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의 巨人
'거룩한 분노'의 巨人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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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각 고려대 명예교수 · 前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내가 아직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으로 있던 2002년 3월초 나의 고등학교 동기생이자 공군사관학교 출신인 백승웅(白勝雄) 예비역소장이 거의 44년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하도 오랜만이고 이름마저 가물가물하는 세월이 흘러간 뒤여서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웬일이냐고 물었다.
 
온누리교회 장로인 백승웅 장군은 내 근황은 신문의 글들을 통해 대충 알고 있다면서 자기가 김상철 회장을 모시고 봉사하고 있는 태평양아시아협회(PAS)의 정기모임에 한번 나와 ‘한국경제의 현황과 전망’에 관해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강의도 강의지만 그 오랜 옛 고교 동기생을 만나고 싶어 그의 요청을 수락하고 2002년 3월 14일 저녁에 위치를 알려준 역삼동 637 미래하우스 1층으로 찾아 갔다.
 
약 50분 강의하고 30여분 질의와 토의를 한 후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그날 모인 분들은 김상철(金尙哲) 변호사를 포함해 25명 정도의 PAS 관련 임원들이었다. PAS의 김상철 회장은 과거 10여 년 동안 하계와 동계 방학 기간에 총 5000여명의 대학생 청년 해외봉사단원을 파견해 어려운 이웃 나라들을 돕고 우리 젊은이들을 봉사활동과 문화교류활동으로 훈련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날 모임을 계기로 나는 김상철 회장을 처음 만났고 강의 후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그가 젊은이들의 해외 진출과 후원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하면서도 다른 한편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좌경화 사태를 걱정하고 있음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특히 국내 좌경화 확산에 대해 김 회장과 나는 깊은 우려를 공유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김상철 회장은 나에게 그분이 보수정론지로 미래한국(주간지)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초기의 미래한국, 그 치열한 지적 열정
 
그해 4월 나는 금융통화위원 임기를 마치고 고려대로 복귀해 국제대학원 원장직을 맡게 됐고 경제학과 강의와 국제대학원 원장 직무와 해외출장 강의 등으로 무척 바쁘게 지나다가 2005년 8월 고려대를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김상철 회장이 나를 미래한국 사무실에서 좀 만나자고 불러서 나갔더니 느닷없이 미래한국 3기 편집위원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분이 제시한 미래한국 3기(3년차) 편집위원 명단에는 박성현, 박용옥, 송대성, 우태영, 이상돈, 이인호, 이춘근, 정일화, 최광, 한춘기, 황의각, 강용원 (명칭 생략)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우리 편집위원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 7시 역삼동 미래한국 회의실에 모여 기도를 시작으로 우리 사회 제반 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 그리고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총 2시간 정도 사회적 이슈에 맞춰 편집 방향을 정하고 순서를 정해 돌아가면서 사설과 칼럼을 쓰는 일을 맡았다. 나는 몇 번 사설도 썼지만 이름을 밝힌 칼럼은 미래한국 제175호(2005년 11월 28일) ‘어설픈 좌(左)편향의 이념 경제정책을 우려한다’는 칼럼을 시작으로 2013년 9월말 현재 거의 100여 편 이상이다.
 
당시 김상철 회장은 ‘나라를 생각하는 보수정론지, 미래한국신문의 편집 방침’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의 분명한 철학 위에 미래한국을 이끌었다. (1)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현안문제를 정리해 준다. (2)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한다는 믿음 위에 선다. (3)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일꾼을 높여 준다. (4) 비판이 목적이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5) 세계공동체의 발전과 국제협력을 중시한다.
 
김상철 장로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인으로 따스한 가슴과 냉철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분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파악하려 노력하며 기도했고 우리나라를 공산주의사상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저한 사명감을 가졌던 애국지사였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인권 문제와 탈북난민보호를 위해 팔방으로 뛰며 헌신했던 분이었다.
 
