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구원 운동의 효시
북한구원 운동의 효시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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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본부 대표 · 가천대 교수
북한 동포들이 수없이 굶어죽던 1996년 여름 국가를 위한 기도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북한의 실상을 알리며 북한구원을 위해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깨어 일어나야 할 때임을 호소하는 장소였습니다. 김상철 변호사님이 주도하셨던 그 기도모임에서 저는 김 변호사님을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김 변호사님이 북한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며 불굴의 투지로 북한인권운동을 전개해 나가실 때 저는 국가 기도자들과 함께 남북한의 심각한 상황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김 변호사님의 북한구원운동이 인권운동으로만 매진됐다면 북한기도운동/에스더기도운동을 섬겼던 저와 김 변호사님과의 관계는 제한적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 변호사님은 인권운동가이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에 기도를 우선했던 기도자이셨습니다. 김 변호사님은 국가적인 위기 때마다 기도자들에게 기도를 촉구하고 국가기도회를 개최하며 기도를 인도하셨습니다.
 
2006년 11월 제가 출석하던 교회에서 ‘예수사랑 큰잔치’를 개최하면서 김 변호사님을 초청해 전교인과 이 잔치에 초청돼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함께 들었던 특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편 33:12)
 
이 말씀으로 시작된 김 변호사님의 특강은 이 민족의 건국사에 굽이굽이 녹아 있는 주님의 섭리와 극진한 사랑에 대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증언이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은 반만년 억눌려 살았던 이 민족에 대한 특별한 긍휼과 축복이었음을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이 강연은 김 변호사님의 신앙과 애국심과 역사적 통찰력을 한 번에 펼쳐 보이는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온 회중이 많은 은혜와 감명을 받았고 강연이 끝난 뒤 청년들은 따로 김 변호사님과 함께 늦은 밤까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시에 행사를 진행했으며 교회 청년부를 지도했던 저로서는 지금도 그 말씀과 그 모습이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갈 것이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6)
 
2007년 1월 4~6일, 오산리금식기도원에서 전국과 해외에서 온 국가기도자 3천여 명이 ‘에스더단식구국성회’로 모였습니다. 2007년 노무현 정부의 말기, 그해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혼란했던 국가적 상황 속에서 이 민족과 교회와 각 개인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하며 에스더와 같이 물도 마시지 않고 3일을 국가를 위해 금식하는 기도 성회였습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가적 위기 앞에서 남북한을 뒤흔드는 김일성주체사상과 음란(낙태, 동성애, 이혼 등), 물질숭배 등 하나님을 대적했던 이 민족의 죄악을 주님 앞에 통회 자복하며 용서와 긍휼을 구하는 자리였습니다.
둘째 날 강사로 등단했던 김 변호사님은 북한의 참혹한 현실과 굶어죽고 얼어 죽고 맞아죽는, 믿기 힘든 북한의 인권유린 실상을 알리셨습니다.
 
김일성주체사상이라는 강도를 만나 이 땅에서도 지옥같이 살다가 죽어서는 진짜 지옥으로 끌려가는 북한동포들을 외면하고 지나갔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곧 우리 자신들이었습니다. 세계 최악의 세습독재 속에서 고통 받고 짓밟히는 동포들의 신음을 외면했던 우리의 죄악을 눈물로 회개하고, 북한 동포들이 복음을 듣기 전에는 굶어죽지도, 얼어 죽지도, 맞아죽지도 않도록 북한구원을 함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진심의 기도자, 헌신의 기도자
 
김 변호사님은 에스더금식성회에 참석한 많은 국가기도자들을 격려하며 진심으로 이 성회를 축복해주셨습니다. 북한 강의가 끝난 후에도 성전에 남아 깊은 밤까지 함께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했던 그 시간이 소중하게 제 기억에 간직돼 있습니다. 처음으로 대규모 기도성회를 주관하며 많은 난관 속에서 힘들게 행사 준비를 해나가는 저를 늘 지지하고 용기를 주고 여러모로 도와주셨던 친형님 같은 그 사랑,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김 변호사님과의 동역은 교회와 기도원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국가기도회와 시청 앞 광장에서, 서울역 광장에서, 그리고 탈북자 구출과 북한 동포들의 생명·자유·인권을 위한 기자회견과 거리행진에서도 함께 했습니다.
 
2008년 6월 광우병사태로 나라가 극도로 혼란하고 광화문, 시청광장 등이 치안 부재의 무정부상태가 됐을 때 주님께서는 국가기도자들이 혼돈된 그 땅에 나아가 국가의 죄악을 회개하며 주님께 예배드릴 것에 대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6월 6일부터 6월 25일까지 6번의 국가기도회를 광화문 광장과 시청 광장에서 가졌습니다.
6번의 광장기도회 중 가장 위험했던 6월 10일 기도회는 낮에 시작돼 새벽 3시까지 철야기도회로 이어졌습니다. 이날은 6‧10항쟁 기념일이었므로 촛불시위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흥분했고 시위 도중 반국가적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용어들이 속출했습니다.
 
시청광장에서 철야기도회가 진행될 때 흥분한 시위대들이 기도회 장소를 둘러싸고 온갖 욕설과 위협과 폭행으로 기도회를 방해했습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시위 군중들은 험악해졌고 기도자들이 앉은 의자들을 강제로 들어내고, 오물과 술병들을 집어 던졌고, 사회자가 사용하는 마이크를 부수고 전원이 모두 끊어지는 사태가 발생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기도자들은 목숨을 걸고 새벽 3시 철야기도회를 마치는 시간까지 기도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때 김 변호사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국가기도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기도회를 진행하는 제가 위험하게 느껴질 때마다 적절한 조언을 하며 기도회가 끝까지 잘 지속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셨습니다. 위험할 때 함께 하셨고, 기도를 함께 하셨고, 그리고 승리의 기쁨도 함께 나눴습니다.
 
김 변호사님으로부터 늘 과분한 사랑과 존중을 받았던 저와 에스더기도운동은 김 변호사님의 소천 앞에서 이제는 평생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김 변호사님은 주님 곁에 가셨지만 하나님과 민족을 섬기셨던 그 기도, 그 헌신, 그 충성은 김 변호사님과 함께 했던 모든 분들과 제 마음 속에 아름답게 새겨져 있습니다.
 
“김 변호사님, 당신은 주님께서 이 민족과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축복이고 선물이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저희들을 위해 기도하며 응원해주십시오. 생명을 드려 섬기셨던 ‘북한구원 통일한국’의 유업을 이제 우리가 생명을 드려 이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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