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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김영삼 대선자금과 5·18 특별법

김영삼 대통령, 자신 향한 대선자금 수사 피하기 위해 5·18 특별법 제정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위원 · 전 월간조선 편집장l승인2017.06.02l수정2017.06.0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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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위원 · 전 월간조선 편집장  webmaster@futurekorea.co.kr

‘빌레펠트 음모론(Bielefeld Conspiracy)’이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는 빌레펠트에서 온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빌레펠트에 다녀온 경험도 없으니, 그런 도시는 세상에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빌레펠트는 독일 서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실존하는 인구 34만 명의 도시다. “내가 모르면 없는 거다”라는, 인간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를 빗댄 용어가 ‘빌레펠트 음모론’이다.

역사 서술의 어려움에 대해 루소는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역사 서술은 결코 우리에게 현실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충실히 모사해주지 않는다. 현실의 사실들은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머리 속에서 그 형태를 바꾸고, 그의 관심에 맞도록 변화하며, 그의 선입견에 의해서 특수한 색채를 띠게 된다.

발생 무렵 사건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그 무대가 되는 장소에 정확히 가 볼 수 있게 하는 기술에 도대체 누가 정통할 수 있겠는가?”

5·18을 바라보는 시각은 루소의 <에밀>과 ‘빌레펠트의 음모론’과 비슷하다.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바라보고, 그것을 진리라고 우기고, 자신들이 본 것만을 믿으라고 강요한다.

“그건 황당한 역사 왜곡”이라고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벌떼처럼 공격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어느새 우리 현대사에도 전체주의적 망령이 횡행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1980년 광주의 봄을 피로 물들인 ‘5·18 민주화운동’을 두고 우리 사회에는 두 개의 거대한 ‘우상’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으려는 신군부의 학살 만행에 저항하여 수백 명이 목숨을 바쳐가며 항쟁한 처절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우상, 다른 하나는 “김대중의 내란음모 과정에서 촉발된 반정부 폭동이며, 이 과정에서 북한군이 개입하여 무장폭동이 격화된 사건”이라는 우상이다.

▲ 김영삼은 자신에게 향하는 대선자금의 칼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노태우 잡아넣는데 성공했다. / 1991년 6월,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지방의회 당선자 대회에 참석, 최고위원들과 손잡고 당원들의 환호에 답하는 박태준,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왼쪽부터)의 모습. / 연합

사건은 하나이되, 두 개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시각은 정반대다. 진영이 확실하게 갈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같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불과 37년 전 발생한 사건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니, 국민통합이라든가 상생(相生) 화합은 애시당초 불가능해 보인다.

김영삼, 취임 초엔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

이 참혹한 분열의 광기에 핵폭탄을 터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김영삼 대통령(재임기간 1993년 2월~1998년 2월)이었다. 김영삼은 재임 초만 해도 광주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입장이었고, 5·18 특별법 제정 요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광주 지역의 피해자 및 야당과 재야인사, 대학생과 교수, 지식인들은 민간 차원에서 오래 전부터 광주 사건을 촉발시키고 시민들을 사망케 한 신군부 핵심세력들을 처벌해 달라면서 관련자들을 사법기관에 고소·고발 하는 등 법적 투쟁을 계속해 왔다. 검찰은 1995년 7월 18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정동년 광주민중항쟁운동연합회장 등 ‘광주항쟁 진상규명 및 정신계승을 위한 국민위원회’ 소속 회원 322명이 헌법소원을 내는 등 격렬한 반대 투쟁이 가열됐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종교단체는 국회에 특별법 입법 청원서를 제출했고,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섰으며, 대학 교수들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서명운동을 벌였다. 헌법재판소는 같은 해 11월 23일,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은 부당하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사법기관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야단체와 야당, 반정부 인사들의 항의와 시위가 이어지자 김영삼 대통령은 그 동안 “역사에 맡기자”는 소극적인 입장을 뒤엎고 11월 24일,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5·18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정권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희한한 용어까지 등장했다.

