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쿼터 축소 11년, 한국영화는 망하지 않았다
스크린 쿼터 축소 11년, 한국영화는 망하지 않았다
  • 조희문 영화평론가·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7.07.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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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계 수준에 올라선 한국영화, 개방과 경쟁이 거둔 성과

지금의 한국영화계에서 스크린쿼터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제도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 탓이다.
2006년 7월 1부터 스크린쿼터제는 연간 73일을 지키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연간 146일 수준에서 유지되던 스크린쿼터 일수를 하루라도 줄이면, 한국영화는 당장이라도 망할 것처럼 주장하던 반대론자들은 지금의 한국영화 호황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스크린쿼터를 줄이는 일이 매국행위인 것처럼 주장하며, 문화훈장 반납 이벤트를 벌였던 배우 최민식은, 미국영화 <루시>(2014)의 주연으로 참가했다.

봉준호 감독은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옥자>(2017)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미국의 영상유통 자본이 투자하고, 배급하는 영화의 감독으로 참여한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또는 폐지) 반대의 홍보대사처럼 활동했던 박중훈도 미국영화 <아메리칸 드래곤>(1997),<찰리의 진실>(2002)에 출연했다.

안성기, 이병헌은  미국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기념판을 남겼다. 이병헌은 <G.I조-전쟁의 서막>(2009) <레드-더 레전드>(2013), <터미네이터-제네시스>(2015), <미스컨덕트>(2016) <매그니피선트 7>(2016) 등에 잇달아 출연하며, 미국영화계의 스타들과 팀을 이뤘다.

 

한국은 주목 받는 영화시장

미국영화 중에서 월드 프리미어나 아시아 프리미어의 출발점으로 한국을 선정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톰 크루즈, 휴 잭맨, 카메론 디아즈, 리암 니슨 같은 배우들은 영화 홍보를 계기로 국내 관객들을 만났다.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특별히 관심을 받기도 쉽지 않다.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과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반증이다.

스크린쿼터제를 한국영화 부흥의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던 시기에는 한국영화 시장 점유율이 외국영화 특히 미국영화에 대해 극도로 빈약했다. 하지만 1986년부터 수입제한 폐지, 제작자유화 등의 조치가 시행되면서 한국영화는 점진적으로 경쟁력을 회복하게 되었고, 스크린쿼제가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축소되던 2006년에는 이미 시장 점유율40%를 넘기고 있었다.

스크린쿼터(screen quota)제는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영화관)에 대하여 특정한 영화를 일정한 기준 이상으로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특정 국가에서 자국 영화의 보호와 진흥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시행한다고 믿는다.

1927년 영국 의회는 영국내 모든 극장은 영국영화를 30% 이상 반드시 상영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은 ‘영화 헌장’(Cinematograph Act)을 제정함으로써 영국영화 상영을 의무화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스크린 쿼터’제의 시작이었다.

이 제도는 자국 영화의 보호와 이용에 관심을 가진 나라들에서 뒤따라 시행했는데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일부 국가와 뒤늦게 영화산업의 육성에 관심을 기울인 남미의 브라질, 아시아의 우리나라와 파키스탄 등 현재 세계 11개국이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들이 운용하고 있는 스크린쿼터 제도는 비교적 느슨한 상태로 완화하고 있거나 폐지 추세에 있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하더라도 권장 사항에 그치거나 이를 준수하지 않더라도 강제적 처벌을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향은 스크린쿼터제가 자국 영화 보호에 실질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미약할 뿐 아니라 비디오나 방송 등을 연계하는 통합 영상 정책 차원에서 다른 지원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더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중국은 그 같은 경향에서 이례적으로, 스크린쿼터제를 완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1994년부터 시행한 중국 스크린쿼터는 외국 영화 수입을 연간 10편으로 제한하는 것이 골자였다.

