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신뢰도 바닥인 한국 국민은 안녕한가?
사법신뢰도 바닥인 한국 국민은 안녕한가?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06.21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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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은 위험 수준. 사법개혁 당장 시작되어야

데카르트를 놀라게 했던 수학 천재 파스칼은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파스칼은 실험에 의해 공기의 무게를 증명하고, 급수(級數)의 이론을 서술하고, 페르마(Fermat)와 함께 확률론(確率論)을 창시했다.

계산을 위해 직접 자신이 계산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일관된 논리와 철저한 계산에 매료되었던 파스칼은 철학적 사유집인 ‘팡세’에서 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는 저쪽에서 불의가 된다.”

오늘날 파스칼의 이 말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듯하다. 다만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피레네 산맥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돈과 ‘좌파무죄, 우파유죄’라는 이념으로 대체되었을 뿐은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국민들의 사법신뢰도 OECD 최저

2015년 OECD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법부의 신뢰도는 27%로 OECD 42개 국 중 최하위와 다름없는 39위였다. 국민들이 사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나라에 정의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크다는 이야기도 된다.

▲ 법무부는 고검장과 검사장급 등 수사지휘 보직자들을 연구 보직 및 비지휘 보직으로 전보하는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오는 12일자로 단행했다. 핵심 요직을 맡았던 고검장·검사장급 인사 4명은 과거 중요사건의 부적절한 처리 등을 이유로 사실상 무보직 상태와 다름없는 연구 보직 등으로 발령 났다. / 연합

▲ 법무부는 고검장과 검사장급 등 수사지휘 보직자들을 연구 보직 및 비지휘 보직으로 전보하는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오는 12일자로 단행했다. 핵심 요직을 맡았던 고검장·검사장급 인사 4명은 과거 중요사건의 부적절한 처리 등을 이유로 사실상 무보직 상태와 다름없는 연구 보직 등으로 발령 났다. / 연합

법관이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말의 의미는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직업적 양심임에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과연 법관들에게 그런 직업적 양심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법조삼륜에 속한다는 검찰과 변호사들을 봐도 그렇다.

판사들의 수뢰 행위는 종종 매스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검사라고 다르지 않았고 변호사들은 전관예우라는 암묵의 카르텔을 통해 엄청난 치부를 해왔다는 국민적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엇보다 검사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해 보였다. 흔히 ‘정치검사’라 불리는 유력한 검찰내 인사들에 의해 정치적 배경에서 사건을 수사하고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기소하는 일들은 공공연한 행태들이었으나 이제 국민들도 언론들도 그러려니 하는 상황이다.

그러한 정치적 사건은 유죄입증에 실패해도 결국 정권으로부터 오히려 승진이나 정계입문의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라는 법조인들의 금언은 ‘하늘을 무너트려서라도 출세하라’는 말로 바뀐 것은 아닌지, 우리는 지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특검과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검찰 내부의 파벌과 계파에 의한 사법적 쿠데타는 국기 문란을 넘어서서 반역에 해당한다. 이러한 검찰 내부의 정치적 파벌투쟁은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훼손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영달을 위해 위계를 무너트리는 장면을 우리는 채동욱 총장의 호위무사들을 통해 생생하게 지켜봤다.

그런 이들이 이제 정권이 바뀌니 다시 호가호위하는 자리에 들어서고 있다. 검찰의 기소독점주의가 낳은, 그리고 검사의 인사권을 조직에 맡기지 않고 정무부처인 법무부를 통해서 실제로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행사하면서, 대한민국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 원인은 검사들보다 검찰제도에 있다고 하겠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직업적 양심을 잃은 법조인들

법원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까. 현재 법관의 인사는 대법원장이 관할한다. 판사 개인들은 모두 독립된 법관임에도 현실은 판사들의 승진과 보직에 있어서 대법원장의 판단이 절대적이다. 그러한 대법원장은 자신을 임명한 정치세력과 코드를 맞출 수 밖에 없게 된다.

영국은 2011년 노동당에 의해 대법원이 신설되기까지 약 200여 년간 대법원장을 의회 상원 법사위장이 겸임했다. 그들 상원 법률의원들은 법률귀족이어서 세습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는 법치를 정치에 구속되지 않게 하려는 영국인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제도 때문에 영국의 법문화와 수준이 타락했다고 하는 이들은 없다. 영국 런던은 영미법의 어머니인 보통법(Common Law)을 체계적으로 진화시켜온 문명이었다. 영국 법조인들의 수준은 세계 최고를 달린다. 영국에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비록 대법원장직을 세습 법률귀족에게 맡기더라도 그들이 직업적 양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사건을 심판할 때마다 대한민국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란 정치적 폭풍우 속에서 이 둥지, 저 둥지를 날아다니는 가련한 작은 새처럼만 느껴진다. 물론 이들은 ‘노력하는 자 방황하리니’라는 말로 자신들을 위로할 것이다.

