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장로님을 처음 뵌 것은 2001년 어느 이른 아침 조찬기도회에서이다. 양재동에 있는 성서공회에서의 조찬기도모임으로 기억한다. 그 기도모임에서 총무 역할을 하는 분이 마침 연령은 높지만 신학교 후배시라 제가 강사로 초대됐고 베드로전서를 본문으로 ‘고난’에 대해 강론했는데 강론을 마친 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중 장로님이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고 강의를 들은 소감을 피력하셨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이후 내가 원장으로 있던 신학대학원에 당시 서울교회 담임목사였던 이종윤 목사님과 함께 특강강사로 초청돼 오셔서 미래의 목회자들에게 애국 강연을 해 주셨고, 얼마 후 나는 봉직하던 신학대학원을 떠나 신반포중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2003년 2월). 장로님과의 동역은 주로 신반포중앙교회에 있으면서 시작된 일이다.
먼저, 미래한국을 창간하면서 대구 영남대 경영대학 학장이던 김영문 교수(장로)와 함께 감사 자리를 맡아 달라고 하셨다. “제가 회계에 대하여 무얼 안다고...”라면서 사의를 표했으나 장로님이 “목사님, 돈 문제가 아니라 정신 문제입니다. 미래한국이 바른 정신으로 가고 있는지를 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며 강권하셨다. 그 진정어린 말씀에 달리 어찌 할 수 없어 허락 드린 후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감사를 맡고 있다.
다음으로, 북한구원의 경우도 처음 기도회로 시작됐고 이어 법인을 조직하게 될 때에도 감사를 부탁받았다. 역시 취지는 그 조직의 정신이 곁길로 가게 되지 않도록 살펴 달라는 것이었다. 북한구원과 연관해 탈북한 동포들을 대한민국으로 구출해내는 일을 남한 성도들의 자발적인 후원으로 이룬다는 뉴엑소더스 프로젝트가 기획됐고 그 본부장에 위촉됐다.
나의 경우는 김 장로님이 앞장서시고 이런 일에 비교적 소극적인 나를 한 걸음씩 이끌어 참여시킨 셈이다. 그 세월이 10년이 넘어갔는데 그 과정 중에 때로 상황이 어렵고 힘들 때 “참 외롭게 이 길을 가고 계시는구나”하고 느꼈다. 그리고 이 분 곁에 그냥 있어드리기만 해도 위로가 되시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장로님에게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언제 어느 때든지 가능하면 그의 요청에 응해 필요한 그 자리에 있어 드리려고 노력했다. 때로 혼자서,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 교우들과 함께.
미래한국을 이끌어오면서는 선한 취지에 비해 자금 압박이 늘 부담이 되셨던 것 같았다. 자금 압박은 가족들에게도 작지 않은 어려움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래한국이 보수정론지로서의 성격 때문에 온갖 비난과 비방을 들으면서도 꾸준히 지속해 온 결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게 됨으로써 드디어 정권교체에 성공하게 됐고 이후 더 박차를 가하기 위해 미래포럼을 조직하고 이끌던 중 과로로 쓰러지게 되셨다. 그 날 아침에도 혈색 없는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심한 기침을 하면서 모임을 인도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잠시 병원에 계실 줄 알았는데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미래한국을 운영할 책임이 지금의 김범수 사장에게 위임될 무렵, 이전 장로님에게 미처 드리지 못했던 말을 그의 사위에게 하게 됐다. “갈 길도 많은 데 굳이 이 일을 맡으시겠는가? 맡으신다면 이 일을 그만두실 때까지 곁에 있어 드리겠다!”고.
미래한국의 편집위원이 돼 편집회의가 열릴 때마다 참여해 기도하는 일이나, 이사회에 감사로 참여하는 일이나, 후원의 밤에 성도들을 독려해 테이블을 차지하는 일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다. 북한구원과 관련해 탈북동포들을 구출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홍보하는 것, 헌금을 모으며 요청에 응해 돕는 일을 하는 것, 매월 첫 주일을 지낸 월요일 저녁마다 신반포중앙교회당에서 북한구원기도회를 갖는 것 역시 바로 이런 마음에서이다.
“나 같은 사람이 단지 그의 곁에 있어 드리기만 해도...”
이 말 한 마디를 결국 그에게는 하지 못했다. 장로님이 떠나간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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