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일을 '독하게' 했던 사람
착한 일을 '독하게' 했던 사람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3: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정숙 前 보사부 장관 · 서울신문 고문
돌아가신 김상철 회장을 생각하면 번번이, 선 자리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다. 그분은 이렇게 허망하게 갈 분은 아닌 것 같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꼭,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다시 일어나 우리 곁에서 희망과 의욕을 본보여줄 것으로 믿었던 마음이 울컥 울컥 괴어오기 때문에 실컷 울어버리고 싶어진다. 정말로 나는 그분이 그렇게 떠나가지는 않을 줄 알았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을 구분할 때 독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한 묶음으로 묶고, 순한 사람과 착한 사람을 한 갈래로 잡아 구분한다. ‘악독’하다든가 ‘착하고 순하다’든가 하는 식으로 조합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면서 겪어본 바로는 그런 식의 상투적인 구분 방법에 함정이 있음을 알게 됐다. 악함과 독함은 별개의 것이고 착함과 순함도 같은 속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착한 원칙을 수행하기 위해 독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순한 듯한데 행동의 결과를 보면 선하지 않은 짓을 순한 방법을 이뤄내서 사람들을 속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다. 말하자면 순한 사람이 다 착한 것은 아니고 독한 사람이 다 악한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김상철은 ‘독하게 착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정당 이름을 ‘맑은 샘물’이니, ‘무슨무슨 정의당’이니 하는 낭만적인 방식으로 붙이고, 그러면서 그 정당의 운영을 성직처럼 엄격하고 독실하게 이뤄낼 것을 신념처럼 여기며 정치를 꿈꿨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그분은 몹시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고 추진하는 단계에서는 무서운 집념과 의지를 보였다는 뜻에서 그는 아주 ‘독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섬광처럼 번득이는 통찰력
 
나약하고 행동에 소심한 보수 우익의 하릴없는 무능(無能)의 거대한 덩어리에 그분의 ‘독함’은 감연히 불 당기는 심지가 돼 줬고 그 불꽃의 에너지가 우리 위기의 한 시대를 구원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한편 그런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무슨 일인가 시작한다는 소식에 접하면 듣는 마음이 공연히 긴장되고 무거워지기도 했었다. 그 일을 해내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진을 빼고 허위허위 숨찬 일을 해낼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런 노고에 끌어들여질 일이 지레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노라고 가족이나 주변의 사람들은 얼마나 수고를 하며 따라야 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거기까지 따르는 일도 쉽지 않으므로 노력과 성과를 독려(督勵) 당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터인데 싶어 안쓰러운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참 생전에 많은 일을 벌였고 또 해냈다.
 
그렇게 그 분은 앞날을 통찰하고 현상을 분석하는 일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가 제시하고 결단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동의하면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추진력을 보였고 그러나 참여한다는 것은 숨차게 보조를 맞춰야 하는 일이어서 슬며시 뒤로 물러섰던 일도 꽤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새삼 죄스럽기도 하다. 한쪽에 비켜서서, 무한동력의 추진력으로 밀고 가는 그 자취를 구경하듯 지켜보기만 했다. 그럴 때만 해도 그렇게 쉬이 그분을 떠나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 분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느닷없고 생소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수가 없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생각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한동안 떠나지를 않아서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반드시 되돌아와 우리 앞에 늠름히 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마침내 병원에서 긴 투병이 진행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나는 겨우 그분 병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투병 모습은 참으로 놀랍고 독특했다. 그것은 의식을 완전히 잃은 환자가 흔히 보이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온갖 복잡한 기계를 거느리고 절망스럽게 누워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던 병상에서의 모습
 
눈을 맞추고 금방이라도 대화가 가능할 것 같은 깨끗하고 생생한 표정이 그에게는 있었고 실제로 말을 하고 있듯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입언저리의 근육 놀림이 확연했다. 곧 털고 일어나 옛 이야기하듯 병상을 회상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게 했다.
찾아간 우리를 보고 입맛을 다시듯이 표정을 보이면서 움직이는 그 입언저리 모습을 보며 병상을 지키던 부인이 말했다.
 
“…혼자 이야기를 많이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은 분들이 오시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저렇게 입을 계속 움직여요.”라고.
그런 부군을 보며 부인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참 잊히지 않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통곡이 하고 싶어진다. 꼭, 정말이지 꼭 한번은 긴 잠에서 깨어나듯 일어나 그 입놀림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영영 그는 가버리고 만 것이다.
 
나의 뇌리에 새겨져 있는 ‘김상철의 무서움’ 중 또 한 가지는 그 독실한 신앙심이다. 목회자도 아닌 분이 그렇게도 독하게 믿음을 실천하는 일은, 그 분 말고 달리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맹신이나 광신 같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하나님과 맞장을 뜨다가 승복한 사람이 상대에게 보이는 전폭적인 신뢰와 존엄 같은 것이어서, 그 확신은 흡인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 그 시선을 만나면서 문득 현기증을 느낀 적이 있다. 누구든 그분의 신을 함께 믿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현기증을.
 
그런 그분의 신은 마침내 그를 이끌고, 안동해 데리고 간 것 같다. 그 분 빈소에서 만나본 미망인이 전해주는 그분의 최후 모습이 그런 믿음을 내게 주었다.
“죽음을 맞을 때의 모습이 어찌나 기쁘고 행복해 보였는지… 필경 남편은 하나님을 만난 것 같았어요. 팔을 벌려 누군가를 안아 들이는 느낌으로 기쁘게 웃으며 가셨어요. 곁에서 지켜보던 우리 모두가 다 그 모습을 보며 기쁘고 흡족했어요.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순간에는 슬프지 않았어요.”
 
생전에 지녔던 고인의 신앙적 독실함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가 이승의 마지막 끝에서 저승으로 건너갈 때 그 따뜻한 어느 분의 품에 안겨 건너갔음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가 있다. 문득 문득 통곡이 하고 싶게 아쉽기는 하지만 미망인과 유독이 느꼈다는 신의 은총과 그 기꺼움이 내게도 충분히 전해진다. 그 전능한 분의 품에서 평화롭고 기쁨에 넘친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있음을 믿으며, 그분과 함께 한 소중한 사귐의 세월에 오래 오래 감사드린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