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가장 아끼던 사람과의 10년
시간을 가장 아끼던 사람과의 10년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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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태 서울말씀사 대표 · 前 미래한국 사장
김대중 정부가 출범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 때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의 남북협력위원장직을 섬기고 있었다.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난 후였다. 북한선교회장이 찾아와 “오늘 우리 선교회에 강사로 김상철 변호사를 초청했는데 위원장이 교회를 대표해서 인사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 때 처음으로 김상철 장로를 만났다.
 
대뜸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방송시설이 좋다고 들었는데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했더니 탈북민들의 실상, 특히나 소위 꽃제비들이나 불리는 북한 어린이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동영상을 제작해 국제사회에 고발하려고 하는데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뜻 있는 일이라고 생각돼 적극 도와줬다. 이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얼마 후 김상철 장로로부터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서 탈북난민보호를 위한 모임이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전갈이 왔다. 회의에 나갔더니 대형교회 중심으로 20여 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 날 회의는 본부장인 김상철 장로가 주재했는데 그는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탈북민들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UN에서 이들에게 국제 난민의 지위를 부여해 주도록 탄원하는 전국적 서명운동을 전개하자고 했다.
 
‘몸조심’을 모르던 용기의 사나이
 
당시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돼 모두들 몸조심하던 때였고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어 유력 일간지에서조차 탈북민에 대한 언급을 꺼리던 때였다. 나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뜻밖의 제의에 좀 뜨악해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대의명분이 있었고 성경적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서명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자고 했다. 한기총에서는 100만 명을 목표로 하자고 했는데 1000만 명은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1000만 명이 가능하겠느냐고 하며 100만 명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 상황에서 언론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인터넷을 잘 활용해 여론을 환기시킬 수만 있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고 했다.
 
방법론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지만 인터넷을 활용하자는 나의 제의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앞으로 출범할 ‘탈북난민보호 유엔청원운동본부’의 기획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본부장인 그와 나는 1000만 명이 달성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서명운동을 추진하기에는 주변 상황이 매우 불리했으나 워낙 취지가 좋았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해 줬다.
 
김상철 본부장과 나는 틈나는 대로 서울역, 잠실 롯데월드 앞, 영등포역, 대구 동성로, 동대구역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다니며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탈북민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는 중국 정부의 처사에 항의하는 서한을 우다웨이 주한 중국대사에게 전달했고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도 여러 차례 했다.
 
김상철 본부장은 정말 탁월한 사람이었다. 판결문 쓰듯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글을 잘 썼으며 연설도 참으로 감동적으로 잘했다. 전국 교회를 돌면서 연설할 때 모두 감동을 받아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해 줬고 후에 이들이 <미래한국>을 창간할 때 도움을 줬다.
 
이 힘든 일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헌신적이었다. 어느 교회의 권사님은 매일 하루 종일 전철을 갈아타고 다니면서 서명을 받기도 했다. 불교계에서도 호응해 줬으나 전국적인 조직의 근간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서명운동이 2년 이상 지속됨에 따라 자연히 전국적인 규모의 기독교 인사들의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탈북난민보호 UN청원운동본부에는 내가 추천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장로들과 직장 동료 등 지인들이 다수 참여했었다. 그 중 재미교포 2세인 장윤옥 한세대 교수는 1000만 명 서명을 달성한 후 UN에 제출하는 영문보고서의 작성을 맡았고 UN에서 브리핑과 기자회견을 할 때도 대변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김 본부장은 현장감 있는 보고서 작성과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생생한 체험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중국 현지에 파견했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탈북민들의 참상을 직접 보고 듣고 그들과 며칠간 생활하도록 했었다. 우리 서명운동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기적이라 할만 했다.
 
또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1000만 명이 넘는 서명지를 UN에 제출함으로써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하여 탈북민을 국제 난민으로 지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서명운동으로 구축된 기독교 인사들의 전국적인 인적 네트워크가 훗날 <미래한국신문> 창간의 기반이 됐다.
 
