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사람, 그를 다시 곧 만날 날을 기다리며
행복했던 사람, 그를 다시 곧 만날 날을 기다리며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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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자 부인 · 도서출판 언약 대표
“사람의 출생 자체가 죽음으로 가는 길인 듯하니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러운 마음만 가슴에 담고, 슬픔은 향기라 생각하고, 우선 사모님 건강을 추슬러야 합니다.”
 
남편을 천국에 먼저 보내고 4년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없는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난 40년 세월의 삶의 흔적들이 봇물 터질 듯이 튀어나와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잘 수도, 먹을 수도 없던 어느 날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보내온 편지입니다. 편지와 함께 정성이 담긴 음식도 보내오셨습니다.
 
2008년 11월 중순 어느 날 남편에게 심히 괴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3년 가까이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시고 아시니까 하나님께 맡기자고 하던 남편이었지만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낙담하며 무력감에 빠진 남편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 약한 감기 기운 같은 증세가 계속되더니 심한 기침으로 이어졌습니다.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며칠을 허비했습니다. 며칠 허비한 그 일이 남은 우리 가족이 두고두고 가장 아파하는 부분입니다. 12월 5일 남편이 주관하는 미래한국포럼 조찬 모임을 끝내고 바로 병원에 갔어야 했습니다.
 
응급실까지 갈 상태는 아니었는데 또 이런저런 일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병원 진료시간이 끝난 후에 가게 됐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는 기침이 심해서 X-레이를 찍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곧 검사가 시작되고...급작스런 심장마비...그리고 극적인 심장박동의 소생. 그렇게 누운 침대에서 일어나 걸어 나오지 못하고 그이는 결국 4년 8일 만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죽음, 남편의 죽음, 4년이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리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그 긴 날들을, 하나님 왜 그러셨죠,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왜요, 왜, 왜, 나는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나 답은 없습니다. 그 답은 아마도 내가 주님 앞에 갔을 때 듣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나 또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고, 남편을 반갑게 만날 천국이 죽음 그 너머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 낙원에 갈 수 없습니다. 이 큰 소망이 있는데, 죽음이 슬픈 것만은 아닌데, 그런데 여전히 슬픕니다. 슬픔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황량한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허허로움과 공허감,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위로 받을 수 없고 어떤 방법으로도 위로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속에 있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주님께서 이 슬픔을 거둬 주시고 감사에 더해 기쁨까지 주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아직도 남편이 병상에 있던 지난 4년 동안의 일들은 글로 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슬픔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그러나 우리 가족, 남편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아들 며느리 딸 사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헌신은 자랑스럽게 쓰고 싶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남편이 해오던 모든 일들이 멈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사위를 통해 이루시려고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사위는 슬픔 중에서도 그 모든 일들을 맡아서 놀랄 만큼 잘 이뤄오고 있습니다.
 
힘들고 지쳐 있는 것이 보이는데도 내색도 없이 묵묵히 이끌어오고 있는 것이 안쓰럽습니다. 사위가 병원에 와서 미래한국이나 북한구원운동(세이브엔케이), 시국에 대한 일 등 남편이 관심을 가지는 일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 주면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듣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딸은 그 외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아마 딸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일 힘들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오랫동안 변호사일을 거의 안하면서 많은 것들에 돈을 쓰다 보니 은행 빚이 많았습니다. 은행 이자며 집의 일들로 그때그때 처리해야 될 것들을 모두 딸이 해야 했습니다.
 
딸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들이었는지 지금 몸이 몹시 약해졌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4년 동안의 병원비를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마다 병원에 와서 아버지 목욕시켜드리고 운동과 산책을 맡아했습니다. 4년 동안 그들은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아버지에게 효도했습니다.
 
나는 그때 이런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저 아이들이 효도하는 것을 보시고라도 김상철 장로를 일으켜 주세요” 우리 가족은 신앙으로 똘똘 뭉쳐 하나가 돼 그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은 축복의 열매들을 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눕기 전에 낳은 외손자 외에도 외손녀 하나와 쌍둥이 친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가 세상에 계실 때, 그들을 볼 수 있을 때 태어나서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줬습니다.
 
남편이 웃는 모습으로 눈 감았을 때 정말 평안 그 자체였습니다. 행복한 것 같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소리 내어 울 수 없었습니다. “아빠는 예수님 만나서 너무 기쁘신가봐.” 딸이 말했습니다. 아이들과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계속 계속 불렀습니다. 남편은 그렇게도 사랑하던 나라와 민족, 불쌍한 북한 동포, 탈북자 그리고 끔찍이도 사랑하던 가족에게 그의 기력이 소진될 때까지 그의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갔습니다.
 
