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재건은 사회통합이념 개발부터”
“보수 재건은 사회통합이념 개발부터”
  • 양승함 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17.08.1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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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보수주의 패러다임의 재형성해야

여의도연구원·바른사회시민회의 연속토론회

보수의 가치와 정당의 재건을 위해서는 개혁적 중도 보수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의 보수는 경직화, 우경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중도 쪽으로의 이동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위성과 타당성을 지닌다. 패권적 계파 갈등으로 얼룩진 보수정당의 쇄신 노력도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보수 가치의 막연한 중도화가 진정한 대안인지에 대한 논리성에 한계가 있다. 2012년 대선에서 이미 정략적 중도화(좌클릭)를 통해 승리한 새누리당의 경험 때문에 현재의 중도화 개혁이 설득력이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보수 가치의 재정립 즉 보수주의 패러다임의 변화 없이는 일시적 임의적 개혁 노력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에 뿌리 깊은 권력지향적 계파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도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 '자유한국당, 혁신 가능할까?'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왼쪽)이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혁신선언문을 발표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영호 혁신위원. / 연합

자유한국당의 이념적 정체성을 회복하여 당의 단합과 정치 투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게 대두되고 있다. 보수의 위기는 좌파세력의 준동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수도 죄파와 같이 이념적으로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여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를 위해 성공국가를 건설한 산업화 세력의 공헌을 높이 받들고 개인적 정치이익에만 함몰된 ‘철학 없는’ 정치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경보수 재건론은 분열과 배제의 정치를 확대 재생산하고 미래지향적 정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수의 정통성과 적통성을 회복하려는 논리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실패’에서 이미 경험적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이러한 처방은 그동안 보수 진영을 이탈했거나 방황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을 더 소외시킬 것이며 보수의 분열과 축소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오히려 다당제 체제 하에서 자유한국당을 극우정당으로 제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한국 보수 패러다임의 왜곡

기존의 한국 보수의 패러다임은 한국적 정치 현실과 분단의 역사로 인해 보수주의 본류로부터 왜곡되어 정착하게 되었다. 한국 보수주의는 산업화 시대의 개발국가에 가치를 두는 국가주의적 보수와 세계화 조류와 함께 하는 신자유주의적 보수가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적 보수는 국가와 성장 제일주의의 권위주의적 요소를 지닌 반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적 보수는 시장과 개인 우선주의로서 반국가주의적 고전적 자유주의를 현대화시킨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모순된 보수 이념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념적 논리보다 정치논리에 따라서 동원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보수의 불편한 동거는 1990년 3당합당으로 보수대연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서 국가주의 보수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산업화 시대로의 복고정치가 시작되었고 보수의 분열이 표면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보수의 재건은 보수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온전한 궤도에 올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가주의적 또는 왕정 복고식의 보수주의는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극우 성향을 띠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서 이미 그 폐단이 드러난 바 있다. 자본주의 4.0에서 논의되고 있듯이 인도적 자본주의가 미래 방향이다.

서구의 보수주의는 오래 전부터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 한국은 사회 발전과 민주주의 공고화에 따라 국가주의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적실성을 상실했으며 신자유주의도 소득의 양극화와 계층의 구조화 심화로 그 당위성이 손상되었다. 한국의 보수 패러다임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시대적 상황에 처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보수-진보-보수-진보의 정권으로 이념적 교차 진동을 해왔다. 현재까지 대체로 10년 주기로 이념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것으로 보아서 아무리 보수가 몰락해도 10년 후에는 재집권하겠지 하고 안주하면 보수는 더 몰락할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더 분열되거나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다른 보수정당이 대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보수의 위기는 보수정당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보수 전체의 위기이다.

따라서 보수주의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보수주의가 극단화와 경직화되는 경향을 막고 아울러 신자유주의적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한국적 보수주의 패러다임을 건설해야 한다. 기존의 한국 보수주의는 서구의 보수주의 아이디어만 수입했을 뿐이고 실제 실행에 있어서는 권위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보수의 부정적 요소만이 부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하나의 결정적 실수는 시대 변화에 따라 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적으로 전개되면서 사상 초유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환골탈태의 변화를 위해 보수주의의 본래 가치에 충실하면서 한국의 현실을 치유하고 국민정서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발해야 한다. 그것은 실용주의에 입각한 온정적 보수주의에서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전통에서 지혜를 찾는 현명함

보수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보존을 위한 욕구’로서 전통의 덕목, 관습과 제도에 대한 존중이다. 영국과 미국의 보수주의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97)의 ‘보존을 위한 변화’(change in order to conserve)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19세기 서구 보수주의는 개혁을 반대하는 전제적 반동적 보수주의로부터 ‘하나의 국가’(One Nation)라는 온정주의적 기치 아래 사회개혁을 포용하는 개혁적 보수주의로 전환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영국의 보수당은 케인즈적 사회민주주의(Keynsian social democracy)의 변형을 수용했으나, 1970년대에 그 실패 현상이 나타나고 뉴라이트(New Right)운동이 일어나 1980년대 영국은 대처리즘(Thatcherism), 미국은 레이건이즘(Reganism)이 등장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나자 영국 보수당은 중도 노선으로 변화해 2010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한국 보수가 보존해야 할 전통적 가치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논란의 여지는 많지만 그 중 하나가 헌법적 가치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즉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인데 이것이 현실적인 적용 과정에서 상당히 왜곡되어 나타나게 됨으로써 오늘날 보수 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보수가 권위주의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진전되면 될수록 그 정통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이라 함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의미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시험된 제도와 관습을 의미한다.