“어이쿠, 시간은 너무 많이 썼네”
 
서명운동이 끝난 후에도 김상철 본부장은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렀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면 그는 화들짝 놀라 “어이쿠, 시간을 너무 많이 썼네”하고 서둘러 자리를 파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꼴이 돼 머쓱해지곤 했다.
 
그는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불러놓고 매번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나면 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랏일 걱정하느라고 본업인 변호사 일은 뒷전이었다. 법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사건 내용을 검토할 정도였다. 워낙 명석하고 법리에 밝으니 망정이지 나라도 그에게 사건을 의뢰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2001년 9월 초 그는 점심이나 같이 하자며 하얏트호텔에서 만나자고 했다. 식사를 하면서 그는 우리나라 언론이 변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의 언론을 가지고는 우리가 꿈꾸는 밝고 힘찬 나라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서울시장에 취임한 지 며칠 안 돼 말도 안 되는 왜곡된 보도로 인해 억울하게 낙마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의 모든 언론이 세상적인 시각으로 시대를 바라보고 진단하기 때문에 대안 없이 남의 잘못이나 폭로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는다고 했다. 그러니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비판하기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들추기보다는 잘하는 것과 밝은 면을 긍정하고 발굴해 이를 조명해 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풍토를 조성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뜻있는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문을 창간하자고 했다. 기독교 인사 1000명이 한 사람당 100만 원씩 출자하여 10억 원을 모으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새로 창간될 신문 경영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내가 그 때 몸담고 있던 금융 기관에서의 내 잔여 임기가 6개월 정도 남아 있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았다. 국민일보를 통해 신문 경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던 나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취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요청이 있었으나 매번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구상을 꾸준히 추진해 2001년 10월 <미래한국신문> 창립총회를 힐튼호텔에서 개최했다.
 
2002년 4월 임기가 만료돼 다니던 직장을 퇴임했다. 앞으로의 진로를 위해 기도원에 올라가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왔다. 바로 그 다음 날 김상철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와 점심을 같이하자고 했다. 역삼동 그의 사무실 근처에 있는 한정식 집에서 만났다. 식사를 마친 후 그가 내 손목을 꼭 잡더니 무작정 그의 사무실로 끌고 갔다. 2층으로 올라가 작은 방에 놓인 책상 앞으로 데려가더니 의자에 주저 앉혔다. 그리고는 그것이 내 자리라고 했다. 자신은 기업 관리나 경리를 모르니 이를 총괄해 살림을 맡아 달라고 했다. <미래한국>의 이사는 모두 5천만 원 이상 출자해야 하므로 나의 급여와 수당을 1년 동안 모두 출자하라는 조건까지 덧붙었다.
 
미래한국신문, 그 작지만 의미 있는 출발
 
이렇게 돼 그날부터 나는 불편하고 옹색한 사무실에서 마땅히 부릴 만한 부하 직원도 없이 <미래한국신문>의 창간 준비에 들어갔다. 사진기자를 포함해 7명의 수습기자를 뽑았는데 모두 석사학위 이상을 소지한 똑똑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신문에 대해서는 백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이들을 훈련시킬 만한 전문기자 하나 없었다. 김 회장이 기존 언론의 때가 묻은 사람은 배제하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회장으로부터 말단 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문을 만드는 일은 처음이라 창간호가 나오기까지 말도 못할 만큼 고생들을 했다. 물론 경륜을 겸비한 한국 최고의 석학들로 구성된 편집위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편집방향과 지침 같은 큰 틀만 정해주고 자신들이 맡은 칼럼을 썼기 때문에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밤을 새우는 일은 다반사였다. 회장이 신문 전체 지면을 일일이 다 읽으면서 교정을 봐야 할 형편이었다.
 
김상철 회장은 완벽주의자였다. 남에게 잘 위임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였다. 그는 얼치기를 싫어했다. 특히 사고나 시각이 70-80년대에서 성장을 멈춰버린 좌파 지식인들을 얼치기라고 아주 싫어했다. 그런 그가 이상하게도 미숙한 기자들이 쓴 좀 얼치기 같은 기사에 대해서만은 관대했다. 내가 전면적으로 고쳐서 다시 썼으면 하는 기사도 그는 그냥 통과시켰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가능성을 더 높이 산 것 같았다.
 
