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국가정상> 태국 푸미폰 국왕
<내가 만난 국가정상> 태국 푸미폰 국왕
  • 미래한국
  • 승인 2002.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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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李東元 옥스퍼드대 정치학박사,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
▲ 라마 9세(푸미폰 국왕)
젊은 국왕의 클라리넷 연주30대 대사때 동년배로 친하게 지내태국인의 절대적인 존경받아1963년 당시, 나는 태국대사로 근무했었다. 태국은 정치혼란, 쿠테타가 빈번하지만 왕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은 가히 신앙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토록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왕실을 보지 못했다. 당시 태국의 방콕은 아시아 외교의 중심이라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던 곳이었다. 다른 주요국 대사들은 모두 연로한 외교관 일색이라 내가 눈에 띄게 되었다. 게다가 푸미폰(74·Bhumibol) 국왕, 시리킷 왕비 모두 30대였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푸미폰국왕과 가까이 지냈고, 아내는 시리킷 왕비와 자주 만나 속을 털어놓고 얘기하는 기회가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태국 왕실로부터 연락이 왔다. 국왕부처가 우리 부부만 초대한 것이다. 그날 만찬은 격식을 뒤로한 채 30대 젊은 친구로서 격의없는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이 때 국왕은 신하를 시켜 클라리넷을 가져오게 했고 “이 대사, 내가 그래도 클라리넷을 즐겨 연주하는 데 한번 들어보겠소?” 국왕은 멋쩍은 듯 얘기했다. 태국 국왕이 외국의 대사부부를 초청하는 것도 이례적인 데다 클라리넷 연주까지 직접 하겠다니 이는 태국왕실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의 연주솜씨는 일품이었다.“폐하의 연주를 듣고 있으니, 그 아름다운 선율에 폐하의 외로움도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국민을 사랑하시고, 국민들도 폐하를 존경하는 것을 알고 있으나, 국민 위에 높이 계시니 외로움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저 궁궐 밖의 자유가 그리울 때도 있고, 왕가의 법도도 벗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대로 모든 사념을 버려야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게 아니겠소. 하하하…” 그의 잔잔한 미소에는 아련한 외로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시리킷 왕비도 내 아내에게 많은 배려를 해줬다. 아내가 열대기후에 적응이 되지 않아 몸이 아플 때면, 왕궁 주치의를 보낼 정도였다. 64년 7월 한국으로부터 급전을 받고, 다시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국왕에게 인사도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외무장관발령을 알게 되었고, 임관 뒤 박대통령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태국에 다녀오겠다고 건의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사할 겨를이 없었던 점을 정중히 사과하면서 대사로 재직 중 많은 것을 배웠고, 외무장관직 수행에 거울로 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국왕에게 보냈다. 처음에 나의 무모한 계획으로 시작된 ‘한국주도의 아스팍(아시아태평양협력기구)창설’이 1966년 2월 가닥을 잡았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 동남아 순방에 나서 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박대통령과 함께 국왕초청만찬에 참석, 푸미폰 국왕과 재회한 자리에서 “뒤늦었지만, 외무장관 취임을 축하합니다!”라며 국왕은 인사말을 건넸다. 이 만찬에서 박대통령은 위스키를 막걸리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고 엄청난(?) 양을 마셨다. 그날 초대된 귀빈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어 박대통령 만찬사가 시작될 무렵, 육영수 여사는 행여 박대통령이 만찬사를 실수 할까봐 나를 통해 ‘만찬사 메모’를 전해주려 애썼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그 메모지를 뿌리친 채, 언제 술을 마셨냐는 듯 앞으로 나가 즉석에서 10분 넘는 만찬사를 또박또박 해 나갔다. 그리고 제자리로 흐트러짐 없이 돌아와, 다시 채워진 잔을 벌컥 다 비운 뒤, 언제 술을 했냐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거기 모인 귀빈들은 대량(?)의 술을 마신 박대통령이 표정,몸짓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즉석 만찬사를 유감없이 해낸 것에 감탄과 경이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1966년 6월 14일 서울에서 아스팍 창설 총회가 개최됐다. 아스팍은 한국 주도로 창설된 최초의 국제기구며, 지금의 아태경제협력체(APEC)의 모태가 됐다는 점에서 한국외교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고, 젊음의 무모함이 빚어낸 아름다운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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