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만난 '서울시장 장로님'
교회에서 만난 '서울시장 장로님'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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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택 서울교회 집사 · 에그린농장 대표

하나의 세대가 바뀐다고 하는 30년 가까운 군사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세력이 주도해 만들어진 새로운 헌법으로 직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이 선출된 1980년대 말경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온 두 정치 지도자의 갈림 때문이었는지, 연착륙하라고 하는 섭리였는지, 군사혁명 세력에게 민주 정권을 도로 쥐어주는 어설픈 역사가 연출됐다. 자연발생이었는지 혹은 어떤 배후세력의 유도였는지 간에 거리의 데모는 민주화 투쟁시기의 열도와 별로 다르지 않게 시끄러웠다.

어느 날은 을지로3가 지하철역을 점령한 시위대를 향해 데모로 나라가 망한다고 열변하는 어느 노신사의 말도 야유에 묻혀버렸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나의 말도 우-하는 함성에 묻혀 버렸다.

그 무렵 긴 침묵을 깨는 심야토론이라는 TV프로는 토요일 밤의 나의 잠을 기대와 실망으로 많이 빼앗아 가곤 했는데 어떤 분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헐어 버릴 때가 아니라 일으켜 세울 때라”고,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들끓는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 시켜야 한다고 하는 젊은 변호사의 말에 당시 자유의지를 대변한다고 하는 모 총장과 모 교수는 젊은 정의감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 게다가 자신을 성찰하라고까지 언성을 높였다.

예나 지금이나 토론문화가 거칠어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냉철하면서도 겸손 절제된 김상철 변호사님의 지혜와 용기에 반했다. 그 후 그분의 논설도 찾아 읽게 되고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고 가슴이 뛰었다. 얼마 후 그 총장님은 데모대 배후에 반국가적 불순세력이 연계돼 있다고, 시위 자제를 외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 직후 첫 서울시장에 임명된 정치 신인이 서울 한복판의 호화주택 농지에 정자를 짓고, 그린벨트 훼손을 복구하라는 공문서도 묵살했다는 등의 비난이 뉴스 화면을 휩쓸면서 1주일 만에 낙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시대 기득권자의 타락이 이렇게 예외가 없구나 생각하며 허탈했다. 그 후 이사 가서 공교롭게도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교류 없이 지나치곤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문제의 주택은 내가 전에 더러 들렀던 우면동의 분재원 건너 집으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색 바랜 목조 문틀의 수수한 벽돌집이었을 뿐이었고 그 요란한 비난들은 한국정치 바탕의 어이없는 연출이었음을 알게 됐다. 가까이 할수록 순박하고 따스했으며 뜨거운 열정을 비범한 분별력과 신앙심으로 가다듬는 모처럼 존경하고 싶은 고귀한 영혼을 느끼게 하는 분이었다.

정의를, 선을 세우자고,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돈도 시간도 없다보니 제대로 돌보지 못한 원두막(정자)이 있던 그 뜨락, 사랑하는 텃밭의 꽃나무 과수나무들이 아까워 보여 당시 아마추어였던 이 정원사가 좀 도와드리고자 함께 가위질하면서 깊은 지혜와 인격에 머리 숙여졌다. 사람 만나기 어눌하던 이 사람이 탈북민을 돕는 일에도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우익정론지 ‘미래한국’을 발행하면서 남북화합 운운하며 북한인권 실정에 침묵하고 불의한 세습, 독재, 전쟁 정권을 용납하는 세력들은 양심을 저버린 불의한 무리들이라고 몰아치는 투쟁 논조는 너무 과격해 보이기도 했다. 대화를 하려면 상대를 인정해야 하고 화합(통일)을 하려면 절충이나 양보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전투에 휘말리다보니 이성과 균형에서 멀어지는 투사가 돼가는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오늘의 현황에서 보면 너무나 정확한 경고로서 감탄스러울 뿐이다.

