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의 숭고한 길
0.1%의 숭고한 길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5: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근미 소설가 · 중앙대 겸임교수
대학에서 소설을 전공하고 장편소설을 3권 출간한 나를 사람들은 전문 인터뷰어로 알고 있다. 다양한 직종을 거치면서도 애초에 시작한 인터뷰만큼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인터뷰한 분들 가운데 70% 정도가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이다. 대개의 경우 좋은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를 했지만 김상철 변호사님과의 인터뷰는 좀 달랐다.
 
2001년 6월 ‘탈북 난민보호를 위한 UN 청원서’ 서명 받는 일을 주도한 김 변호사님을 만났다. UN으로 보내는 청원서에는 ‘탈북자들은 국경 침범자가 아니라 보호를 요청하는 난민으로 이들을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하라, 난민들의 강제송환을 즉각 중단케 하고 이들을 위한 난민보호시설을 적절한 장소에 설치 운영하라’는 두 가지 요청이 담겨 있었다. 당시 청원서의 의미도 대단했지만 서명자가 1180만495명이나 됐다는 점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인터뷰는 너무나 바쁜 김 변호사님의 일정 때문에 휴일 낮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나는 갑자기 떨어진 취재 지시에 준비를 많이 하지 못했으나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북한 문제라니 ‘대충 다 아는 거니까. 서명운동의 의미와 1000만 명 넘은 사람들로부터 서명을 받았으니 특별히 활약한 사람들이 있겠지. 그런 거 좀 물어야겠다’ 이런 가벼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웃음기라곤 한 줄기도 없는 표정으로 비장하게 설명하는 김 변호사님을 대하자 내가 안이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서명 준비를 위한 ‘비전 126 중보기도 모임’을 잘 모르고 중국으로 탈북한 이들의 상황을 얘기할 때 덤덤한 나의 반응에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까지 인터뷰에 응하셨다.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제가 그간 탈북자 문제에 무심했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라고 한 뒤 ‘앞으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참여해야겠다’고 하려는데 결국 김 변호사님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번에 기자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하나같이 북한문제에 무심해서 놀랐어요. 기사 쓸 생각에 오긴 했지만 탈북자 문제를 다들 남의 일처럼 생각하더군요. 프랑스 기자가 ‘어떻게 대한민국 사람들은 동족 300만 명이 굶어죽었는데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희희낙락하며 잘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할 때 정말 창피했어요.”
 
그 말을 마친 김 변호사님의 얼굴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줄기차게 해대는 생떼와 시도때도 없는 위협, 약속을 밥 먹듯 어기는 행태 등으로 인한 ‘북한 피로감’에 젖어 있는 수준이었으니 말을 잇기가 조심스러웠다.
 
무슨 사태가 발생할 때면 사석에서 김일성 부자만 비판했지 북한 주민들까지 걱정하는 사람은 드문 게 주변 환경이었다. 북한 주민의 아픔에는 둔감하고 우리가 당할 피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시민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80년대 학번인 내가 친북이나 종북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악수를 청하는 김 변호사님에게 “제가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라고 변명하는데 울컥하며 눈물이 맺혔다. 열심히 뛰는 분들이 있는데 너무 무심하게 살고 있는 게 창피해서였다.
 
김 변호사님의 결연한 삶을 따라가기 힘드니 다시 대면할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나 다음날 UN 청원서 전달 장면을 취재하러 국회에 가야 했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기둥 뒤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는데 어느 순간 나를 발견한 김 변호사님이 다가와 환한 얼굴로 악수를 청하셨다. 방송사 카메라까지 대거 취재를 나와 기자들이 많았지만 나를 챙겨주실 때 먼저 나서서 인사드리지 않은 게 죄송했다.
 
그날 이후 이런 저런 자리에서 마주쳤고 그때마다 늘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하셨다. 뵐 때마다 ‘북한 피로감’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라 김 변호사님이 늘 어려웠다.
 
2005년 3월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의 진행으로 ‘북한해방을 위한 전략전술 모색, 김정일 제거는 과연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대담을 할 때 김상철 변호사님은 미래한국신문 회장 자격으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자리했다. 나는 정리 기자로 참석해 대담을 녹음하고 대화의 흐름을 파악했다. 그 자리에서 반핵반김 데모를 주도하며 우파를 결집시킨 김상철 회장님의 진면목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당시 김정일이 핵보유 선언을 하자 노무현 정권도 대북 자세를 조금 변화시키려는 조짐을 보일 때였다. 김상철 회장님은 “김정일은 끝났다! 북한은 당장 해방시켜야 한다!는 함성을 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상의 변화는 함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함성을 외치면 북한에도 그 소식이 가고, 미국·일본에도 갑니다. ‘남한에서 북한 해방운동이 일어났다. 조직이 됐다. 대대적으로 움직인다’는 소식이 북한 사람 누구에게 한마디만 딱 던져져도 그 사람들은 용기백배하는 거죠.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김 회장님은 북한해방운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절체절명의 운동임을 강조하면서 행동할 주체세력을 새로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기사의 리드문은 <한국인이 일어나야 세계가 움직인다.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새 주체세력이 나와야 한다. 한나라당은 보수로 위장한 친좌(親左)정당이니 희망이 없다>였는데 바로 김상철 회장님이 했던 발언이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대담에서 김상철 회장님은 시종일관 결연한 어투로 행동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2008년 12월 미래한국 우남리더십 1기 과정에 참여하게 됐는데 첫 번째 강사가 다름 아닌 김상철 회장님이었다. 우남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한 강의를 마치자 김 회장님은 어김없이 먼저 악수를 청하시며 앞으로 미래한국에 글을 많이 쓰라고 당부하셨다.
 
2009년 3월부터 미래한국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4년여 동안 우리 사회 여러 인사들을 인터뷰를 했다. 만나는 분들마다 김상철 회장님이 와병 중인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시대를 앞서가며 해법을 제시하고 행동하신 분이 속히 일어나 새시대를 견인하길 바란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김상철 회장님 같은 삶을 사는 분은 극히 드문 케이스이다. 개인의 명성과 안락에서 공공의 이익 쪽으로 삶의 추를 옮긴 우리 사회 0.1%, 그들이 있기에 변화가 시작되고 역사는 진전한다. 김상철 회장님이 심은 매거진 <미래한국>이 대한한국의 미래를 올바르게 이끌어 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