망국적 전관예우 뿌리 뽑아야

그러한 판사들과 검사들은 옷을 벗으면 이제 그들 앞에는 ‘방황한 대가’로 전관예우라는 부(富)의 길목, 또는 정치권 입문이 기다리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지검장 출신이면 1년 안에 100억을 벌지 못하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는 말이 정석처럼 떠돈다.

실제로 검찰총장 정도를 역임한 전관이라면 아예 개인 변호를 맡지 않는다고 한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전관들은 굵직한 기업 총수 변호들을 선호한다. 따라서 검찰은 돈 많은 기업 총수를 잡는 날이 잔칫날일 수 밖에 없게 된다. 호형호제하던 현직 검사들과 전관들 간의 유착은 이미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통해 언론에 회자되어 왔다.

판사들은 다를까.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큰 사건에는 ‘수사 과정에서 검사 출신 변호사를 쓰고, 재판이 시작되면 판사 출신 변호사를 쓰는 것이 정석’이라고 귀띔한다.

물론 검찰의 생리와 재판의 원리를 잘 아는 전문가들을 그때 그때 상황에 변호인으로 해서 조력을 받으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한 말이겠지만, 왠지 개운하지 않은 말이다. 그런 맥락에는 ‘아는 현직 검사가 가장 좋은 변호인’이라든지, ‘사법연수원 동기 판사가 가장 좋은 변호인’이라는 말들이 너무나 버젓이 회자되기 때문이다.

서로 현직에 있을 때 밀어주고 봐주고 한 일종의 동업정신(?)이 전관과 현직 간에 끈끈한 유대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전관 출신 변호사들과 현직 검사, 판사들은 한결같이 ‘전관예우 사실 없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전관들이 모두 재판에서 승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유죄라 하더라도 10년 살 것을 3년 살고, 3년 살 것은 집행유예나 벌금이 되는 상황이 전관예우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왜 그렇게 전관을 사용했던 이들이 다시 전관을 찾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돈이 많은 이들은 그만한 여력이 있으니 가능한 자기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관을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생각은 다른 것이다. 전관예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그렇다면 법조계는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국민이 틀렸다’는 생각은 우리 사법체계에 대해 불신만을 더 깊게 만들 뿐이다. 전관예우는 어떤 방법으로든 국민들이 더 이상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제도 개혁을 해야만 한다.

엉터리 법률 양산하는 불량 입법부도 개혁돼야

그러나 법조인들의 일탈이나 전관예우 못지않게 시급히 개혁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바로 법을 만드는 입법자들의 무지와 위헌과 범죄에 가까운 양심불량한 입법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경제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국회의 입법만능주의와 인기영합주의가 결합하며 국민 권익에 대한 핵융합적 침해를 발생시키는 최악의 시너지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부정청탁금지법, 최저임금법 제정이나 생활임금제를 강제하고 법위반시 형사처분을 가하는 것은 헌법 제10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입법, 형사처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특별법에 불과해 위헌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완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행복추구권이 내포하고 있는 ‘행동의 자유’와 ‘사적자치 계약의 자유’ 등에 입각해 영역이 확대되어야 할 사법들이 오히려 경제민주화 입법을 통해 공법화 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우려한다.

최 교수는 “2013년과 2014년에 걸쳐 추진된 경제민주화 입법은 헌법 제119조 제2항의 경제민주화의 의미를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며 기업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보다는 ‘기업가 정신’을 강조해 기업들이 보다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오늘날 한국에 존재하는 수 천 개의 법률 속에 숨어 있는 형벌 규정은 과거의 적폐(積弊)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최 교수는 사법개혁이나 검찰개혁과 같은 미봉책으로는 불가능하며 오래 묵은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모두 법이란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는 법의 원칙을 잊고, 사법의 공법화가 국가 전반에 광범위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이 사적자치의 원리에 의해 자기 책임 하에서 계약으로 해도 되는 부분을 국회가 법률로 제한하거나 규제를 해서 법이 구속된 자유를 풀어주는 열쇠가 아니라, 자유를 구속하는 수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를 전체국가(Total State)라고 부른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구분이 사라진 사회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공공복리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적 자치를 범죄시하는 입법이 증가하면 할수록 국민들의 과잉범죄화는 가속화될 수 밖에 없다. 전체주의화에 대한 입법부의 자성이 없으면 사법부의 개혁은 의미가 상실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법조인들과 법학자들이 법철학과 같은 기초법학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고 법과 자유에 대해 많은 담론과 학설을 생성하고 후학들에게 교육하는 것 외에는 없다.

진정한 율사들은 사라지고 무지한 시민만 등치는 법기술자가 난무하는 사회는 아닌지 겁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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