그 당시 김상철 회장은 미래한국신문이 북한구원, 자유통일, 최강국의 비전을 제시하는 1천명 주주 동참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2006년 늦은 여름날 나는 사랑의교회 보수층 장로인 김효은 장로, 조말수 장로, 임경일 장로, 김두종 장로 등 몇 분을 우리 집으로 초청하고 김상철 회장도 오시게 해서 서로 교분을 나누며 미래한국의 주주 확장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그 후 나는 30여명의 친구들을 주주로 초청하기도 했다.
 
2006년 12월 어느 월요일 편집위원회의에 이상돈 중앙대 교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임 이유를 물었더니, ‘편집위원들이 모두 늙은이들뿐이어서’라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니 내가 제일 나이 많은 꼰대(?)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이것 아니구나 생각하고 당장 편집위원 사의를 표하고 편집회의 참석을 중단했다. 그러자 김 회장은 나를 편집고문으로 이름을 올려주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은 그의 거룩한 분노
 
그 이후에도 가끔 김 회장은 주중에 나에게 조찬을 같이 하자며 르네상스호텔 1층 커피숍 겸 식당으로 불러내곤 했다. 2007년 봄 어느 날 그곳에서 조찬을 우리 둘이 같이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우리 옆자리 식탁에서 곽선희 소망교회 목사와 연변과학기술대학의 김진경 씨, 그리고 다른 한분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먼저 식사를 마치고 김상철 장로가 곽선희 목사에게 인사나 하고 가자며 그들의 식탁으로 찾아가 인사하고 돌아 나왔다.
 
그런데 김 회장이 로비에서 나보고 좀 기다리자고 했다. 의도는 김진경 씨를 만나 평양과기대 후원금 모금을 위해 한국 교계를 찾아다니는 것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김진경 씨가 자기 방으로 올라가려고 로비를 가로질러오자 김상철 회장은 그에게로 가서 “왜 빨갱이 북한집단에 남쪽교회 성물과 헌금을 끌어 바치고 돌아다니느냐?”고 그의 허리끈을 잡고 호되게 따졌다. 당황한 김진경 씨는 혼비백산하여 손을 내저으며 승강기 쪽으로 피신하여 달아났다.
 
우리 두 사람은 ‘저 사람이 무지한 한국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북한 사랑이라는 거짓 명분으로 속이는 자’라는 사실에 공분하면서 흥분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특히 한국교계에 확산되고 있는 친북좌경화 분위기에 대해서 공동 관심을 가지고 우려하곤 했다. 목회자들이 단순히 북한선교에 대한 사명감만 가진 채 분별없이 적그리스도와 동침해 그 동침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 교계의 상황을 개탄하곤 했다.
 
김상철 회장은 2007년 여름 우리 집으로 나를 찾아와 자신은 다른 정치적 뜻을 위해 일할 생각이므로 자기가 뒤에서 도울 것이니, 나보고 미래한국을 맡아서 일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나는 사실 능력도 없고, 이미 그해 9월 1일부터 일본 ICSEAD(국제동아시아연구센터)와 3년 계약으로 가기로 했기 때문에 그분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나는 가끔 미래한국에 글을 전송하기는 했지만 국내에 있지 않았고 2008년 그분이 쓰러져 입원해 계신다는 소식만 듣고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3년의 일본 체류를 마치고 2010년 8월 말 귀국했다. 김 회장의 병환상태에 대해 걱정이 돼 미래한국에 문의를 했지만 일체 면회를 불허한다고 해서 2012년 12월 그분의 소천 소식을 접하고 강남성모병원 빈소를 찾기 전까지 그분을 다시 뵙지 못한 것이 마음속에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어려운 우리 정치 사회 현실 앞에서 그분의 빈자리가 더 커 보이고 아쉽게 느껴진다. 우리는 자유, 정의, 평화를 위해 평생을 의로운 크리스천으로 헌신해 오시던 큰 인물을 더 이상 이 땅에서 만날 수 없지만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면 기쁘게 이 땅에서 가졌던 우정을 다시 나눌 수 있게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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