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도 정보는 힘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정보는 힘이었다
  • 고성혁 군사전문저널리스트
  • 승인 2017.08.02 10: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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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역사로 배우는 국가전략

전쟁이 많은 시대일수록 첩보전 또한 활발하다. 독일 스파이 마타하리는 유명하다. 스파이의 역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 적의 정보를 빼내거나 역정보를 흘리는 역할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6·25 직전 거물간첩 김상룡과 이주하를 체포하자 김일성은 조만식 선생과 맞교환 제안을 하기도 했다. 세작(細作)이라 불리는 간첩 이야기를 우리 삼국사기에는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백제는 세작(細作)에 의해 두 번이나 망했다.

▲ 한성백제가 망한 지 근 200년이 지나서 또 다시 백제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성백제를 망하게 만든 고구려 승려간첩 도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병력으로 한성백제(지금의 풍납동 일대)를 포위했다. 백제 개로왕은 도망을 쳤지만 자신의 옛 신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에게 사로잡혔다.

지금의 아차산에 진(陣)을 친 장수왕 앞에서 개로왕은 참수당했다. 백제 개로왕은 어찌 하다가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그것은 장수왕이 내려보낸 승려간첩 도림 때문이었다.

장수왕의 지시를 받은 고구려 간첩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것처럼 하고 백제로 귀순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종교인에 대해서는 관대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종교인은 세작노릇을 하기에 적격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백제에 귀순한 도림은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했다. 당시의 백제 개로왕은 장기와 바둑에 푹 빠져 있었다. 승려간첩 도림은 그것을 노렸다. 바둑으로 백제 개로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로왕에게 도림은 친구이자 바둑의 스승이며 정책의 조언자로 자리매김했다. 백제 충신들의 간언은 철저히 차단했다.

이때부터 도림은 개로왕과 신하 간에 이간계를 펼쳤다. 개로왕에게 대규모 성곽공사와 궁궐 증축을 건의했다. 이것을 반대하는 신하에게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래서 고구려로 도망갔던 신하가 바로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7일을 버틴 개로왕은 탄식하듯 말했다. 그제서야 도림에게 속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병사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도망가는 개로왕을 사로잡는 상황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임금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이렇게 한성백제는 고구려 세작승려 도림에 의해 망했다. 삼국사기 개로왕편은 세작 중의 세작은 정보를 캐는 것이 아니라 적의 지휘부에 파고 들어서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임을 보여준다.

신라 전략정보전의 선구자 - 거칠부 장군

신라가 군사강국으로 떠오르고 결국 삼국을 통일하는 데는 병권(兵權)을 호령한 이사부 장군-거칠부 장군-김유신 장군으로 이어지는 맥이 있었다. 거칠부는 545년 신라 왕조의 역사서인<국사(國史)>를 편찬했고 551년 고구려를 쳐서 죽령(竹嶺) 이북의 10군(郡)을 빼앗아 신라 영토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거칠부는 승려로 위장하고 고구려 지역으로 넘어가서 고구려를 염탐했다. 거칠부의 활약을 대변(代辯)이라도 하듯이 삼국사기 열전(列傳)편을 보면 김유신, 을지문덕 다음으로 거칠부가 소개되고 있다. 거칠부의 행적을 군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의 역할은 간첩(세작)활동에 집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승려 신분이라는 것은 승려 이외에 첩자로서의 기능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거칠부가 고구려를 정탐할 때 고구려 법사 혜량(惠亮)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미(沙彌, 수행승)는 어디서 왔는가?”
거칠부가 대답했다.
“저는 신라인입니다.”
그날 저녁에 법사가 그를 불러 놓고 손을 잡으며 은밀히 말했다.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너의 용모를 보니 분명코 범상치가 않다. 아마도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 않느냐? 너의 상을 보니 제비 턱에 매 눈이라, 앞으로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만약 병사를 거느리고 오게 되거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부분은 달리 해석하면 승려로 위장한 거칠부가 고구려 법사 혜량을 포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승(高僧)이라고 추앙받는 혜량법사는 과연 법사로서만 그 존재 가치를 봐야 할까? 이점에 대해서 혜량은 고구려의 고급정보를 거칠부에게 전달해 주는 세작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근접할 것이라고 본다.