전두환은 김영삼의 5·18 특별법 제정과 관련자 사법처리 방침을 밝히자 측근인 이양우 변호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발표했다. “만약 정부와 국회가 5·18 특별법의 제정을 강행한다면 소급입법에 의한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헌정사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며 국민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5·18 사태는 13대 국회에서 1년 6개월여에 걸친 청문회를 통해 그 진상이 규명되었고 김 대통령도 참여한 당시의 4당 영수들이 정치적 종결을 선언한 바 있다. 검찰 역시 1년 2개월이라는 장기간의 수사 끝에 불기소처분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검찰은 즉각 ‘12·12 및 5·18 특별수사부’를 설치하고 전면 재수사에 착수하여 노태우 전 대통령을 뇌물수수 혐의로, 이어 12월 3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12·12 군사반란 및 5·18과 관련하여 구속 수감했다. 12월 19일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18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유수호 의원, 5·18 특별법 강력 비판

5·18 특별법은 12·12와 5·18 주모자와 공범자의 공소시효를 정지시켜 내란 및 군사반란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해 1993년 2월 24일까지 공소시효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제2조).

또 향후 반란죄, 내란죄와 집단학살 등 헌정질서 파괴범의 경우 공소시효를 영구히 배제하는 내용의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도 별도로 제정했다.

이와 함께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정신 계승을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할 것(제5조)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보상을 배상(賠償)으로 볼 것(제6조),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을 공로로 받은 상훈에 대해서는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을 환수할 것도 함께 규정하고 있다(제8조).

▲ 2006년 10월 경복궁에서 열린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한 김영삼(가운데), 김대중(오른쪽),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 연합

문제는 ‘5·18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소급입법 불가 원칙을 위반한 위헌(違憲) 논란이 제기됐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는 5·18 특별법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조항의 위헌 여부를 검토한 결과 김진우·이재화·조승형·정경식 재판관 등 4명은 합헌 의견, 김용준·고중석·김문희·황도연·신창언 재판관 등 5명은 위헌 의견을 냈다.

결국 “위헌 결정을 위해서는 재판관 6명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 헌법재판소법에 의거, 공소시효 조항이 합헌으로 결정됐다.

당시 판결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5·18 특별법의 공소시효에 대한 표결 결과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합헌 4명, 위헌 5명으로 나타나 어느 쪽도 3분의 2(6명)를 충족시키자 못했다.

이 경우 위헌으로 폐기되는 것이 상식적 판단일 뿐만 아니라, 위헌으로 본 판사가 5명으로 합헌보다 1명이 많았는데도, 4명밖에 안 되는 합헌에 손을 든 판사들 의견대로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따라서 엄밀하게 표현하면 5·18 특별법은 합헌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위헌 결정을 받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법률가 출신인 유수호 의원(당시 자민련 소속, 유승민 의원의 부친)은 1995년 12월 19일, 국회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5·18 특별법’은 위헌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5·18 특별법은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려서 명백한 헌법 위반입니다. 또한 이 나라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법안이 명백합니다. 그 이유는 5·18 특별법은 법률불소급의 원칙, 형벌불소급의 대원칙을 천명한 헌법규정에 정면으로 저촉되기 때문입니다.

형벌불소급의 원칙이야말로 이 나라 헌법에서 정한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권리장전이올시다. 왜 소급입법인가 하는 것 그 이유 또한 간단명료합니다. 공소시효가 완성되어 이 시점 현재 처벌할 수 없는 사람을 사후입법으로 소급하여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아니한 것으로 만들자는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소급입법이라는 것입니다.”

유수호 의원은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던 여당의 법률가 출신 의원들이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위헌이 합헌으로 돌아갔다”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말 한마다는 이 나라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 셈이니 초헌법”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그렇다면 1995년 11월을 전후하여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김영삼 대통령은 위헌 논란을 무릅써가면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잡아넣고 사형선고까지 내리도록 한 것일까?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면 당시 정치 상황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영삼 총재는 1990년 2월 9일 민주정의당(노태우),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 3당 합당을 통해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1992년 이 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 취임 초부터 초대형 사건사고가 줄을 이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면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다.

민자당은 이후 계파 간 당권 경쟁으로 갈등이 첨예화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1995년 2월 9일, 3당 합당의 한 축이었던 김종필 대표최고위원이 탈당하여 4월 3일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기둥 하나가 무너져버렸다.

민자당은 1995년 6월 27일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내분 사태가 점입가경의 상황에 이르게 된다.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반(反)김영삼 기류가 형성되면서 일부 민정계 인사들이 탈당하자 김영삼은 민주계를 중심으로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하게 된다. 사실상 3당 합당이 파탄이 난 것이다.

박계동 의원,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 폭로

당시 검찰은 법조문을 상세하게 검토한 결과 현행법으로는 5·18 관련자들을 구속하기 힘들다는 견해였고,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대부분의 여당 의원들도 5·18 특별법은 소급입법 문제 등으로 인해 반대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1995년 10월 18일 국회 정당 대표 연설에서 김윤환 민자당 대표는 “초법적인 소급 입법 반대”를 분명히 한 것으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김영삼 대통령의 입장이 180도 달라졌다. 대체 왜 이러한 급반전이 일어난 것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윤환 대표의 연설 다음날 벌어진 박계동 의원(민주당)의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 폭로 사태를 주시해야 한다.