남편은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니 자신이 좀 일찍 갈 것을 안 것처럼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1980년 12월, ‘억울하고 어려운 일 당한 이들을 위하여 촌음의 휴식도 사양하겠습니다’던 변호사 개업 때의 광고처럼 자신이 사명으로 생각하는 일들을 원 없이 하고, 또 다주고 갔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남편만큼 사랑과 신뢰를 받고 산 사람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복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활동했던 61년이 짧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그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일들이 개인의 유익을 위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뜻을 같이하는 귀한 많은 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남편은 그것을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행복해 했습니다.
 
나는 지금 추억 속에 살고 있습니다. 1972년 늦은 봄 어느 날 남편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것은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 날이고, 그 3개월 쯤 전에 남편은 나를 먼저 보았답니다. 그리고 3개월여 동안 계속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결국 “퇴근길에 차 한 잔 하기가 그렇게 힘드는 일입니까”하는 말에 “하긴 그래, 차 한 잔 하는 건데 괜히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 하면서 나간 것이 남편과 만나는 시작이 됐습니다. 그리고는 1973년 가을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1973년 9월부터 1975년 9월까지 서울형사법원 합의부 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시국은 참 혼란스러웠습니다.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긴급조치 선포, 유신헌법 반대 데모 등 그런 와중에서 남편이 있는 합의부에서 김대중 선거법 위반 사건을 맡게 됐습니다. 정부는 재판이 빨리 종결돼 그가 법정 구속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로 우리집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그 날도 밖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서 있는데 택시가 오더니 내 앞에서 서고 남편이 그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두 사람이 나타나 양 팔을 끼면서 “좀 모시러 왔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 몇 명 더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어떻게 판사를 이렇게 막 다루느냐. 집에 왔으니 우선 들어가자” 하고 들어와서는 그들이 아무리 가자해도 꿈쩍도 안하고 “내 자유의사로는 절대 안 나갈테니 강제로 끌고 가려면 가라”고 버텼습니다.
 
새벽에 그들이 나가자 남편은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구속도 각오하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무슨 불상사가 생기게 되더라도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하면서 자기가 없어도 나와 아이들이 살아야 할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구속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결과 재판부 판사 3인 전원이 좌천돼 1977년 1월 원주법원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때 원주로 가지 않았으면 독일 연수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2년이 지나도 인사이동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1979년 4월 독일로 법관 연수를 떠났습니다. 나는 처리할 일들이 있어서 4개월 늦게 떠났는데 그 기간 동안 남편은 20통이 넘는 편지를 깨알처럼 써서 보내왔습니다. 그것들을 보물처럼 간직했는데 이사하면서 유실돼버려 지금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독일에서 우리는 폭스바겐 중고차를 사가지고 그 차에서 먹고 자면서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언젠가 알프스산맥을 넘는 도로 휴게소에서 자게 됐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차가 낭떠러지로 날아 떨어질 것 같은 정도였습니다. 그때 그 차안에 누워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하고 있으면 그곳이 바로 내 집이지.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도 이렇게 편안해.”
 
남편은 책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면서 많은 책을 사서 한국으로 부치고 독일의 법관들과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때 나는 참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독일 남쪽 칼스루에라는 도시에 있는 헌법재판소에 가 있을 때는 헌법재판소장과 많은 판사들을 초대해 여러 번 한국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독일의 헌법재판소 제도가 참 잘돼 있다면서 한국에도 이 제도가 꼭 생겨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뤄졌습니다. 1987년 6.29 선언 후에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안이 만들어질 때 그의 노력으로 독일식의 헌법재판소 제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보람 있어 했습니다. 그 헌법재판소가 오늘날 인권의 신장과 헌법의식 함양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독일에서 1979년 10.26, 12.12를 겪은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그가 이상적 법관상으로 삼았던 ‘의로운 판사’가 되어 정말로 훌륭한 법관으로 살겠다던 꿈을 접고 돌아오자마자 사표를 제출하고 변호사 개업을 했습니다.
 
남편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그 시대는 자신이 희생할 각오가 없으면 감히 생각도 못할 때였습니다.
 
