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 깊은 교감
짧은 만남, 깊은 교감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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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욱 명지대 명예교수 · 前 한국공공자치연구원 원장
2006년 4월 28일 미국 앤아버 소재 미시건대학교 농구경기장. 내가 고 김상철 변호사님을 처음 만난 계기는 이곳에서 개최된 경영대학원 졸업식이었다. 김 변호사 내외분은 아드님(김세호)의 석사학위(MBA)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우리 내외는 둘째 딸(정신아)의 MBA 취득을 축하하기 위해 각각 졸업식에 참석했다. 비록 이국에서의 우연한 첫 만남이었지만 그 의미는 조금 특이했다. 세호와 신아 간에 결혼 이야기가 풍겨 나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김세호와 정신아의 만남도 우연치고는 특이했다. 신아는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 2학년 재학 중 미국 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취직해 힘들게 근무해 왔는데 열심히 일한 덕택이었는지 BCG는 회사 비용으로 신아를 공부시켜주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미시건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됐다.
 
미시건대학교에 가기 전 BCG 주최 리셉션에서 세호가 바로 신아 옆자리에 앉아 만나게 된 것도 우연이었고 이후 같은 MBA 클래스에서 공부하게 된 것도 그러했다. 세호와 신아는 MBA 과정을 마칠 때까지 한 캠퍼스에서 학창생활을 하는 중에 서서히 애정이 싹튼 것 같다.
 
돌이켜보면 과거 김 변호사가 ‘고시계’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내가 고시계의 필진으로 자주 기고를 하곤 했다. 따라서 간접적인 협력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 변호사를 미국에서 만나기 전에는 국내에서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무슨 기념식이나 행사장에서 서로 마주쳤을 때 의례적인 눈인사를 몇 번 나눈 게 전부였다.
 
김 변호사는 법조인으로서, 그리고 자유·정의·평화의 수호자로서 한미우호와 북한구원 및 탈북난민보호를 위한 국민운동 등을 이끌어왔다. 나는 행정학자로서 공직자의 윤리, 행정의 민주화, 지방자치의 정착 등을 위해 학자의 길을 걸어왔기에 활동 분야가 전혀 달랐다. 공통점이라고는 서울대 법대 동창이란 사실 뿐인데 그나마 내가 10년 선배라 캠퍼스에서 마주칠 기회도 없었다.
 
결국 세호와 신아가 자기들의 인연을 맺는데 그치지 않고 아버지들의 인연까지 맺어준 셈이었다. 다음 달인 5월 11일 김 변호사 내외분과 우리 내외는 서울의 한 호텔 이태리 식당에서 만났다. 앤아버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가족 이야기, 주변의 지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사위와 딸이 이어준 그와의 인연
 
세호와 신아가 귀국한 후 양가에서는 결혼 이야기가 급물살을 탔다. 2006년 7월 7일 양가의 가까운 친인척들이 모여 한 호텔에서 상견례를 가졌고 1주일 후인 14일에는 김 변호사가 수석 장로로 봉사하시는 서울교회에서 이종윤 담임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친 후 김 변호사와 나는 무척 바빴다.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을 처리하느라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김 변호사님은 국내에서만 해도 여러 일을 겹치기로 처리하시느라 시간 여유가 없는데다가 외국 출장이 잦았다. 나는 지방으로 시·도, 구·시·군 공무원 및 지방의회 의원 강의를 다니느라 좀처럼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2006년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지자체장과 지방의원들이 7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됨에 따라 그해 연말까지 지방공무원과 지방의회 의원들에 대한 강의 요청이 폭주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북한인권 및 탈북난민 보호를 위한 김 변호사의 열정은 날이 갈수록 더 뜨거워졌다. 2008년 4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 변호사는 4월 7일 프레스센터 19층에서 북한인권의 심각성에 대한 정당후보자들의 인지도를 평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 변호사의 호소는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렸고 기자회견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김 변호사가 하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참석자들이 절감하도록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김 변호사로부터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고 양가 부부는 2008년 7월 12일 시내 한 식당에서 만났다. 김 변호사는 그동안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지난날의 자신의 활동 내용을 내게 처음으로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한다, 북한을 구원하고 자유통일을 성취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안전을 위해 미국과의 협력 체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범국민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자유지식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신념에 차 있었고 의욕이 넘쳐나고 있었다. 김 변호사는 이런 중차대한 국가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함께 힘을 보태 밀고 나가자고 내게 말했다.
비록 김 변호사와 나는 만날 기회는 적었지만 정의·자유·평화를 위한 산적한 과제들을 풀어가자는 데 이미 큰 뜻을 교감하고 있었다. 다만 나의 전공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어 과연 내가 김 변호사를 얼마나 도울 수 있을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힘닿는 데까지는 돕겠노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7월 17일 김 변호사 주도로 ‘미래연구원’ 창립총회가 동숭동 소재 이화장에서 개최됐다.
 
강인한 신념, 넘치는 인간미
 
한편 김 변호사가 내게 도움을 주시려고 했던 적도 있다. 나는 시·군·구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제의 폐해가 심각해 지방자치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김 변호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정치권과 공동으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내게 제안했다. 나는 이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
 
김 변호사님과 나는 2008년 11월 4일 당시 국회 지방자치특위 위원장이었던 모 의원을 만나 논의한 끝에 공동세미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해당 의원은 세미나 장소를 국회도서관 지하 강당으로 정했다고 알려 왔다. 주제발표자를 2인, 토론자를 4인으로 하되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를 각각 동수로 하고 찬성론자는 해당 의원이, 반대론자는 내가 선정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세미나를 준비하는 중에 해당 의원이 주제발표자 2인을 모두 정당공천제 찬성론자로 하고 자기가 선정하도록 하지 않으면 세미나를 개최할 수 없다고 합의 내용을 번복했다. 결국 세미나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 세미나가 개최됐더라면 아마도 김 변호사의 영향력에 힘입어 망국적인 정당공천제를 폐지해 지방자치를 한 차원 도약시킨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참으로 아쉬웠다.
 
2008년 11월 8일 우리 부부는 세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두 내외분을 조용한 한정식집에 초대해 점심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도 김 변호사는 한미우호협회의 활동, 반핵반김, 탈북난민문제의 심각성, 미래연구원의 과제 등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 분의 논리는 정연했고 설득력은 강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뜰 때 김 변호사님이 입은 양복의 세련된 색상과 깃 올린 버버리를 보고 내 처가 한마디 했다.
“어머, 프랑스 배우 같으시네요. 유명한 영화 주인공 같으세요.”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허허”
그는 활짝 웃으며 기뻐하셨다. 강한 신념의 소유자이면서도 정서가 풍부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교감했던 큰 뜻, 미래연구원의 구상과 과제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2012년 12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한민국의 선각자요 국가 발전의 창도자(唱導者)였던 그분은 하늘나라로 훌훌 떠나가셨다. 인생은 허무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김 변호사님의 신념과 열정 그리고 애국심은 자손 대대에 계승돼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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