결국 혜량은 고구려 주민을 이끌고 신라로 귀순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작들은 종교인으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세작에 의해 두번 멸망했다. 신라에 포섭된 첩자 공작의 핵심은 '위협'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패망의 지름길이다. 백만의 적군보다 내부의 세작 한명이 더 무서운 것이다. / 백제멸망을 다룬 영화 '황산벌' 포스터와 영화의 한 장면

김유신에 포섭된 백제의 상좌평 임자

한성백제가 망한 지 근 200년이 지나서 또 다시 백제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국사기엔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 19년(659) 봄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書案] 위에 앉았다’,  ‘여름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5월에 서울[王都] 서남쪽의 사비하(泗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장(丈)이었다. 가을 8월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였다’, ‘9월에 궁중의 홰나무[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내용만 봐도 을씨년스럽다. 그만큼 백제 말엽 민심이 흉흉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흰 여우가 사비궁 안에 들어가 상좌평 위에 앉았다’는 부분이다. ‘상좌평’이라고 하는 관직은 지금으로 치자면 국무총리 같은 자리다.

조선시대로 말한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 자리에 해당하는 것이 백제의 상좌평이라는 관직이다. 전통적으로 여우는 요물로 우리에겐 인식되어 있다. 즉, 매우 교활한 인물이 최고 관직인 상좌평에 앉았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여우같은 인물이 상좌평 자리에 올랐으니 백제의 정치 상황과 민심이 흉흉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우가 상좌평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 이 내용을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바로 삼국사기 열전편의 김유신전(傳)이다. 김유신 장군이 얼마나 치밀하게 첩자를 이용해 백제를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했는지가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조미곤(租未坤)은 태종무열왕 때 급찬으로 천산현령(天山縣令)을 지내다가 백제의 포로가 되어 좌평(佐平) 임자(任子)의 종으로 일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일해서 임자의 신임을 얻었다.

백제 좌평(佐平) 임자(任子)는 조미곤의 성실함을 보고 조미곤에게 자유롭게 외부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러자 조미곤은 신라로 탈출해 자신의 상황과 백제의 실정을 김유신(金庾信)에게 소상히 말했다.

조미곤의 이야기를 다 들은 김유신은 조미곤을 일종의 고정간첩으로 이용할 작전을 구상했다. 그리고 김유신과 조미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조미곤 당신의 충성심에 나 유신은 너무도 감동했소이다. 신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하니 한번 더 당신의 힘을 빌리고자 하오이다.”

“장군님. 이미 죽고자 각오한 마당에 뭔들 못하겠사옵니까? 장군님의 뜻을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고맙소. 미안하지만 다시 백제로 돌아가서 임자에게 이렇게 전해주시오.”

“어떻게 말입니까?”

“나 유신이 백제 좌평 임자와 만나서 상의할 수 있다면 신라와 백제 간에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수 있을 텐데 그것을 못해서 안타깝다고 전해 주시오.”

“그렇게만 전하면 되겠사옵니까?”

그러자 김유신은 조미곤을 가깝게 오라고 하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신라가 백제에게 망하면 나 김유신을 임자가 보호해주고, 만약 백제가 망하면 임자의 신변은 나 김유신이가 절대적으로 보호하겠다고 말하시오. 그러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오.”

조미곤은 대번에 그 뜻이 뭔지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조미곤은 또다시 백제로 돌아가서 백제 상좌평 임자에게 말했다.

“제가 기왕 (백제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나라의 풍습을 알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십 일 동안 다니면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개와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을 억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돌아 왔습니다.” 임자는 그 말을 믿고 책망하지 않았다.