남편은 법대 3학년 때 앞으로 판사 경험을 좀 쌓고 인권운동 변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답니다. 그런 사람이라서 고시공부에 전념해야 할 법대 4학년 때 3선개헌반대 단식농성 데모에 지휘부의 일원으로 가담했었고 자연히 고시준비에 충실치 못했으므로 서울법대를 수석 졸업했으나 그때 응시한 사법시험에 낙방했습니다.
 
그는 인권변호사였지만 모태신앙인으로 순수한 애국심과 인간의 존엄성과 법치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므로 어떠한 명목으로도 폭력혁명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인권은 좌파적 시각의 인권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변호를 받은 소위 운동권은 학생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김근태 씨 사건이었습니다.
 
1985년 9월 김근태 씨 사건을 맡았습니다. 김근태 씨와는 대학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남편은 김근태 씨의 발뒤꿈치에 남은 고문 흔적을 보고 잠도 못 이루면서 몹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고문만은 방지돼야 하는데 법적인 방도는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고문 흔적에 대한 증거보전 신청’이라는 전례가 없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번민을 많이 했습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보복이 심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에게 기도 부탁을 했고, 자나 깨나 기도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법적 대응은 전례도 없고 남편 외에는 알 사람도 없으므로 안하면 됐지만 그는 “이 방법이 생각이 안 났다면 몰라도 이미 알고 있는데 자신을 속이는 것 밖에 안 된다. 양심을 속이지 말자. 그리고 지금 이 일로 자기 양심을 속이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비슷한 일이 생길 때 쉽게 양심을 속이게 된다”면서 증거보전 신청을 했습니다.
 
남편은 그 일로 전화가 도청되고 1986년에 참으로 지독한 세무조사를 당했습니다. 국세청 조사국 1개 반이 투입돼 1개월 동안 지난 3년간의 수입과 지출에 대해 정밀 실사를 했습니다. 그래도 실적이 나오지 않자 조사국 총 요원 100여 명을 투입해 3년간 몇 번 이사를 한 사건의뢰인까지도 찾아내 조사했습니다. 그래도 별 실적이 나오지 않자 조사기간을 1개월 더 연장해서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과된 세금이 700만원이었습니다. 끝나고 갈 때 담당조사관 한 명이 존경한다고 하고 갔답니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1987년에 있었던 연세대생 이한열 군 장례식 때 상황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세대 구내에서 상주하며 장례준비위원회의 실무를 사실상 총괄하고 있었던 남편은 질서 유지를 맡은 학생들에게 장례가 진정 민주화 제전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비폭력의 원칙을 지키자고 계속 호소했었답니다.
 
그런데 장례식날 신촌 네거리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운구 행렬이 시청 앞 분수대 옆에 잠시 멈춰서 서울에 하직 인사하고 바로 을지로로 빠져 그곳에서 버스로 광주 망월동묘지로 가기로 했는데 운구 행렬이 갑자기 시청 정문을 향해 방향을 틀었고 군중들이 구름처럼 뒤따르더랍니다.
 
사실은 그들이 미리 짠 행동이었답니다. 그는 가슴이 섬뜩하며 결단코 막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인파를 뚫고 운구 행렬의 정면 중앙으로 가 서서 나는 김상철 변호사며 이 운구는 오늘 오후 5시 망월동 묘지에 안장돼야 한다고 하니 영구를 메고 있던 학생 하나가 “당신이 뭐요, 비키시오”하고 대들더랍니다.
 
그때 남편이 손을 들어 그의 면상을 가리키며 “너 연대 학생이야? 누구야? 누군데 이 장례식을 방해해!”하고 벽력같이 소리 지르고 “자, 내 말을 들으시오. 이한열 군을 애도한다면 내 말을 들으시오. 이 영구는 지금 곧 광주로 떠나야 하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됩니다. 자. 자. 이리로 따라 오십시오. 이리로. 이리로” 하면서 서서히 선두 행렬의 방향을 틀었답니다.
 
운구가 광주로 떠난 후에도 수십 만의 군중은 흩어지지 않고 “조기를 걸어”, “국기를 내려”,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며 중앙청 방향으로 향했고 거대한 데모대가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길에서 전경대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고 그 전경대 뒤로 또 다른 전경 병력이 대오를 이루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바로 펑! 펑! 펑! 하며 어마어마한 양의 최루탄이 집중 발사되고 데모 군중이 혼비백산 흩어지는 것을, 남편은 아무래도 걱정스러워 광주로 내려가지 않고 당시 덕수궁 옆 광학빌딩 9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올라가서 보았답니다.
 
그때 그는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피 흘리는 비극을 막아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최루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그 바로 직전에 ‘최류탄 추방 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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