이후 1999년 WTO 가입 이후 연간 20편으로 늘었고, 2012년에 다시 34편 수준으로 조정되었다. 그나마 34편 중 14편은 3D나 IMAX, 애니메이션 등의 기술적 특성이 있는 영화여야 한다는 조건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이나 홍콩에서 중국어로 제작하는 영화에 대하여는 중국영화로 간주하여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며, 중국과 공동제작 영화에 대하여도 중국영화로 한다. 우리나라는 2014년 ‘공동제작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1967년부터 시작했지만 당시 영화계는 외면

우리나라에서 스크린쿼터제가 처음 시행된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5년. 조선총독부는 미국, 영국 같은 적대국가의 영화 수입을 제한하고, 일본영화(방화, 한국영화도 포함한다)의 상영을 강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책 영화만을 제작하는 영화사 1개와 배급회사 1개만을 남기는 극단적인 통합을 시행하는 단계로 옮겨갔다.

한국영화의 보호와 진흥을 명분으로 1967년부터 스크린쿼터제가 다시 시행되었지만 영화사는 시큰둥한 반응이었고, 극장업계는 현실을 무시한 조치라며 반발했다. 정부는 1950년부터 한국영화 진흥을 위해 이런저런 지원을 시책 수준으로 시행했고, 1962년 ‘영화법’을 제정하면서 영화 관련 업무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영화법 제19조 중 영화를 상영하는 공연장의 경영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외국영화와의 상영비율에 따라 국산영화를 상영하여야 하고(3항), 외국영화의 수입편수는 당해 연도의 국산영화 상영편수의 3분의 1을 초과할 수 없다(4항)고 명시했다.

의도했던 성과보다 업계 갈등만 조장

상영 규모는 ‘연간 6편 이상으로 하되 2월마다 1편 이상으로 하고 총 상영 일수는 90일 이상’이어야 했지만 ‘다만 공보부 장관은 지역별 및 영화 상영 상황에 따라 총 상영 일수를 조절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두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스크린쿼터제’와 ‘수입쿼터제’의 시작이었다.

‘스크린쿼터제’는 행정이나 법률용어가 아니지만, ‘한국영화의무상영제’라는 본래 명칭보다 더 일반화되었다. 당시 한국영화의 제작편수는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었다. 1965년에 161편이었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66년의 173편, 67년 185편, 68년 195편, 69년 229편, 70년 231편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 제도의 시행에 대해 영화사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내심으로는 불만이 가득했고, 극장업계는 현실을 무시한 조치라며 반발했다. 영화법 제정 이후 정부는 난립하는 영화사의 숫자를 제한하고, 제작 역량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70여 개가 넘는 영화사를 20개 수준으로 줄이는 통폐합을 시행했고 영화사는 의무적으로 1년에 한 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대신 한국영화 제작에 따른 손실보상 차원에서 영화제작사에 대해 외국영화 수입권을 배정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만이 외국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인데, 극장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는 특정 영화사가 제작했거나 수입한 영화가 되는 셈이었다.

당시 한국영화의 인기는 턱없이 낮았던 데 비해 외국영화 특히 미국영화의 인기는 압도적으로 높았다. 영화사 입장에서도 흥행성이 낮은 한국영화에 올인하기보다 외국 영화 상영으로 얻는 이익에 대한 기대가 훨씬 더 컸다.

그 같은 현실에서 스크린쿼터제는 흥행성 낮은 한국영화 상영은 늘리고, 수익이 큰 외국영화의 수입과 상영은 제한하겠다는 것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시행 초기 수년간은 극장업계가 계속 반발하는 가운데 영화업계도 묵시적으로 동조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한국영화 보호와 진흥이란 명분은 영화계 현실 앞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극장은 스크린쿼터제를 피하기 위해 한국영화를 간판으로 걸어두고 외국 영화를 상영하는 위장상영, 불법상영도 눈치껏 시도했다.