임자의 태도를 파악한 조미곤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번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전하라고 하면서 저에게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가 없으니, 만일 그대의 나라(백제)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나라(신라)에 의탁하고, 우리나라(신라)가 망하면 내가 그대의 나라(백제)에 의탁하기로 하자’고 말했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듣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사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런 적과 내통한 조미곤은 간첩죄로 처벌했어야 했다. 그러나 백제의 내정 책임자 좌평인 임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엔 그 다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미곤은 황송스러워하며 물러나와 여러 달 동안 처벌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임자가 불러서 물었다.

“네가 지난번에 이야기한 유신의 말이 어떤 것인가?”
조미곤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지난번에 말한 것과 똑같이 대답했다.

임자가 말했다.
“네가 전한 말을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서 알려라.”
그러자 조미곤은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서 백제 좌평 임자의 말을 김유신 장군에게 전했다. 이렇게 백제 최고책임자 중 한사람을 포섭한 김유신은 그 후 적극적으로 백제 공략의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되자 백제 내부에선 백제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충신들의 목소리는 신라에 포섭된 좌평 임자에 의해서 철저히 차단되었다. 그 와중에 백제 의자왕은 나이가 들어서 실제적인 정치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것을 이용해서 왕자들은 좌평 자리를 독차지하게 되자 백제의 귀족과 왕족 사이는 막을 수 없는 알력이 커져갔다. 그래도 충신은 있는 법이었다. 그 충신이 성충과 흥수였다. 백제를 위해서 바른 말을 하는 성충과 흥수는 신라와 내통하고 있던 임자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성충이 죽으면서도 백제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한 말이다.
“필시 신라와 당이 연합해서 백제를 공격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바다로는 ‘기벌포’에 닿지 못하게 하시고, 육상에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이런 성충의 말은 평화로운 시대를 어지럽히는 말로 매도되어 버렸다.
신라는 드디어 백제 공략에 나섰다. 그 중 충신파는 백제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신라의 보기 드문 대병력이 이동한다 하옵니다. 좌평 성충과 흥수가 말한 대로 만약을 대비하여 설사 신라가 우리 백제를 공격한다 하더라도 탄현(현재 대전과 옥천을 연결하는 고개)에 진을 치고 있으면 능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이러자 신라 첩자에 포섭된 좌평 ‘임자’가 는 맞받아쳤다.
“왜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려 그러는 것이요? 신라가 우리 백제를 공격한다는 증거가 있단 말이요? 이렇게 군사 이동하는 것이 어디 한두번 있었던 일이란 말이요? 그리고 우리 백제를 공격한다면 지금 공격하지 왜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단 말이요? 이건 우리 백제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고 고구려에 대항하려는 신라의 속셈이지 백제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너무 호들갑 떨지 마시오.”

“허허. 그러다가 만약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다면 대책이 있소이까?”
실제로 신라군은 백제를 공략할 때 세 갈래 길을 이용했다. 김유신 장군은 백제군을 교란하기 위해 마치 고구려를 칠 것처럼 속이면서 북쪽으로 행군해 갔다. 실제 주력부대는 남쪽길로 우회해 은밀히 백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백제 내부에서는 입씨름만 하고 있었다.

결과는 역사가 증명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세작에 의해 두 번 멸망했다. 백만의 적군보다 내부의 세작 한명이 더 무서운 것이다.

신라에 포섭된 첩자의 공작질의 핵심은 ‘위협’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패망의 지름길이다. 백제는 그렇게 망했다.

신라와 백제의 첩보전만 본다면 마치 오늘날 북한은 신라처럼, 대한민국은 백제처럼 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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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 2017-08-08 23:14:40
전라도 새누리당 이정현이 떠오르네요.
탄핵직후 박쥐원과 기뻐 어쩔줄 모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