모처럼 참여해 본 탈북난민 돕기 세미나 말미에서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급여 실수령액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그 월급 60~70달러를 북한 당국이 달러로 받아 공식 환율로 환산해 북한 화폐로 지급하는데 그곳의 암시장 환율은 거의 20갑절이니 실제로 받는 보수는 얼마가 되는가? 참여자, 주제 발표 학자들 누구도 모른 채 지나쳤는데 장로님만이 이 엄청난 착취의 모순에 주목하셨던 것이다.

모두가 놓친 것을 발견했던 한 사람

그날 회의 뒤 다과 자리에서 탈북민 정착촌 건설 지원의 운을 띄웠다. 나는 농장을 개간하고 집을 손수 지었다. 간벌해 버려지는 목재 등 폐기물을 활용해 귀틀집과 창고를 예술작품처럼 훌륭하게 건축했다. 이 사회에 아깝게 버려지는 잉여 재활용 자재들을 모으고 탈북민들이 생명을 걸고 탈북한 의지를 합하면 토지만 마련될 때 자기 집을 지을 수 있으리라는 내 의견에 많이들 공감하셨는데 장로님 건강이 안 좋아지시면서 미뤄졌다.

이제 내 농장이 자연치유의 좋은 조건을 갖춰 가고 있다. 뽕나무, 유실수를 가꾸고 산채와 버섯을 재배하며 인공 사료가 아닌 자연 방사로 가축을 키우고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지가 주어진다면 탈북민 한 가족이라도 자기 집을 손수 짓고 꿈을 갖도록 정착의 성공 사례를 만들고 싶다. 장로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더 앞당겨질 수 있을 터인데 아쉽지만 아주 멀지는 않을 것이다.

2007년 12월 7일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오염은 세계의 뉴스 거리였다. 1주일이 지난 새벽 흡착포가 모자라 중국, 일본에서 긴급 수입한다고 하는 라디오 소리는 산속 농장의 나를 벌떡 일으켰다. 분당의 집으로 돌아와 아파트 관내 방송으로 30분 만에 모은 면제품 헌 내복 마대들을 9인승 갤로퍼 승합차에 빽빽이 밀어 넣고 재난 현장에 도착했지만 그곳은 아수라장이었다.

현장에서는 차들이 꽉 막혀 지휘본부까지 짐을 들어서 옮겨야 했고, 어느 지점에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그저 되는 대로였다. 작업 가능한 썰물 시간이 두 시간이라는데 겨우 한 시간 봉사하고 퇴각했다. 작업을 마치고 나오는 검은 기름 얼룩진 잘 생긴 한국인의 얼굴들. 그것은 하얀 비닐 옷의 배달의 천사들의 행진이었다. 그런데 지휘관의 나팔 소리는 없었다.

그날 나는 다섯 항목의 제안서를 써서 김상철 장로님께 보여드렸다. 교통 공유 터미널 지점 설치, 현지 교회 등 민박 숙박 활성화, 작업가능 시간대 홍보 및 작업 안내소 배치, 방제 장비 및 헌옷 면제품 수집, 방제작업 도구 재활용의 내 제안서를 보신 김상철 장로님은 즉석에서 기독교 방송국 등 관계자들과 전화하고 또 연락처를 알려 주며 격려하셨다. 좋은 뜻에 서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남은 큰 축복이다.

김상철 장로님과 같이 찬양을 하던 때가 그립다. 그때 장로님은 찬양대장이시며 베이스 파트를 맡고 나는 테너 파트였다. 말수가 없으신 장로님이 어느 날은 ‘찬양대 김훈, 김형택 집사님 입모습만 보아도 은혜가 됩니다.’라고 하시며 눈을 마주치던 게 생각난다. 최원자 권사님께서 아침에 일어나면 ‘장로님 깨어나실 날이 하루 더 가까워졌다’고 하신다는 기다림도 이젠 천국의 빛난 소망으로 승화해야만 한다.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의 님은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이 뿌린 좋은 씨앗, 올바른 열정은 돌짝 밭과 가시덤불도 뚫고 잘 자라서 선한 열매로 맺어 자유 대한과 인류의 양심을 반듯하게 이끄는 빛과 향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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