이었던 내가 그를 만나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2000년 11월 나는 월간조선 기자로서 김상철 변호사를 인터뷰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6·15남북정상회담을 하고 햇볕정책을 본격화하면서 보수애국세력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시 조갑제 편집장의 지시로 보수주의 지식인·활동가 아홉 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때 인터뷰한 분은 김상철 변호사를 비롯해 송복 연세대 교수, 김용서 이화여대 교수, 박근 전 駐유엔대사, 여영무 前동아일보 논설위원, 임광규 변호사, 김병국 고려대 교수, 유석춘 연세대 교수, 서석구 변호사 등이었다. 이 기사는 그해 월간조선 12월호에 ‘9인 연쇄 인터뷰 - 국가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유파 이론가들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나갔다.
 
“김정일 정권은 ‘통일문제의 상대방’ 아니다”
김상철 변호사를 인터뷰한 것은 그가 당시 탈북난민보호 유엔청원운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서명자는 880만여 명이었다. 당시 김 변호사가 한 얘기는 1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내가 “탈북난민보호운동을 벌이는 입장에서 현 정권(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통일 문제의 본질은 북한 주민들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북정책은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확대하는 어떤 조치도 수반하지 않고 있다. 또 북한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는 배제되어 있고, 북한 주민의 압제자인 김정일만을 상대로 하고 있다. 김정일은 북한의 현실적인 통치자로서 남북문제에 대한 대화와 협상의 상대방은 될 수 있지만 통일 문제의 상대방은 될 수 없다.”
 
나는 “누가 통일 문제의 상대방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김상철 변호사는 망설이지 않고 “먼저 북한 주민들의 자유로운 투표에 의해 북한에 민주적인 헌법을 가진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 그 헌법에 의해 들어선 정부만이 통일의 협상 상대자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독일통일이 바로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통일 문제에 관해 다른 방법은 상정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김상철 변호사만큼 단호하게 ‘대화와 협상의 상대방’과 ‘통일 문제의 상대방’을 구분하면서 김정일 정권을 ‘통일문제의 상대방’에서 배제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당시는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의 인적 교류가 봇물 터지듯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물론 대부분이 진정한 교류라기보다는 정치선전의 색채가 강한 것들이었다. 북한은 노동당 창건 기념행사에 우리 측 정당·사회단체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물어보자 김상철 변호사는 생각하기조차 싫다는 듯 “이런 것은 얘기도 하지 말자”면서 “도대체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의 확대가 병행되지 않는 북한 지배층과의 교류, 협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북한 인권에 대한 고려가 없는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비판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배어 나왔다.
 
김상철 변호사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매매춘(賣買春) 근절’의 필요성을 한참 역설하기도 했다. “매매춘을 근절하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도덕과 정의가 바로 설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념문제를 물어보러 온 사람을 붙잡고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김 변호사는 체제전복을 추구하는 좌파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반역집단이 얼마나 오래 가겠나”
2002년 12월 제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다시 좌파 성향의 정권이 이어지자 보수애국세력은 무력감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가 이듬해 3월 1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반핵반김(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였다.
 
김상철 변호사는 집행위원장으로 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직후 나는 다시 김 변호사를 인터뷰했다. 그는 “이번 국민대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출발’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동안 ‘나라가 큰일 났다’ ‘나라를 구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하시던 분들이 국민대회에 참여하고 나서는 ‘이제 자신감이 생긴다’는 말씀들을 많이 한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이런 말도 했다.
 
“거짓은 사실 앞에서 약할 수밖에 없다. 거짓은 결국 진정한 양심, 정의감 앞에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다. 물론 거짓이 선전과 선동을 통해 진실인 것처럼 위장할 수는 있지만 결코 오래갈 수는 없다.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집단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이 불가사의하긴 하지만, 얼마나 오래가겠나?
 
지금 그들이 권력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대선에 참여한 유권자의 2% 미만의 차이로 승리한 데 불과하다. 그 정도라면 유권자 1%의 마음만 돌려도 뒤집을 수 있다. 국민들이 진실을 알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주권 세력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국가와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지금의 형세는 곧 역전될 수 있을 것이다.”
 
출범 직후의 노무현 정권이 기세등등하던 시절이었다. 자칭 진보세력은 ‘20년 집권’을 호언장담했다. 보수애국세력은 나라 걱정에 잠을 못 이루던 시절이었다. 김상철 변호사의 말은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안다. 구약성서 속의 선지자의 예언처럼 김 변호사의 얘기가 현실이 됐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2003년 3‧1절 국민대회 성공에는 기독교계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김상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는 인간의 존엄성, 법치주의와 적법절차, 공개시장과 개방사회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며 그 품성은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고 한다. 고관대작이건, 장애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인간의 존엄성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것이 나치즘이건, 공산주의건, 김일성 주체사상이건 간에, 어떤 경우에도 전체주의와는 타협할 수 없다.
 
기독교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며 ‘정의로운 인간은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이처럼 불완전하고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치주의를 거부하고 법치주의를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정신과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착각과 망상을 전파하거나 심지어 종북세력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성직자나 신자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젊은 보수운동가들의 産室 ‘미래한국’
어쩌면 그때 김상철 변호사는 ‘한국식 기독교보수주의’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보수운동의 현장에서 김상철 변호사를 여러 번 만났고, 크고 작은 기사를 썼다.
 
내가 김상철 변호사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것은 2008년이었다. 월간조선 8월호에 실린 <‘아스팔트 위의 보수’들은 지금>이라는 기사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찬밥 신세가 된 ‘아스팔트 보수’의 서운함을 기사화한 것이었다.
 
많은 ‘보수인사’들이 이명박 정부에 대해 서운함을 토로했다. 김상철 변호사는 그래도 이명박 정부를 위해 변명을 해줬다.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서너 달 만에 위기를 맞고 있는데 정권교체에 박수를 쳤던 보수세력이라면 지금은 정부를 밀어주어야 한다”면서 “4‧19 후에 언론 등이 정부 흔들고 여당이 분열했다가 9개월 만에 장면 정부가 무너졌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해 말부터 김상철 변호사는 신병(身病)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작년 12월 우리 곁을 떠났다. 김 변호사와 인연이 그리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제 나이 70을 넘어 80을 바라보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고관대작들이 보수운동의 전면에 나서고, 좌파세력이 그들의 전력(前歷)을 가지고 보수세력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 시비 거는 것을 볼 때마다 ‘김상철 변호사가 살아계셨으면…’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김상철 변호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미래한국’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미래한국’을 보면 자유민주주의, 기독교, 북한인권, 한미동맹 등을 강조하던 김상철 변호사를 뵙는 것 같다.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래한국’이 우리 사회의 젊은 보수애국운동가들의 산실(産室)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이다.
 
김상철 변호사의 사위로서 ‘미래한국’을 이어가고 있는 김범수 대표, 지난 10여 년 간 우리 사회 내 종북세력의 실체를 고발하고 강연 등을 통해 자유통일의 비전을 전파해 온 김성욱 한국자유연합 대표와 김필재 조갑제닷컴 기자, 논술 교육과 저작 활동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설파해 온 오태민 씨, 명쾌한 논리와 맛깔 나는 글 솜씨로 자유주의 이념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이원우 ‘미래한국’ 기자 등은 젊은 활동가들이 부족한 보수진영의 귀한 인재들이다.
 
처음 인터뷰했을 때 김상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비판은 사회의 활기를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비판 그 자체는 생산적이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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