신문을 내기 위해선 기사도 기사이지만 문제는 광고였다. 광고는 광고 수입도 중요하지만 신문의 모양새를 갖추는데도 매우 중요했다. 광고 없이 기사로만 빽빽한 지면은 생각만 해도 답답하지 않은가.
창간된 지 얼마 안 된 주간지가 광고를 수주하기란 쉽지 않았다. 김 회장과 나는 그동안 쌓아온 인맥을 그야말로 총동원했다. 급할 때 가장 만만한 사람이 <월간조선>의 조갑제 사장이었다. 그는 미래한국 같은 신문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며 어떻게 하든 도우려고 했다.
 
김 회장의 고등학교 동기 한 분이 한국방송광고공사에 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이렇게 1년을 지내다 보니 나는 무엇보다도 광고에 대한 압박과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신문사의 재정적인 형편을 견디지 못해 전무이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비상근 이사로서 김 회장이 부르면 언제나 달려가곤 했다.
 
신문 창간 당시 우리는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래서 우리의 이상대로 신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만 뜻밖에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상의 날개도 펴보지 못하고 종북좌파세력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됐다.
그 5년의 세월은 김상철 회장이 정말 탁월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준 기간이었다. 우리는 종북좌파세력에 맞서 궐기하는 집회 때마다 시청 앞 광장으로 뛰어 나갔다.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호외를 찍어 시민들을 동요했다. 노무현 정권과의 대결의 중심에는 언제나 김상철 회장이 있었다. 이로 인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신변을 걱정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미래한국신문의 광고 수주는 더 어려워졌다. 나는 처음 미래한국이 시작될 때 ‘과연 몇 년이나 갈 수 있을까?’ 늘 걱정이었다. 내 계산으로는 몇 번을 고쳐 해도 얼마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러나 김상철 회장은 달랐다. 그의 신념대로 미래한국은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까마귀가 물어다 준 고기로 엘리야를 먹이신 것처럼, 그렇게 10년 이상을 버텨냈다.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기도하는 시간만은 아끼지 않았던 사람
 
노무현 정권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김상철 회장이 급히 나를 찾았다. 나갔더니 나보고 미래한국신문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가 얼마 전 어떤 모임에서 조용기 목사님을 만났는데 “김 변호사 몸조심 하시오. 지는 해가 더 따가운 법이오”라고 하시더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정권 말기의 예봉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노 정권이 끝날 때까지 미래한국신문을 맡아 달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맡길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말에 다소 부담스럽기는 했으나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지겠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이명박 정부 출범 때까지 미래한국신문의 대표이사를 맡았던 경위이다.
 
김상철 회장은 시간이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아침 30분 이상 예배를 드렸다. 시간이 늘 아까운 그였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출근해 또 회사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부족한 시간이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채워진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만은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과 추진력도 갖춘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아껴 쓰고 또 아껴 썼다. 너무 몸을 혹사했기 때문에 때때로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그는 여행 가서 호텔에서 주는 맛있는 빵과 커피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하며 고즈넉한 아침 정서를 즐기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소박한 여유도 시간이 없어서 갖지 못했다. 좌파 정권이 물러가고 그가 바라던 정권 교체가 이뤄져 그의 할 일이 더 많아졌을 즈음 그는 돌연 쓰러졌다. 그가 그렇게 아끼고 아끼던 시간이 우리 앞에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그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조차 할애할 시간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토록 평생을 바쁘게 살았는데, 이 많은 시간을 남겨두고 어떻게 홀연히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하늘나라로 가고 난 다음 내가 가장 억울하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는데 그것을 아껴 쓸 그가 없다는 것이다. “어이쿠, 시간을 너무 많이 썼네”하며 황망히 자리를 털고 일어서던 그의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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