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교계를 움직인 그의 신념
美 교계를 움직인 그의 신념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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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호 美 장로교(PCUSA) 총무 · 필라델피아 임마누엘교회 원로목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한국의 어지러운 시대에 자기의 삶을 내려놓고 애국지사들의 가슴을 에며 고난을 감수하는 리더십을 그린 한국인의 깊은 정서와 한이 서린 한국의 가곡이다. 죽음의 두려움도 떨치고 용맹스럽게 살아갔던 옛 지도자들의 발자취를 채취한 ‘선구자’는 故김상철 장로님이 즐겨 부르신 그의 ‘마음의 노래’이기도 하다.

1990년 중국 방문 때 동북성 용정시를 방문했었다. 이때 비암산까지는 가지 못해 일송정은 보지 못했으나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해란강 줄기를 보며 깊은 감회가 있었다. 중국 동북성 일대는 우리 애국지사들의 혼이 묻혀 있지 않은가?

1980년대 중반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김상철 장로님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필라델피아의 큰 처형 댁에 잠시 머무르셨다. 처형 댁의 초청으로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며 교제했다. 처형 되는 분은 우리 교회에서 아주 모범적인 권사님이시다. 장로님도 여행 일정을 다 마치셨고 나도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장로님이 한국 가곡 ‘선구자’를 즐겨 부르는 것을 듣게 됐다. 썩 잘 부르는 것도 아니며 기교의 노래도 아니었지만 노래를 들으며 이 분은 신념이 강하고 비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여러 번 만나면서 자기보다 공평과 정의를 위해 살며 또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려는 것을 보았다. 그의 삶의 목적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목사로서 이런 분들을 좋아한다. 나도 6‧25로 폐허가 된 한국의 경제를 살리려는 생각을 하고 일찍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 유학을 왔다.

그 분은 그 후에 서울교회 장로가 되고 한미우호협회 회장을 지내며 미래한국신문을 발행하는 등 많은 일을 하셨다. 또 비전126기도모임을 하며 한국과 미국 전역에서 국가를 위해 기도했다. 이렇듯 백성들에게 바른 소리를 외치며 선구자의 사명을 힘써 하셨다. 이런 많은 일들을 할 때 내가 이전부터 아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도와드리는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은 모두 한결같이 각 분야에서 바른 지도자들이다.

나는 1954년 미 아이오와주립대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하고 컨설턴트 엔지니어로 6년 동안 일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신학교에서 다시 공부하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종으로 바른 지도자가 되기 위해 목사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와 같은 관점이 있었다. 그는 나와 이슈가 되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김 장로님은 고도의 지성인이면서도 아주 따뜻하고 섬세하시며 또한 신앙인으로 앞을 내다보는 분이셨다.  

고도의 지성인, 따뜻한 신앙인

김 장로님은 대화를 하다가도 좋은 이야기, 기억해야 할 것들은 수첩을 꺼내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만날 때마다 보곤 했다. 그는 수첩의 사람이다. 나는 그를 만나 뵐 때마다 그가 나라의 선구자임을 확신했다. 그는 나라와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좋은 일들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서 거주하지만 미약하나마 적극적으로 그가 하는 일을 기도로 도우며 또 할 수만 있으면 시간을 내 기쁘게 도와 드렸다.

나는 프린스턴 신학을 나와 처음에는 필라델피아 외곽에 있는 도시 드렉셀 힐(Drexel Hill)에서 2년간 미국 앵글로(Anglo) 교회를 목회했다. 이때부터 점점 한국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1972년 2월부터 펜 대학(University of Penn) 주변에 있는 작은 무리의 한인 목회자로 인도하셨다. 펜 대학은 미국의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 중의 하나이다.

적은 무리로 시작하는 펜 대학가 중심의 의사, 교환교수, 유학생들이 모인 우리 교회는 이들을 중심으로 들어오는 이민자 가족들이 급속히 많아졌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비전대로 많은 엘리트를 만났다.

이전에는 산업을 발전시켜 경제를 일으키며 한국을 위해 살려고 했던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후에는 복음을 전해 사람이 변화돼야만 한국을 일으킬 수 있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았다. 소위 많은 한국의 대표선수(KS Mark Man)들이 복음으로 변화돼 한국에 나가 여러 면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27년을 지내면서 김 장로님과 만남의 축복이 있었다.