박계동 의원은 10월 1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4000억 원의 비자금을 100억 원 단위로 나누어서 시중은행 40개 차명계좌에 분산 예치했다”면서 100억 원이 예치된 신한은행 입금조회표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이 발언으로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사실 박 의원의 이날 발언은 이미 두 달 전인 8월 1일 김 대통령의 측근인 서석재(당시 총무처 장관)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발설했던 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이었다. 김 대통령은 서석재 장관의 발언을 일종의 해프닝으로 간주하여 그를 해임하는 것으로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박계동 의원 발언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할 상황이 아니었다. 국민적 분노가 뜨겁게 일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의 폭로가 터진 지 9일 후인 10월 27일, 노태우는 “재임 중 5000여억 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고, 남은 돈은 1700여억 원”이라고 비자금 조성사실을 시인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이 사과하고 비자금 조성자인 이원조 의원이 책임을 지는 선에서 미봉하려 했던 이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또 다시 폭발했다.

노태우의 대국민 사과가 시작되기 직전, 중국을 순방 중이던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동행했던 참모들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급거 귀국하여 “14대 대선 당시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비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한 것이다.

김대중의 이날 발언은 혹시라도 노태우가 자기에게 준 정치자금 문제가 폭로되어 위기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사전에 이를 물타기를 하기 위한 김대중의 고도의 작전이었다.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의 ‘검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김대중의 정치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메가톤 급 사건이었다. 만약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의 향방을 추적하게 되면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전모가 드러나게 될 것이니 미리 이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날 김대중은 위기 탈출을 위해 김영삼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면서 전선을 더 확대했다. 김대중은 “20억 원 이외에는 노 씨로부터 어떤 정치자금도 받은 일이 없으며, 김영삼 대통령과 관련한 점에 대해서도 명백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것은 “내가 노태우로부터 이 정도를 받았다면 노태우 밑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 당신은 더 엄청난 비자금을 받았을 것 아닌가. 조사하면 나 혼자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알아서 막으라”는 신호였다.

김대중이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를 거론하고 나오자 민자당 사무총장 강삼재는 “김대중이 더 많은 액수를 받았다”면서 이른바 ‘20억+α설’을 치고 나왔다. 벼랑 끝에 몰린 김대중과 새정치국민회의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김영삼은 노태우의 자금을 받아 선거를 치른 공범”이라고 공격함으로써 노태우 비자금 문제는 현직 대통령 김영삼의 심장을 겨냥한 칼날의 형국이 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합작

김대중의 공갈 작전에 김영삼은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비자금을 성역 없이 추적해 들어가면 김영삼 대선자금은 물론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받았다는 ‘20억+α’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검은 자금으로 얼룩진 ‘양김(金)’의 정치적 생명에 대한 공멸의 시한폭탄이 작동을 개시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양김’은 견원지간으로 대립 갈등하다가도 위기가 닥치면 한 배를 타곤 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받은 검은 돈의 실체를 밝혀라” 라는 여론의 물꼬를 일거에 다른 쪽으로 틀어버리기 위해서는 이를 한 방에 잠재울 만한 핵폭탄 급 이슈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김영삼도 좋고, 김대중도 만족할 만한 카드인 ‘5·18 특별법’이었다.

5·18 특별법으로 노태우와 전두환을 ‘반란 수괴’로 몰아 싸잡아 구속시켜 박살을 낼 경우 ‘양김’은 정치적으로 손해 될 것이 없다는 유쾌한 결론에 이른 것이다. 김영삼은 ‘5·18 특별법’을 통해 노태우뿐만 아니라 전두환마저 구속시킴으로써 자신과 김대중을 옭죄어 오던 대선자금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김대중도 호남 지역 주민들의 숙원이던 ‘5·18 특별법’을 간단히 해결하는 데 조연 역할을 함으로써 ‘20억+α’ 발언으로 추락했던 명예회복의 기회가 만들어짐으로써 호남의 맹주 자리 수성(守城)에 더없는 청신호가 켜졌다.

김영삼의 ‘5·18 특별법’은 ‘양김’이 노태우 비자금의 수렁에서 탈출하기 위한 공모에서 기획된 일대 사건에 다름 아니다. 이와 관련, 참여연대는 1995년 11월 25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5·18 특별법 제정 발표가 대선자금 수사에 관한 검찰의 수사범위가 사실상 이원조 씨 개인비리 문제 등으로 축소되는 시점과 맞물려 이루어진 점에 주목한다.

