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에서 만났던 회장님
무대 뒤에서 만났던 회장님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수 前 미래한국 차장

많은 분들은 김상철 회장님이 하셨던 그토록 많은 일들 때문에 회장님의 무대 위의 모습, 공식적인 자리의 회장님 모습에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김상철 회장님과 함께 했던 시간은 미래한국이라는 무대 ‘뒤’에서의 시간이 많았기에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미래한국이 2002년 6월에 창간되고 나는 이듬해인 2003년 4월부터 미래한국에서 인터넷신문 담당 기자와 독자관리 담당자로 김상철 회장님과 함께 일하는 인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총무부서의 인력들이 퇴사하며 제때 충원되지 않자 총무부서에 옮겨 줄곧 일하게 됐고 후에는 재정회계업무도 같이 맡아 일했다.

일할 사람과 시간은 없고 할 일이 많았으니 어떤 날은 시키는 사람 없어도 회사에서 잠자며 야근을 했는데 이런 일은 편집부서의 기자들에게서도 줄곧 있는 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초창기 미래한국에서 일했던 직원들은 돈이나 환경에 앞서 사명감에 일했었다고 생각한다.

“김상철 회장님, 돈이 많으실 텐데요?”

많은 분들이 바르고 진실한 언론에 후원이나 주주참여를 요청할 때 하셨던 질문이다. 허나 사실과는 달랐다. 미래한국은 언제나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광고료나 신문구독료 수입이 매주 신문제작비와 직원들 급여를 지출할 만큼 들어오지 않았다. 신문은 제때에 나와야 하기 때문에 결제일이 되면 종이대금과 인쇄비를 지불하고 급여일이 되면 지급할 돈이 부족하곤 했다.

그러면 회장님은 어디서 돈을 구하셨는지 개인의 돈을 회사에 입금하고는 직원들 급여를 밀리지 않게 하셨다. 회장님은 여러 번 그렇게 했지만 계속 그러실 수는 없었다. 회장님은 나중에 돈을 어디서 더 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수입을 최대한 확보해서 급한 직원은 우선 지급하고 직원들마다 급여의 일부를 지급하고 다시 수입이 생기면 남은 급여를 지급하는 식으로 처리하게 하셨다. 그러다 보니 미지급 급여가 자꾸 쌓여 몇 개월씩 밀리는 일도 있었다. 회장님은 직원들에게 급여를 많이 주지도 못하는데 밀리기까지 하니 많이 미안해 하셨다.

  헌신도 자신의 주머니에서부터 먼저 했던 리더

회장님이 미래한국에 개인적으로 보냈던 돈은 돌려받으신 것이 거의 없고 후에 출자금으로 전환하거나 회사에 기부한 것으로 처리하셨다. 그리고 회장님은 본인의 급여에 대해서도 늘 지급을 보류하고 미지급으로 장부에 남겨뒀다가 후에 출자금으로 전환하거나 회사에 기부하는 것으로 처리하셨다. 그러니 회장님뿐만 아니라 회장님의 가족도 넉넉하지 못하게 생활하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회장님의 지갑에는 늘 돈이 없어 꼭 현금이 필요할 때는 얼마가 필요한데 지급해 줄 수 있는가를 물어 오시면 필요한 돈을 회장님에게 가져다 드리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회장님이 미래한국에 보냈던 돈은 가끔 생기는 변호사 수입이거나 대부분이 은행 대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거나 또는 다른 일로도 회장님은 늘 당당하셨고 어두운 밤바다에 풍랑을 헤쳐 가는 배의 선장처럼 어려움과 문제들을 해결하고 또는 딛고 미래한국 언론을 이끌어 가셨다.

회장님의 당당한 모습은 그 분께서 일을 하심에 있어서 자신감이 높았거나 혹은 일이 쉽거나 수월해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회장님이 주주 한사람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부탁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인지를 말씀하시는데 ‘아 회장님도 이런 마음이시구나’ 생각했다.

회장님은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해 사람을 만난다고 말씀하셨다. 정부에 반대하는 언론으로서 광고 유치가 쉽지 않았겠지만 광고, 후원, 주주참여를 요청하기 위해 회장님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오시곤 하셨다.

회장님은 미래한국에 필요한 재정을 위해 독자 확대를 통한 구독료 수입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셨다. 미래한국을 구독하는 독자들의 재구독률이 다른 언론사들과 비교할 때 월등히 높았으나 문제는 유료 독자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구독료를 통한 수입은 기대만큼 되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미래한국이 전국적으로 광고가 돼 유료독자가 늘어난다면 미래한국은 얼마든지 흑자경영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어느 날 사석 식사자리에서 회장님은 미래한국이 기독교 복음과 관련해 어떤 언론이 돼야 하는지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든 사회든 잘잘못을 인정하는 정직함, 진실과 정의가 흐르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어야 그때 복음이 사람들에게 잘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미래한국이 바른 언론이 돼 진실을 전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바른 시각을 알리고 전해 미래한국의 영향력이 대한민국 전체에 골고루 퍼진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회장님이 한창 시국강연을 다니실 때였다. 금요일 저녁에 잠실의 대형교회에서 강연하기로 돼 있었는데 나는 회장님의 강연에 맞춰 신문 홍보를 위해 신문을 가지고 교회에 갔었다.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회장님이 교회 본당을 나가시려는데 정장 차림의 남자분이 회장님에게 나아와 크게 인사하고 반가워하던 것을 보았다. 남자 분은 아주 오래간만에 회장님을 뵙는 것 같았는데 아직도 인상에 남는 것은 그 남자분이 진심으로 회장님에게 감사해 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다시 일어나실 줄만 알았던 김상철 회장님의 소천 소식에 나는 큰 충격이었지만 발인예배 때 오신 분들을 모습을 볼 때 김상철 회장님이 하셨던 많은 일들뿐만 아니라 평소 회장님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치고 도우시며 사셨는지 알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회장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축하하는 일과 기념하기를 좋아하셨던 회장님, 찬송가를 같이 부를 땐 있는 소리를 다 지르지 말고 소리를 모아 위로 곱게 내라고 하셨던 회장님, 분위기를 띄울 때는 늘 칭찬을 하셨던 회장님, 기도하실 때 방언 소리가 장군의 호령소리 같았던 회장님, 잘못을 훈계할 때는 기합 같은 목소리로 압도하셨던 회장님, 사내 경건회와 기도회가 끝나면 회장님과 웃으며 포옹하던 일도 있었는데…. 이제는 회장님의 모습도 목소리도 이 땅에서는 뵙지 못하게 됐다.

회장님이 병상에 계실 때 나는 미래한국을 부득이 그만두게 됐다. 신앙의 입장에서 사명 같았던 미래한국이었지만 직장보다는 가정과 자녀들을 더 우선해야했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됐든 청년 시절을 다 보낸 내게 미래한국과 김상철 회장님은 늘 마음에 있다.

회장님의 뒤를 이어 김범수 사장님이 진두지휘하는 미래한국이 나날이 성장 발전하기를, 김상철 회장님의 가족 분들에게 오래도록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이 이렇게 먹먹해지는데 가족들은 얼마나 더 하시겠는가. 김상철 회장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회장님께 썼던 편지로 글을 마무리 하고 싶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회장님

누워계셨던 병상에서 언젠가는 일어나시는 줄만 알고 있었는데

주님 품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숨이 막히고 슬픔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는 다시 뵐 수 없겠지만 훗날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회장님.

제가 잘 모르지만 수고 많으셨습니다.

회장님을 모시고 섬겼던 시간들, 교훈과 모범 보이신 것들 잊지 않겠습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