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의 난세를 넘은 명재상 조준
여말선초의 난세를 넘은 명재상 조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08.0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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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준의 초상

역사 속에는 다양한 인물의 부침이 담겨 있다. 그들의 언행은 오늘의 사람들에게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역사를 읽으면 현재가 보이고, 현재를 읽으면 미래가 보인다는 가르침 또한 시대를 넘는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의 ‘경세가 열전’ 연재는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읽는 대화와 소통의 창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 주>

만일 조선 정승학(政丞學)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진다면 그 첫 장은 논란의 여지없이 조준(趙浚 1346~1405)이 차지할 것이다.

고려말 혼란기에 태어났는데 증조(曾祖)는 인규(仁規)로 영의정에 해당하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아버지 덕유(德裕)는 호조판서에 해당하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뜻은 컸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어머니 오씨(吳氏)가 하루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가갈(呵喝)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가갈이란 귀한 사람의 행차 때 길을 치우기 위해 “물렀거라!”고 외치는 것이다.

“내 아들이 비록 많으나 한 사람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이에 갑인년(甲寅年-1374년) 과거(科擧)에 합격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 해는 공민왕이 죽던 해다. 고려 말 대혼란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겸손한 성품에다 관리로서의 이재(吏才)도 뛰어났기에 빠른 승진을 거듭해 형조판서에 해당하는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그리고 우왕 9년이던 계해년(癸亥年-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됐다. 조선시대로 치자면 승정원 승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지켜본 우왕의 무능과 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해 조준은 벼슬을 버리고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며 윤소종(尹紹宗) 조인옥(趙仁沃) 등과 교유하면서 세상을 관망했다. 이들은 뒤에 조선건국에 음으로 양으로 기여를 하게 된다.

조준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무진년(戊辰年-1388년)에 일어난 이성계(李成桂) 장군의 위화도 회군이었다. 이성계는 회군에 성공해 조정을 장악하고서 쌓인 폐단을 쓸어버리고 모든 정치를 일신(一新)하려고 했다.

이 때 조준이 중망(重望)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함께 일을 이야기해 본 다음 크게 기뻐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발탁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조준에게 “크고 작은 일 없이 모두 물어서 했다”고 한다. 조준도 감격하여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준은 뜻도 컸지만 일에도 밝았다. 정치와 정책 모두에 능한 인물이었다.

조준은 정몽주 등과 함께 이성계의 뜻에 따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신미년(辛未年-1391년) 문하부 찬성사로서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갔는데 이 때 남경으로 가던 도중에 지금의 북경에 있던 연왕(燕王)을 만나 보았다. 훗날 조카 혜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영락제(永樂帝)다. 조준은 당시 연왕을 만나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은 큰 뜻이 있으니 아마도 외번(外蕃)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흥미롭게도 이방원 역시 왕자로 있던 1394년(태조 3년) 정도전을 대신해 명나라에 갔는데 그도 도중에 연왕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연왕은 왕으로 머물러 있을 인물이 아니다.”

실록은 이방원이 명나라를 다녀온 후 어느 날 조준의 집을 방문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조준이 이방원을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매우 삼가며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선물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이 책은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것으로 유학 최고의 제왕학(帝王學) 텍스트다. 조준이 이방원에게 이 책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상 거사(擧事)를 준비하라는 암시나 마찬가지였다.

역사의 고비마다 지혜를 발휘하다

이야기는 다시 공양왕 때로 돌아간다. 정몽주(鄭夢周)가 우상(右相)으로 있으면서 공양왕을 받들어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 하면서 조준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임신년(壬申年-1392년) 3월 정몽주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위독한 틈을 타서 대간(臺諫)을 시켜 조준과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윤소종(尹紹宗), 남재(南在), 오사충(吳思忠), 조박(趙璞) 등을 탄핵해 모두 먼 외방으로 귀양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들을 수원부(水原府)로 잡아 올려 극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러나 4월에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살해하는 바람에 조준 등은 죽음을 면했다. 찬성사(贊成事)에 복직된 조준은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을 거느리고 이성계를 추대했다. 얼마 후 이성계가 공신들을 불러 세자를 누구로 세울지 의견을 들었는데 이 자리에서 조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功)이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바라건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

이방원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이 때 왕비 강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이성계는 조준에게 강씨 소생인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하니 조준은 땅에 엎드려 쓰지 않았다. 이성계는 강씨의 어린 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삼았다.

이 때부터 정도전은 강씨와 손을 잡고 이방석의 후견인 역할을 했고 조준은 그에 맞섰다. 정축년(丁丑年-1397년)에 명나라와 외교문서로 인한 분쟁이 발생했다. 명나라에서는 그 문서를 지은 정도전을 잡아서 명나라로 보내라고 했다. 이 때 삼군부판사(三軍府判事)로 있던 정도전은 병(病)을 핑계로 가지 않고 오히려 요동정벌론을 제기했다. 문제는 현실성이었다.

처음에는 정벌론이 힘을 얻었다. 심지어 정도전과 남은은 전하의 명이라며 집에까지 찾아와 “상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했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던 조준은 몸을 일으켜 이성계를 만나 불가의 뜻을 밝혔다. 무엇보다 “지금 천자(天子)가 밝고 선하여 당당(堂堂)한 천조(天朝)를 틈탈 곳이 없거늘 극도로 지친 백성을 이끌고 불의(不義)의 일을 일으키면 패하지 않을 것을 어찌 의심하오리까?”라는 설득에 이성계는 정벌의 뜻을 접었다.

이성계는 묘하게도 정도전을 아꼈으면서도 그를 정승에 앉히지는 않았다. 실록의 한 대목이다. “도전(道傳)이 또 준(浚)을 대신하여 정승(政丞)이 되려고 하여 남은과 함께 늘 태상왕(-이성계)에게 준(浚)의 단점을 말했으나 태상왕이 조준을 대접하기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이성계도 정도전은 정승감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은 거사의 와중에 박포(朴苞)를 보내 조준을 부르고 또 스스로 길에 나와서 맞았다. 그리고 훗날의 정종을 내세워 일단 이성계로부터 왕위를 넘겨받는 계책을 낸 장본인도 조준이다. 물론 태종 재위 기간 내내 가장 막강했던 정승은 하륜(河崙)이다.

그러나 여말선초 그리고 태조 정종 태종으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고비마다 태종 이방원을 뒷받침한 인물은 조준이다. 정도전 이야기는 많아도 조준 이야기는 거의 없는 것은 우리의 역사 인식 수준이 얕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정승은 인재를 골라 쓰는 자리다. 실록은 이렇게 증언한다. “다른 사람의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그랬기에 태종은 그가 죽은 뒤에도 뛰어난 정승[賢相]을 평론할 때에 풍도(風度)와 기개(氣槪)는 반드시 조준을 으뜸으로 삼고 항상 ‘조 정승(趙政丞)’이라 칭했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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