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을 뛰어넘은 행정의 달인 김사형
정도전을 뛰어넘은 행정의 달인 김사형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08.16 16: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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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조선초 정승을 열거할 때 조준(趙浚), 하륜(河崙)은 알아도 김사형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태조 정권 내내 최고 실권자인 좌의정 혹은 좌정승이 조준이었다면 그와 보조를 맞춰 내내 우의정 혹은 우정승으로 있었던 인물이 김사형이다.

흔히 3정승이라고 하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인데 일반적으로 셋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실력자는 영의정이 아니라 좌의정이다.

시대에 따라 혹은 임금에 따라 아주 드물게 영의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실권은 좌의정에게 있었던 것이 조선 시대 대부분의 시기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정치를 살필 때 좌의정이 누구인지부터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고려 때의 명장군이자 충신으로 문무(文武)를 함께 갖췄던 재상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여말선초의 명문세가 출신이다.

경세가들에 소홀한 역사학계

사형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조준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이 때 맺은 교분으로 그의 정치 노선은 단 한 번도 조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조준을 섬긴 때문이 아니라 조준의 노선이 옳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1407년(태종7년) 7월 30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善始令終)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그는 무엇보다 관리로서의 능력[吏才]이 출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맹점은 이처럼 이재(吏才)가 뛰어났던 경세가들을 소홀히 한다. 그저 책이라도 남기면 그것을 갖고 일방적으로 높이는 경향을 보인다. 학재(學才)만 높이는 편향성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황희나 김사형처럼 행정실무 능력이 특출나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베푼 이들에 대한 평가에는 인색하다.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서 하나 찾아보기 힘든 것이 그 반증이다.

정도전(鄭道傳)에 대한 우리 학계의 과도한 평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도전의 경우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내세웠다거나 재상 중심의 정치를 역설했다는 점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재상, 즉 정승에 오르지 못했다. 왜 태조는 정도전을 그렇게 아끼면서도 그를 정승의 반열에 올리지 않은 것일까?

물론 조선이 건국되고 정도전이 맡았던 직함을 보면 화려하다. 개국 1등 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사(判戶曹事), 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그럼에도 정작 정승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정도전은 왜 정승에 오르지 못했을까

사실 정도전은 누구보다 정승이 되고 싶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 직전까지 이르렀었다. 태조 4년(1395년) 12월 20일 <태조실록>의 짧은 기사를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삼사판사 정도전에게 각각 칼 한 자루씩을 주었다.”
삼사판사, 훗날의 호조판서에 가까운 이 자리가 정도전이 가장 높이 올라간 관직이다. 그런데 왜? 일차적으로는 조준의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김사형이 우의정 자리를 누구보다 잘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좌의정도 우의정을 거쳐야 올라갈 수 있는데 업무 능력에서 정도전은 결국 김사형 이상의 신뢰도를 태조 이성계에게 심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임금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지만 훗날 형 정종을 물러나게 하고 태종이 직접 왕위에 오르게 될 때 이성계는 체념한 듯 이렇게 말했다.

“방원은 강명(剛明)하니 권세가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이성계도 정도전의 남용에 가까운 권력 행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발언이다. 반면에 사형은 무엇보다 업무 능력이 뛰어났고 자신의 한계를 넘지 않았다. 실록의 평가다.

“젊어서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1392년) 가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대신을 나누어 보내 각 지방을 전제(專制)하게 하였을 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 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가 되어 부내(部內)를 잘 다스렸다.

경오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고 조금 뒤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대헌(臺憲)에 있은 지 1년이 넘었는데 조정이 숙연(肅然)해졌다.”

좌의정 조준-우의정 김사형, 환상의 콤비

탁월한 실무능력과 분수를 아는 처신은 그를 우정승에 그치게 하지 않았다. 조준과 김사형의 관계를 실록은 이렇게 압축해서 정리하고 있다.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國政)을 전단(專斷)하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廟堂)을 진압했다.”

흔히 말하는 환상의 콤비였던 셈이다. 그래서 태종 초에는 드디어 좌정승에 오른다. 이미 왕권 중심의 정치를 구상하고 있던 태종으로서는 모든 것이 불안정할 때 김사형의 지혜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1년 반 만에 태종의 최측근인 하륜에게 좌정승 자리를 넘긴다.

그러나 개국 과정이나 1차 왕자의 난 때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김사형의 정치적 약점이 됐다. 태종10년(1410년) 7월 12일 태조를 종묘에 모시면서 배향공신을 토의하는데 이 때 김사형은 배향공신에 오르지 못한다. 그 날의 장면으로 들어가보자.

김사형(金士衡)의 배향 여부에 대해 태종이 하륜에게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임금이 신하에게 물으면 신하는 감히 바르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사형은 공이 없으니 배향함이 마땅치 않습니다.”
의정부에서도 아뢰었다.

“김사형은 가문이 귀하고 현달하며 심지(心地)가 청고(淸高)하기 때문에 태조께서 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본래 개국(開國)의 모획(謀劃)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또 모든 처치(處置)를 한결같이 조준(趙浚)만 따르고 가타 부타 하는 일이 없었으니 배향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배향되지 않았다. 조준만 배향공신에 올랐다.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옥왕리에 있는 김사형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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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공부 2018-06-05 22:29:31
정도전만 있는줄 알았는데 김사형도 있었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