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를 상영할지 결정하는 것은 영화관의 판단
어떤 영화를 상영할지 결정하는 것은 영화관의 판단
  • 조희문 영화평론가·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7.08.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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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을 제한하라는 주장은 강제로 규제하자는 것

영화 <군함도> 상영을 계기로 극장(스크린) 독점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처음 상영할 때는 2168개 스크린에서 시작했다. 지난해 연말 기준 전국의 영화관 수는 417개, 스크린 수는 2575개다. 2168개면 전국 스크린의 84%. 숫자로나 비율로나 역대 최고다. 그만큼 영화에 쏠린 관심이 크다는 반증이다. 뒤이어 개봉한 ‘택시운전사’는 1552개 스크린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한때는 외국영화가 스크린(극장)을 독점한다는 비판이 높았지만 최근에는 한국영화들 간의 경쟁이 더 치열하다. 한국영화 중 200억 원대 내외의 대규모 투자로 만들어진 영화가 늘어나면서 스크린(극장) 확보 문제가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2013년 전국 영화관객 2억1335만 명을 기록한 이후 해마다 2억 명을 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덕분에 한국은 국민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가 4.2회를 오르내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 소비국이다.

인구 5000만 시장 크기로는 국내 시장이 좁다고 한탄한 적이 많았지만 국민 한 사람이 평균 몇 회를 보는지에 따라 시장 크기가 줄었다 늘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극장은 한국영화 성장의 공로자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급격한 성장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로 극장의 현대화·고급화를 빼놓을 수 없다. 오랫동안 극장은 스크린을 하나만 갖춘 단관 규모였다. 커다란 스크린을 앞에 두고 아래층, 2층, 3층 관객들이 앞을 집중했다.

 

‘별들의 고향’(1974, 국내 개봉일 기준)을 만든 이장호 감독은 영화가 개봉하던 날, 극장 앞을 지나 종로3가 대로에까지  줄이 이어진 것을 보며 마음이 쿵쾅거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007 위기일발’(1964) ‘정무문’(1973) ‘영자의 전성시대’(1975) ‘취권’(1979) 같은 영화들이 상영될 때 매표소 앞에 긴 줄을 이루던 일은 옛날 풍경이다.

지금은  ‘군함도’나 ‘택시운전사’처럼 같은 영화를 여러 스크린(영화관)에서 상영하기 때문에 내 시간에 맞춰 골라 볼 수 있고, 예매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아 아무리 소문난 영화라도 줄을 서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대신 실시간 중계하듯 관객 숫자를 보여준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통합전산망이 전국의 매표 상황을 전산 집계하고 있는 덕분이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극장이 생긴 것은 1902년 무렵 고종 황제 재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기념 행사장을 공연장으로 바꿔 사용하면서부터다. 이전의 전통 공연은 동네 마당이나 주변의 빈터, 강변 모래밭 같은 곳에서 진행했다. 적당한 장소에 줄타기 받침대나 세우고, 공연을 알리는 깃발이나 세우면 그 곳이 바로 공연장이 되었다. 실내 극장이 없었다는 말이다.

국내에서 처음 영화를 유료 상영한 것은 1903년 6월 23일. 황실기업인 한성전기회사가 발주한 발전소 공사와 전차 선로 설치 공사를 시공하던 미국인 헨리 콜브란이 한성전기회사 공터에다 영사기를 설치하고 영화를 상영한 것이다. 서울 종로5가 동대문 근처에 있던 한성전기회사 발전소는 훗날 전차 차고로도 쓰였다.

하지만 처음 상영 때는 영화관 시설을 따로 갖추지 않은 채 천으로 만든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경하는 수준이었다. 요즘 한강변이나 적당한 장소에 야외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 앞에 의자를 놓거나 돗자리 깔고 앉아서 구경하는 풍경과 비슷했다.

당시 상영 분위기를 묘사한 신문기사를 보면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동대문으로 가는 전차마다 만원이었다고 전한다. 관람객도 1000명이 넘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영화 상영에 쏠린 관심을 읽을 수 있다.

