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업원은 선량한 시민, 기업가는 세상의 악, 영화에 비친 노동 현장
종업원은 선량한 시민, 기업가는 세상의 악, 영화에 비친 노동 현장
  • 조희문 영화평론가·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7.09.1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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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의 영화로 보는 세상

한국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업(가)들은 인민의 철천지 원수 같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자세히 소개된 적이 없는데 비해 태어나면서부터 나쁜 짓만 하고, 탐욕스런 흉계를 꾸미느라 날밤을 새우고, 사회 공헌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존재로 그리기 때문이다.

외국영화도 그 점에서는 오랜 역사가 있는데, 독일영화 <메트로폴리스>(1927)나 미국영화 <모던타임스>(1936)는 산업화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얼마나 궁핍하고 비인간화 하는 지를 그리면서 기업가(자본가)의 탐욕을 시대의 악으로 설정한다.

한국영화 <마부>(1961)는 기업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고전적인 모습으로 보여준다. 일찍이 아내와 사별한 ‘아버지’는 아들 둘과 딸 둘 4남매를 갖은 고생 끝에 키워왔다.

아버지의 직업은 마부. 말수레로 짐을 나르는 화물운송이 주로 하는 일이다. 요즘으로 치면 화물용달차 기사인 셈인데, 배운 것 없고 기본 밑천이 없는 처지에 그나마라도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

없는 살림에 하루하루를 넘기는 일이 아슬아슬하지만 일감이라도 꾸준하기를 바란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이 놀라서 요동치는 바람에 마부는 수레바퀴에 깔려 큰 부상을 당하고,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

말 주인은 다른 사람에게 일거리를 넘겨야 한다며 아예 말을 끌고 가 버린다. 사고도 말 주인이 자동차를 험하게 몰다가 가까이 있던 말이 놀라서 생긴 일이어서 다친 사람을 보살펴야 하는 것이 당연할 터이지만, 오히려 일을 못하게 되었으니 말까지 일 안하게 둘 수 없다며 끌고 가버리니 아득할 따름이다.

말수레로 화물을 옮기는 일을 요즘의 기업 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어서 기업의 행태라고는 하기 어렵고, 소박한 수준에서 부자와 가난한 머슴 사이에서 벌어지는 설움의 애환이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돈 많은 주인(자본가)은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힘없고 돈 없는 가난한 이웃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악인으로 설정하고, 다수의 서민은 착하고 마음씨 좋은 희생자로 설정하는 것은 공산혁명기의 러시아 선전영화들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들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설정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박서방>(1960)은 회사에 취직하여 일을 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 박서방은 그저 마음씨 좋은 동네 이웃이지만 큰 아들은 제약회사 다니고, 작은 딸은 항공사 직원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큰 자랑거리이자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다.

큰 아들이 해외지사 발령을 받아 현지로 떠나는 일은 위대한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출동하는 것 같은 비장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온가족이 김포공항 환송대에서 비행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운 장도를 기원한다.

<아리비아의 열풍>(1976)은 중동 건설이 한창이던 시절, 사막의 공사 현장에서 토목공사를 진행하는 기업인들의 열정을 젊은이들의 로맨스와 엮은 경우다. 중동의 뜨거운 사막에서 한국 근로자들이 역사(役事)를 이뤄가는 모습은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국민적 자부심이 진하게 배어난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업에 대한 이미지는 특별히 기울지 않았다. 성공의 상징이자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표상처럼 통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지금과는 달리 한국경제가 극히 빈약한 수준이었고, 이렇다 할 기업도 드물 때였다.

▲ <파업전야> < 또 하나의 약속>

<구로아리랑>은 제도권 노동영화의 시작

제도권 영화 중에서 노동 현장에 접근한 영화는 <구로아리랑>(1989)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 구로공단 입주업체인 오트론전자의 상황을 모델로 한 이 영화는 노조 결성을 둘러싸고 생산직 직원과 회사 측 임원들의 대립과 충돌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바라보는 생산 현장은 철저하게 차별과 억압, 저임금이 억누르는 절망의 공간이다. 그 속에 갇혀 있는 종업원들은 인간이 아니라 생산설비 라인의 부품 같은 존재들이다. 고장 나면 교체할 것이고, 취업을 희망하는 지원자들은 줄지어 있는 상태여서 한두 명 잘라낸다고 제품 생산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에 비해 종업원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기는 회사 사장이나 임원들은 오로지 돈만을 좇는 악귀들처럼 묘사한다. 생산량 달성을 위해 종업원들을 무지막지하게 몰아대고, 노조 결성을 막기 위해 온갖 파괴공작을 벌인다. 필요하다면 종업원들을 회유하거나 겁박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다 종업원들의 근로환경을 보살펴야 하는 근로감독관이나 시위 진압에 나서는 경찰은 악덕업주를 비호하는 악의 무리로 본다. 소수의 연약한 절대 선과 거대하고 조직적인 절대 악이  맞서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냐는 주장이다.

기업이 악덕 업주의 탐욕과 수탈의 결집체인 것처럼 묘사하는 시각은 운동권 영화로 이어지는데, 영화집단 장산곶매는 <파업전야>(1990)를 들고 나왔다. 중소 규모의 어느 금속 공장에서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며 노조 결성 움직임을 보이는 종업원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회사 측 간부들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운동권 성향의 영화였던 탓에 종업원들은 무제한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인데 비해 기업주나 그 주변에서 충성하는 간부들은 종업원들의 피와 땀을 빼앗아 호의호식하는 ‘인민의 적’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1980년대에 민주화 분위기가 사회 곳곳에 퍼져나가면서 각급 공장은 노동운동의 치열한 현장으로 변했고, 운동가들은 위장 취업 등으로 현장에 들어가 종업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일을 시대의 과업처럼 여겼다.

