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가장 빛났던 순간-제2의 3·1운동 '反核反金 국민대회'를 주도하다
그가 가장 빛났던 순간-제2의 3·1운동 '反核反金 국민대회'를 주도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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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前 월간조선 사장
김상철 변호사를 만나면 늘 힘이 났다. 항상 확신에 차고, 낙관적인 그의 분위기에 전염되곤 했다. 그의 신념체계는 기독교 정신과 대한민국 헌법에 기초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를 ‘절대악’으로 보는 기독교적 자유민주투사였다.
 
1984년 무렵 친구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나기 전에도 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서울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학생 대표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초대된 자리에서 직언(直言)을 했으며 판사가 되어 소신 판결을 하다가 변호사가 되어 고시계(考試界)란 잡지를 내고 있는,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민주화 운동이 대세가 되어 가던 시절이고, 거리는 함성과 최루탄 냄새로 덮이던 때였다. 사소한 차이는 대의 앞에서 덮이던 순수한 계절이었다.
 
김 변호사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이 된 1987년 6월 대시위엔 재야 세력 대표로 참가했다.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선언, 1노3김의 대선, 88년의 총선과 여소야대 국회 등장, 그 해 9월의 서울올림픽, 국회의 5공 청문회, 전두환의 백담사 행으로 이어지는 ‘뜨거운 계절’을 통과한 뒤 다시 만난 김 변호사는 북한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민주화는 이제 정상궤도를 달리기 시작했다는 안도감에서 북한의 인권문제에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나도 월간조선에 북한 관련 기사를 많이 쓰고 있을 때여서 화제가 공통이었다. 1989년 봄 나는 대한항공 폭파 김현희 독점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는데 김 변호사는 그 글을 읽고는 금방 북한의 본질을 신정(神政)체제라고 규정했다. 인터뷰 기사는 정호승 기자가 쓴 탈북자 이야기와 함께 ‘김현희의 하느님’이란 제목의 책으로 고시계에서 출판됐다.
 
1989년 부산 동의대에서 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져 진압경찰관 7명이 죽은 사건 직후 김 변호사가 조선일보에 쓴 칼럼은 민주의 이름으로 이뤄지던 법치 파괴를 규탄한 글이었다. 전국의 경찰관들로부터 수백 통의 감사편지를 받았다고 흐뭇해했다.
 
양비론을 거부한 사람
 
1988~90년 무렵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직선제 선거를 거쳐 출범한 노태우 정부를 정통성 있는 민주 정부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보고 부정할 것이냐를 두고 갈렸다. 나와 김 변호사는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 정부이니 무탄무석(無彈無石) 같은 양비론을 펴지 말고 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 시절보다 더 친밀해졌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서울시장으로 임명된 김 변호사는 그린벨트 형질변경 문제가 제기되자 7일 만에 물러났다. 그 직후 만난 그는 전혀 기가 꺾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김 변호사는 조직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1991년엔 한미우호협회, 1999년엔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를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2002년엔 ‘미래한국’이란 주간신문을 창간했다. 탈북자 난민 지정을 위한 1000만 명 서명 운동은 탈북자 문제를 국내외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金 변호사가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했던 2003년 3월 1일 ‘반핵반김 국민대회'는 제2기 좌파정권 등장에 위기를 느낀 한국의 자유진영이 집단적 행동을 선언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김 변호사는 넓은 인맥을 동원하고 조직 경험을 살려 안보단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 보수적 지식인들을 한 덩어리로 묶은 실무 책임자였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들을 망라했다는 점에서 제2의 3·1운동이었다.
 
서울광장에 모인 대군중은 보수도 아스팔트에 나올 수 있고 투쟁할 줄 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광화문과 인터넷을 장악해야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 “침묵하는 다수는 필요 없다. 행동해야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각성이기도 했다. 이 집회는 잇단 대선 패배로 공황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다.
 
김상철 변호사의 생애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 집회에서 부른 ‘전우야 잘 자라’는 군가는 애국의 노래로 다시 살아났고 예비역 대령 모임이 대회 성공의 여세를 몰아 ‘국민행동본부’로 이름을 바꾸고 애국투쟁의 선봉에 섰다.
 
노무현 정부 시절 애국운동 단체 지도자들은 테헤란로에 있는 국민행동본부 사무실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선 즉석 대응책이 자주 나왔다. 좌익들이 평택 미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를 한다, 인천의 맥아더 동상 파괴를 획책한다, 누가 경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는다는 등의 정보가 들어오면 “내일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회의를 하는데 “김상철 변호사가 앞장서야 한다”는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마다 “그러면 내일 어디서 만나죠?”라면서 선뜻 총대를 메는 이가 김 변호사였다.
 
김상철 변호사의 애국 투쟁을 지탱하는 논리와 신념은 성경과 헌법이었다. 자연스럽게 건국 대통령 이승만 숭배자가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 탁월한 안목을 보여줬다. 나도 그를 따라 “대한민국의 첫 공식 문서는 기도문이다. 이 나라는 기도로 시작된 나라이니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버릇처럼 됐다. 김 변호사는 2000년엔 건국대통령 이승만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잇단 대선 패배로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다
 
2008년 8월 15일 경복궁에서 정부 주최로 ‘건국 6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야당은 건국(建國)이란 말에 불만을 품고 불참했다. 이 자리에서 김상철 변호사를 만난 게 마지막이 됐다.
 
기념식이 끝나고 우리는 청계천 입구에서 애국단체가 따로 차린 건국 대통령을 기리는 행사장으로 걸어갔다. 김 변호사는 “정부가 주관하는 건국 60주년 기념식에서 건국 대통령과 미국에 대한 감사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은 게 섭섭했다”고 말했다. 아쉬워하던 그 표정과 말투가 지금도 생생하다.
 
김상철 변호사는 한창 때에 갔지만 그는 ‘미래한국’이란 분신을 남겼다. 사위 김범수 사장을 중심으로 좋은 잡지를 만들어가는 ‘젊은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미래한국이 한국의 이코노미스트가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김 변호사의 다른 일면은 저술가였다. 김상철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미래한국을 대할 때마다 그가 생각나니 멀리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가 펴지 못한 뜻은 미래한국에 의하여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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