1000여 명 숫자가 지금은 무얼 그리 대단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서울 인구가 20여만 명 정도였고, 입장료(10전)를 내고 온 유료관객이 그만큼이었으니 당시로서는 뉴스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상영장이 야외였던 탓에 영화 상영은 저녁 8시부터 시작되었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으면 상영을 할 수 없었다.

극장은 근대문화의 상징

자연 날씨에 따라 상영 여부가 달라지는 판이니 그런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내 상영관을 만들 필요가 생겼다. 1903년에 시작한 동대문 한성전기회사의 영화 상영은 1905년 무렵부터 실내 설비를 갖추는 작업을 시작했고, 1909년에는 을지로로 장소를 옮기고 실내 상영 설비를 갖춘 ‘광무대’ 극장으로 간판을 달았다.

 

1907년에는 단성사 극장이 등장했고 장안사나 황금관, 고등연예관 같은 극장들이 2-3년의 시차를 두고 뒤따라 세워졌다. 1910년 무렵에는 서울 시내에 10여 곳 정도의 극장이 등장했다.

소유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공연장으로 시작한 각 극장에는 프로그램에 따라 영화도 상영했고, 강연이나 무대 공연도 했다. 장소 명칭도 연사(演社) 연희장(演戱場), 공연장(公演場), 상설관(常設館), 극장(劇場) 등으로 불렸다. 해방 이후에도 극장에서 영화도 하고 악극단이나 가수들의 공연도 하는 일이 흔했다.

초기에는 공연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꾸몄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의 인기가 공연을 앞지르자 공연장의 프로그램은 영화가 주도했다. 그래도 명칭은 ‘극장’이 대세였다. ‘극장 구경’이라는 말은 ‘영화 보러 간다’는 뜻으로 통했다.

극장의 등장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어두운 실내로 장소가 바뀌었고, 날씨에 상관없이 공연이 가능해졌다. 구경에 몸이 단 청춘 남녀들도 몰려들었다. 극장은 대중문화의 풍경을 만든 중심이었지만 바라보는 눈길은 불편했다.

초기에는 돈 내고 영화나 공연을 보는 관객을 남녀 불문하고 할 일 없는 건달이거나 바람둥이 취급을 했다. 한국을 식민통치 하던 일제는 무조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경계하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특히 무성영화 시절 영화를 설명하던 변사의 행동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이 극장 내에서 일일이 지켜보곤 했다. 옛날 극장 시절 뒤쪽 출입구 근처에 따로 있었던 임검석(臨檢席)은 바로 장내를 감시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후에는 주먹패 건달들의 근거지 역할도 했다. 사업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극장은 사람들이 넘치고 현금 수입이 보장되는 중요한 사업장이었다. 극장을 차지하는 조직이 자금줄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북청년단을 이끌었던 이화룡이 명동 극장을 장악했고 김두한은 우미관을 근거지로 삼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흥행이 잘되는 극장 주변에는 건달들이 어른거렸고, 어딘가 음침하고 외설스러운 장소라는 느낌이 일반화되었다.

실제로 50~60년대 극장 건물은 구조적으로 미비하고, 위생 상태도 허술한 경우가 많았다. 화장실 냄새가 장내로 번지는 곳도 있었고, 좌석 밑으로 쥐나 벌레가 다니는 일도 흔했다.

좌석 배치 경사도가 낮은 탓에 앞자리에 덩치 큰 사람이 앉기라도 하면 뒷줄의 관객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야 하고, 그것이 다시 그 다음 줄의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극장은 불온하고 위험한 곳이란 인상이 굳어졌다. 중·고교생들이 교복을 입던 시절, 단속 대상으로 감시하던 풍경은 그 연장이다.

그런 극장이 지금은 멀티플렉스로 바뀌었고, 쾌적한 문화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영화를 상영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영화관의 선택 사항이다. 영화관의 특정 영화 상영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공(정부)가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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