영화계가 비로소 스크린쿼터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86년 영화법 개정에 따라 제작자유화, 수입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영화시장 개방’으로 불리는 이 조치에 따라 일정 요건을 갖추기만 한다면, 영화사를 설립하는 일도, 외국 영화를 수입, 배급, 상영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특히 민감했던 부분은 외국의 메이저급 영화사들이 자신들의 영화를 직접 배급(직배)하는 일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정부의 보호 속에서 안주하던 영화사들은 갑자기 밀어닥친 변화에 혼비백산했다. 이전까지 영화사의 핵심 돈 줄 역할을 하던 미국영화들이었지만, 흥행성 높은 영화들은 수입 자체가 어려워지게 된데다, 그 영화들과 흥행 경쟁을 하게 되었으니, 세 살짜리 어린아이와 고도의 훈련을 받은 프로 축구 선수가 시합을 벌여야 하는 것 같은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영화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화시장 개방은 진행되었고, 영화배급을 관망하던 외국 영화사들은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마침내 상영을 시도했다. 서울의 명동극장과 신영극장 두 곳에서 상영한 <위험한 정사>라는 영화는 영화법이 시행된 이후 외국영화사가 국내에서 처음 직배로 상영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후 <레인맨> <인디아나 존스> <007 리빙데이라이트>같은 영화들이 줄을 이어 영화시장을 강타했다. 하지만 관객들 입장에서는 직배로 인한 변화가 무엇인지 실감하기는 어려웠다.

영화시장 개방 이전에도 미국영화는 상영되었고, 개방 이후에도 미국영화 상영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객들로서는 재미있는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수입이든 직배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반응이었다.

영화인 생존문제가 이념투쟁의 수단으로

다급해진 영화인들은 유명무실하던 스크린쿼터제를 끌어내 극장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규정대로 지키라는 것이었다. 1993년 한국영화인협회는 산하에 스크린쿼터감시단을 설치하고 정지영 감독을 단장으로 세웠다.

영화인협회는 한국영화 시장 보호를 위한 감시자 역할을 기대했지만 정지영, 김혜준, 이정하 등으로 구성된 감시단은 기존 보수 영화계 인물들과는 생각을 달리하는 좌파이념적 단체의 성격을 더 많이 드러냈다.

1996년에는 스크린쿼터감시단이 별도의 단체로 모습을 바꿨고, 2000년에는 스크린쿼터문화연대라는 법인단체로 확대되었다. 그 무렵에 한국영화인협회와 성향을 달리하는 영화인회의가 등장했다.

영화인회의는 문성근, 명계남, 이용관 등이 주축으로 참여했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와 영화인회의는 다른 단체들과 연대하거나 독립적으로 이후 영화계의 각종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의견을 냈고, 한미 FTA 체결, 미국산 쇠고기수입반대 등 반정권, 반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스크린쿼문화연대가 스크린쿼터축소(폐지)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 스크린쿼터제 문제는 제도로서의 성과 여부와는 상관없이 반미와 반개방(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을 주장하는 이념투쟁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영화시장을 개방하면(이미 1986년에 개방조치가 이뤄졌는데도) 미국영화가 한국영화 시장을 휩쓸어버릴 것이라며 선동했고, 스크린쿼터제를 지키는 것은 문화주권을 지키는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스크린쿼터제를 이전의 146일 수준에서 절반인 73일로 줄인 것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이창동 문화부 장관에 의해서였다. 그렇게도 반미를 외치를 외치며 하루라도 줄여서는 안 된다던 대통령과 장관이 갑자기 축소 결정으로 돌아선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스크린쿼터제의 축소(사실상 폐지)는 한국영화산업 발전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고 개방과 경쟁이 오히려 중요한 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스크린쿼터가 한국영화산업의 최후 방패이며 그것이 줄거나 없어진다면 영화산업이 몰락할 것이라고 선동했던 좌파운동가들이나 정말로 보호 장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으며 동조에 나섰던 순진한 애국심 추종자들, 반대 흐름이 다수이니까 사실 여부를 가릴 것 없이 대세에 줄 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며 가세했던 기회주의적 동조자들은 지금의 한국영화 수준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스크린쿼터 축소반대운동은 영화계가 좌파적 문화운동의 선동에 맹목적으로 휘둘린 뼈아픈 사례로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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