한국의 보수가 지켜야 할 전통적 가치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은 급격한 변화와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한말 일본 식민주의에 의한 국가의 단절, 해방 후 분단과 정부 수립, 남북 상잔의 6·25전쟁,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 등은 전통적 가치와 경험을 유지 발전시키는 데 장애 요인이 되었다.

역사의 지속적 단절과 전통적 가치의 부재로 인해 보수든 진보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회통합이념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반공이 유일하게 보수 진영의 일관된 가치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으나 이 또한 국가주의적 보수가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슬로건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진보, 보수 모두가 합의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사회통합이념으로서 기능한다. 미국 보수와 진보는 오로지 이를 어떻게 잘 실현할 것인가의 방법론만 가지고 논쟁 방법도 실용주의적으로 하고 있다. 한국은 사회통합이념의 부재로 인해 이념논쟁은 체재논쟁에서부터 정책논쟁에 이르기까지 사활을 건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념적 대립이 첨예화되면 될수록 보수가 전유할 전통적 가치는 정통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보수를 재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사회통합이념을 개발하는 것이 될 것이며 여의치 않으면 그에 근접하는 이념이라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국민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전통적 가치를 개발하고 체계화시킴으로써 보수 재건이 가능하다. 이것도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개혁적 보수의 의지를 가지고 중도화를 모색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보수가 전통을 존중하는 이유는 국민들에게 사회적 역사적 소속감을 제공함으로써 안정과 안전을 증진시키는 덕목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부인하거나 좌파 색깔론과 음모론을 주장한다면 그동안 확립되어온 헌법적 제도를 부정함으로써 사회적 불안정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결국 보수의 우경화 내지 극우화의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보수가 추구하는 전통의 보존 가치를 스스로 파괴하는 모순을 범하게 될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전통 가치를 모두 포용할 때만이 미래 세대를 위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그들로부터 지지받을 것이다.

실용주의 해법의 중요성

보수주의가 추구하는 문제 해결 방법은 실용주의이다. 실용주의는 역사와 경험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성이 있는 목표와 방법을 설정해야 한다는 믿음과 태도이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추상적인 원칙이나 사상체계를 배격한다. 보수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 하나의 마음의 상태 또는 생활에 대한 접근방법이라고 표현하기를 원한다.

보수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비판적이기 때문에 실용주의적 접근방법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이며, 의존적이고 안전 추구욕이 강하고 권력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질서 유지를 위해 강한 국가, 엄격한 법 적용과 강한 징벌을 강조한다.

한국의 보수는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념적으로 경직화되고 교조화되어 가고 있다. 과거에는 진보세력들이 그러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전략적 융통성을 발휘하여 탈바꿈하려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4·13총선 과정에서 중도 쪽으로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문재인 정부는 탈권위주의적 소통 행태에서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국가주의 리더십은 좌파뿐만이 아니라 보수세력 내에서의 비박계 인사들에게 까지도 불포용 무관용 원칙을 적용했다.

한국 보수의 경직화와 우경화는 진보세력과의 대결보다도 자체 내의 분열과 배제의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구별해야

보수주의는 ‘위로부터’ 권위가 행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식, 경험, 교육 등이 부족한 대중들을 위해서 리더십은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권위와 리더십은 경험과 훈련에 의해서 길러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 유기체론과 위계질서론에서 비롯된다.

사회는 가족, 지역사회, 국가 등이 공통된 문화와 가치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으며 사회적 위치나 지위는 자연스럽게 계층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화로운 사회 유지를 위해 상호 호혜적인 책임과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며 그것은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권위보다 권위주의에 천착되어 있다. 정부 수립에서부터 산업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가 오늘날 보수주의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권력 남용과 지대 추구(rent-seeking)의 국가주의를 탄생시켰다.

오래 동안 권력을 장악해 온 보수는 보수의 중요 가치인 법치주의를 통한 강한 국가를 만들기 보다는 폭력 사용을 통해 강한 국가를 만들어 왔으며 스스로 법치를 위반하는 행태를 자행해 왔다.

권위와 권력은 다른 것이다. 권위는 국민들이 권력을 행사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내면적으로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국정농단을 하면 권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권위주의는 일반적으로 권력을 남용하며 주로 지대 추구 형태로 자행됨으로써 정경유착의 결과를 초래한다. 정경유착은 한국 보수주의의 대표적 폐단이며 보수주의의 원천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또 하나의 폐단은 마땅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력 남용에 대한 무책임은 물론이고 지대 추구에 대해서도 당연한 관행처럼 인식한다. 보수주의의 근본 가치인 상호 호혜적인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몰인식하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 새누리당의 실패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오로지 좌파의 음모와 기울어진 운동장 탓만을 하고 있다. 보수의 몰락은 근본적으로 권위의 도덕적 타락에서 비롯되었다. 권력 남용, 부정부패, 무책임성이 기득권층의 상징처럼 되어 온 것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국민적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흙수저-금수저 논쟁에서 나타나듯이 기득권층은 오랜 세월 특혜만 누려왔을 뿐 보수의 중요 가치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사회적 계층화가 구조화되어 사회적 이동성이 고착되면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19세기 영국의 현명한 보수주의자들의 예언이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회계층의 구조화가 되면 될수록 보수의 위기도 구조화될 수 있다는 가설을 수용하는 차원에서 보수 개혁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재산의 사회적 책임을 각성하는 보수

보수주의에 있어서 재산은 사활적 가치이다. 재산은 개인의 자유와 안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재산 소유의 상태가 개성의 외적 표현이라고 할 정도로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재산 소유권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재산도 중요하며 재산 소유권 보호를 위해 법치주의를 존중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재산 소유권 행사에는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수반된다.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을 받든 앞으로 획득할 재산이든 간에 소유자는 단순한 관리자(custodians)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에서는 재산의 사회적 의미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 워싱턴대 정치학 박사 /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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