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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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목사 · 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
당대에 김상철 변호사같이 열심히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이 있었던가? 그런데 이제는 하늘나라로 떠나갔구나.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서울고등학교 1학년 때였지. 그때 내가 우리 학년에서 태백이라는 이름의 YMCA 클럽을 조직했는데 김상철과 박세일, 임성준 등 열다섯 명이 고등학교 1, 2학년 동안 매주일 한 번씩 만나 토론회도 갖고 놀러도 가고, 미팅도 하면서 젊음을 마음껏 발산했었지. 그리고 졸업하기 전 3개월간 너의 제안으로 너와 내가 여관에 같이 합숙하면서 누가 서울대 수석합격을 할 것인가를 경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성공은 못했지. 다만 공부 잘하는 너는 입학수석은 못했지만 서울법대 수석졸업을 했다.
 
네가 고시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는 동안 나는 학생운동을 했고 군대에 가서도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형 20년을 받았다. 그 때 너는 서울지법 판사였지.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현직 판사가 내란죄로 갇힌 나를 서울구치소로 면회 온 것은 정말로 대단한 용기였다. 네가 특별 면회를 오는 바람에 내가 모처럼 담배 한 대를 피우지 않았겠니? 그런데 네가 면회를 마치고 가자마자 중앙정보부에서 찾아와서 너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단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때의 면회를 잊지 않고 있다. 이러한 너의 소신 행동 때문에 네가 법원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들었다.
 
내가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는 동안 너는 판사로 재직하다가 나중에는 변호사가 됐지. 내가 82년부터 88년까지 미국 유학을 갔다가 귀국해서 돌아와 보니 네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우리정의당을 창당했으나 정치실험에 실패해 한동안 힘들어 했었지.
 
그리고 내가 경실련을 창립해서 사무총장으로 활동할 때 너는 좌파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극우인사로 분류됐었지. 그때 나는 네 입장에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았다. 좌파가 잘못됐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나는 좌파보다 군사독재 청산이 더 절실한 당면 과제라고 생각했었다. 당시 네가 좌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 내면의 깊은 증오심을 보고 저 사람들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너와 나의 생각 차이 때문에 자주 KBS 심야토론에 불려나가 너와 맞대결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KBS는 서경석과 김상철을 맞수로 생각해서 자주 불러 토론시켰었지.
 
‘맞수’로 다시 만난 친구, 김상철
 
그런데 상철아. 너는 시대를 앞서 간 사람이었다. 나는 결국 너를 뒤따라 간 셈이다. 네가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를 만들어 천백만 이상의 서명을 받아서 유엔에 청원한 것은 정말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고 우리나라 북한인권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나도 북한인권운동의 필요성은 느꼈지만 이미 네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나까지 뛰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김문수 의원이 나를 붙들고 강권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북한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내가 한 일은 ‘탈북난민 북송반대 국제캠페인’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전 세계 중국대사관 앞에서 동시다발 집회를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북한인권운동 방식에 상철이 너와 생각이 조금 달랐었다. 너는 북한이 하루빨리 붕괴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네 생각을 이해하면서도 운동을 그렇게 하면 지지자를 많이 확보하지 못해 운동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북한인권과 한반도 평화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을 운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북한 붕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면 한반도의 평화가 위협받아 곤란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인권위원장이 돼 한기총의 북한인권운동을 이끌 때 상철이 너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아마 당시 너는 내가 못마땅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한번은 이종윤 목사님이 김상철 장로와 같이 인권운동을 할 것을 권유할 때도 나는 “각각 따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라고 답변했었다. 그러나 네가 북한인권단체연합회를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는 나도 흔쾌히 동의하고 네 옆에 섰었다. 아마 그때는 너와 나의 차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네가 목사인 나보다 더 신앙이 깊은 것을 보고 내심 너를 존경하고 있었다.
 
어느 날 네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가 더 이상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된 후에야 나는 네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됐다. 그리고 네가 활동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너와 나의 작은 생각의 차이를 내가 왜 그렇게 크게 생각했는지를 후회했다.
 
지금 나는 종북좌파 척결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뿐만 아니다. 나도 종종 극우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극우 소리를 듣기가 쉽더구나. 소신 발언을 하니까 사람들이 극우라고 말하더구나.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극우로 불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상철이 네가 없으니 이제는 내가 너의 몫까지 떠안고 있는 것 같다. 네가 그토록 열심히 했던 북한인권운동과 탈북난민북송반대운동을 지금 내가 아주 열심히 하고 있구나.
 
지금에 와서는 상철이 너의 정열, 헌신, 결단, 신앙, 애국심 그리고 너의 고집까지도 다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구나. 대한민국은 애국자 김상철 변호사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구나. 김 변호사가 남긴 자리를 남은 우리가 열심히 메워 끝내 북한인권을 실현하자고 말하고 있구나.
 
사랑하는 상철아. 너를 생각하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김상철 북한인권상을 제정하는 일이다. 한국의 북한인권운동은 김상철 변호사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김 변호사의 유지를 받들어 매년 이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선정해서 시상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친구의 소천을 슬퍼하며 친구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이 일을 꼭 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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