1999년 미국 한인 2세들이 점점 장성해 이제는 2세 목회자로 리더십이 세워져야 할 시기가 왔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나에게 미국장로교단에 속한 한인교회(특히 2세 목회자 양육) 담당 총무로 사명을 바꾸셨다. 이때 김 장로님은 탈북난민운동으로 거의 몸이 쇠약해지는 것도 잊은 채 탈북난민들을 위해 말 그대로 밤낮으로 뛰셨다.

한국의 힘만으로 북한의 악한 만행을 외칠 힘이 부족한 것인지 미국에서도 북한인권 박해 저지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에서 내게 부탁의 전화를 하신 것이다. 즉 미국 장로회 교단 총회 때는 미국 전역에서 목회하는 많은 미국, 한국 목사님들이 참석하므로 탈북자들의 참혹한 상황을 호소한다면 더 효과적이라며 도와 달라는 것이다. 돕는 방법은 총회 때 연설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총회에 안건을 제출하는 때가 지난 후였다. 연설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그러나 총회 전날, 월요일에 아주 급한 건들이 발생할 것을 위해 마지막으로 회의가 개최된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을 전해들은 장로님은 얼마나 이 일이 급했는지, 믿음으로 자신이 확신이 있었는지, 총회 때 기회를 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미국에 와서 때를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오겠다는 것이다. 인권을 침해 받는 북한 난민들을 심히 사랑하기 때문인 것이다.

총회는 화요일 시작해 금요일에 끝난다. 그러나 각 멤버들은 월요일 오전에 도착해 다음날부터 있는 총회식순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한다. 총회는 플로리다의 탬파에서 열렸다. 월요일 오후 장로님도 도착하셨다, 만약 회의에서 ‘탈북난민돕기’ 안건이 부결되면 장로님이 오신 것은 헛걸음이 되는 것이다.

헛걸음될 가능성 알고도 찾아온 의인 김상철

나는 월요일 아침에 도착해 주최 측과 이 건을 미리 상의하는 게 좋을 듯해서 전화를 했는데 아무리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연락이 안 되면 북한 난민들의 딱한 사정을 알리게 하는 연설을 어떻게 하나….’ ‘탈북난민돕기’ 안건은 다루지도 못하고 시간이 없어 기각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옆을 살피니, 아! 위원회의 회장이 바로 내 옆에서 등을 돌리고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회가 또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한국의 ‘탈북난민돕기’를 잘 설명했다. 안건에 들어가도록 설명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렸다. 나는 행사의 멤버가 아니어서 그 회의에 들어 갈 수 없어 밖에서 회의 소식을 기다려야 했다.

회의 중인데 몇 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나와 나에게 회의 소식을 알려 줬다. ‘탈북난민돕기’ 안건을 취급을 했는데 이는 정치적 문제이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으로 기울어지면서 의견이 교차돼 휴식시간을 가진 후 다시 계속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난감함을 느끼며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안에서 또 다시 바로 내 옆에 그 회장이 있었다. 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이번에는 아주 우스꽝스런 곳에서 기회를 주셨다.

‘탈북난민돕기’는 정치문제가 아니고 믿는 자들의 신앙 문제, Mercy Ministry이므로 난민을 위해 미국에서 우리 교단이 당연히 동참해 도와야 한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도 변호사이고 장로여서 고난 받는 자들의 어려움을 절감하며 다시 속개된 회의에서 김 장로님에게 총회에서 발표하도록 허락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셨다.

장로님의 연설은 이러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라(행16장9-10).”

말씀을 읽으신 후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영어로 또박또박 말씀을 외쳤다. 총회에 참석한 미국 전역에 흩어져 목회하는 미국인들과 한인들에게 북한의 인권 침해, 독재 정치와 현재 중국에 흩어져 있는 탈북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그들이 잡혀 북송될 경우 받게 될 박해에 대해 말씀하시고 미국 PCA 교단이 참여해 그들을 도와 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 결과 바쁜 총회 일정 속에서 계속 돼야 하는 회의를 중단하고 내가 대표로 기도하며 참석한 대표들이 북한의 정치와 고통 받는 난민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상철 장로님은 믿음으로만 가질 수 있는 선견지명의 안목으로 나라의 일을 단행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고 쓰셨다고 나는 본다. 총회에서 외부 사람을 세워 연설하게 하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믿음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던 것 같다.

김상철 장로님의 죽음은 나라와 사람들을 위한 아름다운 삶의 종결이다. 지금 그는 천국에서 헌신과 사랑의 수고를 마치고 입성한 믿음의 장군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도우시고 인도하신 성령님과 여러 믿음의 형제들과 영원하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동참하고 계신다.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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