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칼럼이 맺어준 22년 지기
한 편의 칼럼이 맺어준 22년 지기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0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원 청소년도서재단 이사장 · 한미우호협회 부회장

정원식 교수가 총리로 내정된 후 외대 마지막 수업에서 학생들한테 테러를 당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떼로 달려들어 스승의 얼굴에 밀가루와 계란을 뭉갰던 것이다. 온 사회가 경악하고 분노했지만 아무도 앞장서 나무라려고 하지 않았다. 90년대 초 좌파 운동권 학생들이 캠퍼스를 휩쓸던 시절이었다.

그런 즈음 신문을 펼쳐들다 한편의 칼럼이 확 눈에 들어왔다. 학생들을 매섭고 세차게 나무라는 글이었다. 짤막한 글 한편에 그렇게 감동을 받은 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필자는 김상철이라 했다. 생업과 도서 기증 일 빼고는 아는 것이 없는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생면부지의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이 인연이 돼 그 후 22년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동참하게 됐다. 이런 일들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일에 손을 댄 것은 한미우호협회가 효시였다. 운동권 학생들의 반미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90년대 초다. 뜻 있는 인사 300명을 끌어 모아 방어 성채를 세운 것이었다.

이후 친북좌파가 국가의 기간을 흔들려 덤빌 때면 한미우호협회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미군기지 평택이전 때가 그러했고, 부시 대통령 방한 때가 그러했다. 부시 방한 때는 환영인파가 서울광장을 가득 메우고 넘치게 해서 당시 창궐하던 광우병 소동을 잠재우고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기도 했다.

곧이어 그는 태평양아시아협회를 발족시켰다. 케네디의 평화봉사단 ‘Peace Corps’를 본 따 한국대학생들의 봉사단을 조직한 것이다. 현재까지 만 명 가까운 학생들이 동양권의 러시아, 중국, 몽골, 필리핀, 월남,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에 파송돼 그곳 학생들과의 친선교류, 교육, 자재지원, 노력봉사 등을 행하고 있다.

남북대치 하에서 언론의 역할을 잘 아는 그는 재정상의 무리를 무릅쓰고 주간 미래한국신문을 창간했다. 대형 일간지가 감히 손대지 못하는 민감한 이슈에 용감히 도전해 좌파진영의 속내를 샅샅이 드러내고 어둠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무대에 밝은 조명을 들이대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는 대역사를 진행했다.

그는 또 거시적 안목으로 통일의 날을 바라보고 탈북난민보호운동을 일으키고 북한구원운동 세이브엔케이를 펼쳐왔다. 또 탈북자의 난민 인정을 위해 유엔에 1000만 명 서명 문건을 제출하기도 했다. 고향이 평북인 그는 또한 탈북민이 펼치는 북한인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지원의 손을 뻗쳤다. 외로운 탈북민에게는 그의 품이 급할 때 기댈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그의 가치기준은 언제나 ‘자유민주’

그의 인생 경로가 그의 인생관과 국가관을 형성했다. 그는 학창생활 내내 수석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지만 집안은 어려웠다. 깊은 기독교 신앙 속에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사회 부조리에 분노했다. 학생 때는 운동권의 ‘농활’에 동조도 하고, 법조인이 된 뒤에도 인권 변호사로 재야 정치인들의 인권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의 근본 가치기준은 언제나 자유민주 한 가지였다. 우파 정권이라도 인권 침해에는 격렬히 항거했고 좌파 정권이 친북으로 자유민주체제를 벗어나려 하면 결사적으로 몸을 던져 저항했다.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고 오직 정의만을 기준으로 하는 그의 서릿발 같은 규탄은 지지자도 많았지만 적도 크게 양산했다. 그가 서울시장에 내정됐을 때 어제까지 그의 필봉 앞에 수모를 겪었던 사람들이 옳거니 잘 됐다 하고 엉뚱한 재산 문제를 들고 일제히 공격해 들어왔다. 그의 30평 오두막 2층을 호화별장인양 사진 찍고, 산자락 집 앞에 가꾼 한 뙈기 꽃밭을 무슨 큰 녹지 훼손인양 대서특필했다. 결벽성이 강한 그는 이유는 여하튼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떳떳치 못한 일이라 생각하고 즉각 자진사퇴했다. 그렇게 우리는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될 한 사람의 애국 정치가를 잃었다.

그가 병상에 쓰러졌을 때 그의 체력은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고, 그에게 남은 재산이라고는 그 알량한 집 한 채뿐이었다. 4년여의 병상생활은 남은 가족도 그와 함께 탈진시켰다. 그렇게 그는 자신과 온 가족을 바쳐 나라에 헌신하고 떠나갔다. 그의 공을 기려 나라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끝으로 그와의 회고를 위해 외람되이 여기에 나의 개인사를 덧붙이려 한다. 아들아이는 “아버지의 노후는 온전히 김 회장 덕”이라고 말한다. 기실 김 회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생업과 도서재단 운영 말고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활동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사회활동에도 참여하고 또 그가 내준 지면에 글도 쓰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는 나에게 노후 고마운 사람 1호인 셈이다. 역사에 남을 명칼럼 한 편과 그에 감동한 편지 한 통이 22년이라는 이렇게 길고 아름다운 우정을 맺게 해주다니 사람의 연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김 박사, 박사가 그다지도 애타하며 몸을 던져 지켜내려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이제는 뒤에 남은 동지, 후배 여러분에게 맡기시고 주님 곁에서 편히 쉬소서.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