우리는 행여라도 이번 5·18 특별법 제정 발표가 92년 대선자금에 대한 수사를 축소하고 관련 재벌 총수에 대한 사법처리를 회피하기 위해 국민의 관심을 호도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노태우의 비자금과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 자금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필자는 지난 2015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노태우와 김영삼의 대선자금 전달 관련 내용을 폭로하는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미래한국>, ‘김영삼이 역사의 법정에 서야 하는 이유’, 2015년 11월 23일).

내용을 요약하면 노태우는 1987년 대선 출마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대선자금 ‘2000억 원+α’를 받아 대선을 치렀다. 자신도 후임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이 정도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 재임 중 기업인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서 ‘짠돌이’란 비난을 무릅써 가며 2600억 원 정도를 마련했다.

1992년 김영삼이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정되었을 때 노태우는 김영삼 후보의 최측근을 통해 1350억 원 정도를 대선 후보 개인이 집행하는 비용으로 전달했고, 나머지 자금은 공조직 가동비로 당에 넘겨주기 위한 절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노태우에게 뒤집어씌우기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인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이 대주주로 참여한 대한텔레콤이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되자 김영삼 후보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노태우는 김영삼으로부터 등을 떠밀려 1992년 9월 18일 민자당을 탈당하고 10월 9일 중립 거국내각을 구성했다.

이처럼 무당적자 신분이 되는 바람에, 그리고 김영삼에 대한 인간적 배신감 때문에 나머지 대선 자금을 넘겨주지 못하는 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다급해진 노태우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이 자금의 처리를 부탁했고, 경호실장은 경호실 소속 경리장교들에게 지시, 경리장교들이 시중은행의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이 자금을 분산 예치해 놓았다가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 비자금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벌어졌다. 검찰은 노태우 구속 후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 자금은 수사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렇게 되자 노태우 대통령에게 돈을 주었던 기업인들이 일제히 액수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20억 원을 준 기업인이 50억 원을 주었다고 진술하고, 50억 원을 준 기업인이 100억 원을 주었다고 진술하는 식으로….

김영삼 후보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나머지 대선자금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이 돈이 전달되지 않자 기업인들에게 손을 벌렸고, 기업인들은 김영삼 후보에게 대선 자금을 제공했다.

이것이 밝혀지면 현직 대통령도 무사하지 못할 상황이 되자, 검찰과 기업인들은 김영삼에게 제공했던 대선 자금을 노태우에게 준 것으로 뒤집어 씌워 노태우를 감옥에 보내버린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필자와의 비공개 인터뷰에서 검찰 수사 과정에서 기업 총수들이 자기에게 주었다고 진술한 액수가 계속 부풀려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이 액수를 부인하면 대기업 회장들과 대질 신문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라꼴이 뭐가 되겠나” 하는 심정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감옥으로 갔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노태우 비자금은 계속 부풀려져 실형을 선고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 비자금 문제도 거의 동일한 진행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은 세인들의 머리 속에서 이 사건이 잊혀질 때까지 전두환·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추징을 하지 못하고 계속 미뤄온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비자금을 강제 추징하기 위해 재산까지 압류하고 나선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김영삼은 자신으로 향하는 대선 자금의 칼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위헌 논란,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가며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노태우를 잡아넣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비자금 칼날은 피해갔는지 모르겠으나, ‘5·18’을 성역으로 만듦으로써 대한민국 체제 파괴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 지면을 통해 물어보고 싶다. 지하에 계신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5·18 특별법’ 제정을 명령함으로써 자신이 이 나라를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계시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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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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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7-06-10 10:39:42

    마지막부분에 전두환에 대한 비자금 압수수색이 박근혜대통령이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전두환특별법은 야당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이고, 대통령 취임 후 압수수색할 시점에는 대선기간에 이슈가 된 국정원댓글사건으로 검찰을 전혀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전 정권이 임명추천한 검찰총장의 지휘하에 진행되어 당시 박근혜정부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것이다. 솔직히 전두환특별법은 굳이 만들 필요없는 법을 만들며 '곧 압수수색이 있을테니 준비하라'는 듯이 만들며 진행된 압수수색으로, 밝히려는 것인지 덮기 위한 압수수색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신고 | 삭제

    • 심판 2017-06-06 23:58:51

      지옥에나 떨어졌으면 좋겠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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