<파업전야>는 그 흐름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라고 봐도 무방하다. 장산곶매가 만든 첫 장편 <오! 꿈의 나라>에 이어 두 번째 만든 영화이지만 정상적인 상영을 할 수 없는 비제도권 영화였다.

당시는 특정 영화가 극장 상영을 통한 일반 공개를 하기 위해서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했는데, 이 영화는 심의 대상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대학가를 통해 게릴라 식 상영 시도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단속 경찰과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은 그 같은 세상에 분신으로 저항한 전태일을 노동 영웅, 시대의 횃불인 것처럼 묘사한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실제 인물 전태일에 대하여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바탕으로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이 영화는 1960-70년대 청계천 주변의 피복,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얼마나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영화로 재현한 것이어서 곳곳에 사실과 다른 부분을 넣기도 하고, 전태일이 노동운동가들의 조직적 훈련에 의하여 양성된 부분에 대하여는 생략하거나 배제하고, 오직 자의식의 계발에 의한 자생적 노동운동가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영화에서도 <구로아리랑>과 마찬가지로 생산 현장의 종업원들을 편들어 주는 곳은 없고, 근로감독 관청이나 경찰은 오히려 그들을 감시하고 유린하는 존재로 비친다. 운동권 분야에서 노동영웅으로 설정되어 있는 전태일을 영화적 영웅으로 만들려 했던 경우로 꼽힌다.

▲ <미스터 컴퍼니> <모래가 흐르는 강>

기업 규모 커질수록 적대감도 커져

한국경제 규모가 커지고, 기업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과 함께 그런 기업들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려는 영화도 함께 등장한다.

<모래가 흐르는 강>(2013)은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진행된 영주댐 건설로 인해 환경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를 고발하듯 읊조린다.

영화를 만든 인물은 ‘천성산 도룡농’으로 유명한 여승 지율. 4대강 사업이 얼마나 환경을 파괴하는지, 공사에 참여한 기업들이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서슴지 않는 극악한 집단이라는 주장을 나열한다.

<내성천, 물위에 쓰는 편지>(2014)는 <모래가 흐르는 강>의 연작 또는 2부.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지역 내에 살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무게를 싣는다.

<또 하나의 약속>(2014)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여성 종업원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고 있다. 강원도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상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이다.

딸이 대기업 회사에 취업하게 되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 한다.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는 설렘으로 딸과 헤어져 사는 것도 기쁜 마음으로 감수한다. 그런데 그 딸이 2년 쯤 만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며 환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시름시름 잃다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저 아파서 그러려니 했건만 사실을 알아볼수록 사정이 달라졌다. 같이 일하다 아프게 된 직원이 여러 명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공장의 어떤 요소가 그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종업원 측과 회사 측 간의 공방이 벌어진다.

이 영화는 영화적 가상이 아니라 삼성전자라는 특정 기업을 지목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열한가를 나열한다. 영화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설정하지만 관련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여론에서도 이를 거듭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가 특정 대기업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카트>(2014)는 국내의 대표적인 양판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종업원들이 회사의 구조조정, 외주화 등의 과정에서 해고되고, 복직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으로 조직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는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계약직 직원들. 아르바이트 일거리가 아니라 절실하게 한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사정에 있는 것은 서로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갑자기 닥치는 일괄 재계약 단절. 세상이 암담해진다.

이 영화도 각 캐릭터의 사정을 강조함으로써 회사 측의 횡포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부각한다. 계약직 직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영화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종업원과 회사의 관계를  선악의 대립 구도로 설정하는 것은 여전하다.

<베테랑>(2015)은 악덕 기업가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최근작에 든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적은 공산당도 아니고 깡패도 아니며, 종업원들의 피땀을 밟으며 이익만을 챙기는 망나니 같은 재벌 일파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기업 ‘신진물산’의 대표 조태오는 안하무인으로 세상을 종횡한다.

마약을 비롯한 탈법, 불법 행동들에 거침이 없다. 화물트럭 운전기사 자살시도 사건이 광역수사대 서도철 형사에게 포착된다. 조태오를 응징하는 과정에서 온갖 악행이 드러난다.  영화는 조태오를 ‘처단’하는 과정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야 시대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이례적으로 <미스터 컴퍼니>(2012)는 회사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이상이 현실에서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오르그닷’이라는 패션회사는 패션업계의 비윤리적인 생태를 바꾸겠다며 의기투합한 젊은이들이 야심차게 설립한 회사. 의지는 원대했지만 현실은 야속하다.

정당한 노동 임금을 지불하고 제품을 생산하면 더 나은 사회가 될 것 같았는데, 비정한 시장경제는 그들의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고 회사의 부채는 쌓여만 간다.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매일 밥 먹듯 야근을 하는 동안 점점 의욕은 사그라진다. 어떤 대책을 세워야 고비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흔히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하지만, 여러 편을 연결하여 보면 나름의 흐름이 보인다. 기업(가)은 악의 대리인이거나 악 그 자체인 것처럼 설정한다. 한편으로 보면 기업의 존재나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겠지만 그럴수록 적대감도 커지는 듯하다. 대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은 자랑하듯 사용하면서 그 기업에 대해서는 적대하는 이중적 행태는 불가사의 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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