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영웅을 기리며
이 시대의 영웅을 기리며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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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규 서울대 명예교수 · 前 교육부 장관

김상철 변호사는 한창 어려운 때 우리나라 민주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친북좌파와 싸운 지성인이다. 특히 좌파라야, 그리고 주체사상을 신봉해야 지식인인 것처럼 큰소리칠 수 있던 때 인권 변호사인 김상철 변호사가 홀로 그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운 것이다. 그 과업이 얼마나 힘겨웠기에 끝내 쓰러져 가족의 간호를 받으며 가까운 친구들의 마음을 애타게 했던 그리고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한 김상철 변호사는 우리의 영웅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991년 초다. 나를 찾아와 한미우호협회를 조직하려고 하는데 나더러 이사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초면인 김 변호사의 이름은 익히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운동권 학생 혹은 노동자를 변호하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학생운동은 이념운동으로 변질, 격화됐다. 대학마다 교내 통학길 위에 미국 성조기를 그려놓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하는 등 반미운동이 치열해짐을 본 김 변호사는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신문에 학생들을 나무라는 글을 실었다. 당시 웬만큼 용기 있는 사람 아니고는 그런 글을 쓸 수 없는 때였다.

총장인 나는 김 변호사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 학생을 꾸짖는 글을 써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런 때 김 변호사는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나는 오는 8월이면 총장직이 끝나니 그때 이사장직을 맡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해 6월 한미우호협회가 발족하면서 나를 이사장으로 선임한 것이다. 아직 총장직에 있는 몸이라 난처했지만 그대로 그 직을 수용했다. 약 80명의 각계 지도층, 원로, 중진, 지성인들이 김 변호사의 정성에 감동하고 협회 회원이 됐다.

그때 상황으로서는 협회에 참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용기가 필요했다. 대학은 좌파, 소위 NL, PD 등 주사파 학생들이 판을 치고 있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결연히 한미우호협회 회원이 된 것이다. 미국과의 우호관계가 우리나라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고 참여했다.

물론 언론계는 이 협회 출범에 관심을 보였다. 친미단체로 규정한 것이다. 김 변호사와 나는 기자들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무조건적인 친미가 아니라고 했다. 미국의 정책이 우리나라 발전에 저해가 될 경우에는 강력히 비판하는 등 지성인들의 모임임을 역설함으로써 그들은 협회의 발족을 이해했고 그들의 협력을 얻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도 김 변호사의 애국 열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생애

 

김 변호사는 ‘고시계’라는 행정‧사법고시생을 위한 잡지를 간행했고 그로부터 얻은 수익금 그리고 변호사 수임료 등을 협회운영비로 충당했다. 격주간으로 뉴스레터 ‘미래의 세계’를 7만부 찍어 공무원, 교수, 초중등교사 혹은 기업체 종사자에게 배포했다. 혹은 수시로 한미 관련 강연회를 열었고 주한미군 장병들을 초청해 이들을 위문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런 가운데 점차 반미운동성향도 잦아들게 됐다. 김 변호사 집은 우면산에 있다. 녹지지역이라 자그마한 2층집을 짓고 주변은 잔디와 나무를 심어 조경에 힘썼다. 가끔 그 집에 초대돼 저녁식사를 대접받곤 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한미우호협회 명의로 김 후보 반대 성명을 중앙일간지에 낸 일이 있었다. 결국 김대중 후보 반대편인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 변호사를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야당성향 신문들, 야당성향 논객들이 김 변호사의 시장 임명 반대를 들고 일어났다. 녹지로 묶인 곳에 대궐(?) 같은 집을 짓고 녹지를 크게 훼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당선에 실패한 것이 김 변호사의 반대 투쟁에 기인한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김 변호사는 시장 취임 1주일 만에 그 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7일간의 시장’이라는 책을 냈다. 김 변호사는 그런 일을 겪고도 국가의 보안, 보수운동에 전념했다. 또 북한인권 문제 관련 단체를 조직하는 일, 방미해 그의 생각을 설명하는 일 등 전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2000년 한미우호협회의 명예회장이 됐고 나는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그의 건강이 늘 마음에 걸려서 협회의 후선에 물러앉게 했지만 그의 정열은 그칠 줄 몰랐다. 김 변호사는 민주주의 수호와 이를 거역하는 세력을 배격하는 운동에 몸을 불살랐다. 옆의 친구들이 염려했듯이 결국 그는 건강을 해친 것이다. 끝내 앞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상에 누워 있었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 정의롭다고 믿는 일 그리고 그것이 애국의 일이라고 믿으면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그는 혼자 그 길을 걸어갔다. 근래 나라가 혼란한 때 김 변호사의 빈자리가 더 그리워진다. 김 변호사는 진정 우리 시대의 영웅임이 틀림없다.

김 변호사가 창간한 미래한국신문을 그의 서랑 김범수 씨가 맡아 새롭게 주간지 ‘미래한국’으로 발전시켜 계속 발간하고 있다. 김 변호사의 1주기를 맞아 여러 친구들이 김상철기념사업회를 발족해 김 변호사의 유업을 기리고 계승할 사업을 수행하기로 했다. 이제 김 변호사도 편안히 눈 감을 수 있을 것이다. 김 변호사의 꿈이 실현돼 끝내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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