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한국

종교개혁자 루터가 한국에 지금 온다면?

[종교개혁 500주년] 이종윤 미래한국 상임고문l승인2017.10.08l수정2017.10.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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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윤 미래한국 상임고문  webmaster@futurekorea.co.kr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이를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32:7) 500년전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의 유산을 받은 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장대한 발전과 성장을 이뤄 왔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을 감사할 뿐 아니라 역사 인식을 바르게 함으로 성경적 기독교를 이 땅에 심는 일에 진력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 우리는 그 역사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역사의식은 고난속에서 생겨난다

500년 전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대의 유럽 사회는 매우 종교적인 시대였으나 도덕과 교리는 타락해 공허한 시대였다. 근대 한국은 종교생활에서 심각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오래 전에 전성했던 선도(仙道)나 불교와 유교의 내적 역량과 정신이 고갈되고 그 형식과 명분만으로 의례를 반복하던 한국은 종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에서 전례 없는 진공기를 경과하고 있었다.

한국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를 뿌린 단기 선교사 귀즈라프는 “한국 사람은 매우 비종교적 성품을 가진 것 같다. 생사에 대해서 위로를 줄 구원교리에 접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1805년 전에 충남 원산도에 첫발을 딛고 말했다. 이러한 냉담이야말로 이들의 정신적 무감각을 보여 주며 그러나 이들에게 기독교가 전혀 근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종교의 부재와 국내외 정세의 혼란과 급변이 여기 곁들여 있었다. 일본의 마수를 비롯해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와 같은 구미 각국과 수호조약을 맺어 은둔의 나라 한국이 힘없이 깨져 나가고 있었다.

예수교와 천주교는 근원이 같다 하지만 예수교는 천주교와 달리 정교분리 원칙을 지켜 정치에 관여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이해가 있었다.

1884년 7월 일본에 머물던 선교사 로버트 맥레이(Maclay)가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한국에 병원과 학교사업을 해도 좋다’는 사사로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서울에 학교 설립을 요청했으나 영어, 기하학, 서양과학을 가르친다는 설립 목적을 ‘왕의 신민들에게 미국인이 교육한다는 것은 마땅한 것이 아니’라면서 거절했다.

사회봉사 포기는 교회 포기

그러나 기독교는 성육신적 현존의 선교정책 때문에 선교자유를 먼저 찾지 않았다. 함께 살고 사랑해서 뭔가 남겨져 그 선교 자유가 부여된 것이었다. 인간적 헌신과 조국애와 사회정의의 구현, 갱생한 하나 하나의 민족 성원으로 새로운 인간상을 확립하고 보여준 행적들, 이러한 발걸음과 그 자국들에 저절로 선교자유의 윤허를 촉진하는 소리들이 높아갔고, 그것이 마침내 이 땅에 복음의 깃발을 드높이게 한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중세의 종교개혁자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말씀 선포’로 찾았다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를 ‘사회봉사’(디아코니아)에서 찾았다. 개혁자들은 중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예배 그리고 생활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유럽 사회를 비롯 전세계에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 줬다.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삼위일체론에서 찾았다. 성부 하나님의 자기를 주는 아가페 사랑과 성자 예수님의 섬김(디아코니아)을 따르는 행위와 성령 하나님의 감화와 교제 참여케 하시는 행위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회봉사는 부수적 기능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기능에 속한다 했다.

그러므로 사회봉사를 포기하면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민주주의 터를 놓았고 자본주의가 그로부터 나왔다고 베버가 주장했다. 고아원, 양로원을 세우고 구제헌금을 하여 복지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농업, 천문학, 의학, 교육을 제네바대학을 설립해 가르치고 시행했다.  사회사업과 달리 선택과목이 아니라 사회봉사는 구원받은 공동체로서 자기를 주는 본질적 헌신이라 했다.

초기 입국한 선교사들과 네비우스 정책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제물포에 상륙한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의 기점이 되었다. 선교사의 직함으로 내한한 이들은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 한 달 후엔 감리교의 W, 스크랜튼이 그의 모친과 함께 입국했다.

1884년 6월 27일 맥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간곡한 선교 요청 서한을 받은 고종은 “조선에서 선교부가 병원과 학교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고종이 허락을 내리면서 ‘그것이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여야 한다는 다짐까지 했다’는 윤치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미국 공사관의 부속 의사로 입국한 알렌은 당분간 선교사 직책과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곧 우정국 사건 시 개화세력의 칼에 맞았던 보수계의 민영익이 탁월한 서양의술을 발휘한 알렌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자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왕실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알렌은 왕실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1885년 4월 14일 광혜원이라는 병원 설립 허가를 받았다. 광혜원 설립 12일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언더우드는 제중원의 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이 광혜원은 후일 연세대학교 의료원(세브란스)의 전신이다.

개국이 되자 장로교, 감리교를 비롯해서 여러 나라들이 새 선교지 한국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국교회 내의 간헐적인 수난도 끊이지 않았고 선교사들은 뚜렷한 선교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경쟁을 피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중국에서 선교하던 존 네비우스 선교사를 청빙해 한국 선교 원칙을 제공받았다. 그 정책은 하류층 선교 대상 설정과 자립, 자율, 자급의 시행원칙의 두 축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교회는 자랑스런 교회가 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1년만에 대승하고 우리나라 국모 민비가 자신의 침전에서 시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종의 하루하루는 공포와 전율이 계속되고 있을 때 마침내 “어이 거기 밖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있느냐, 야소교인들 있느냐”며 고종은 부르짖었다.

기독교가 이 나라가 붙잡아야 할 기둥이 되었고 버팀목이 된 것이다. 교회는 창궐하는 괴질을 치유하는 일에 앞장섰고, 백성이 해방되어 호적을 갖게 되고, 세브란스 의학생이 되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 무당 미신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무지한 백성들의 눈을 뜨게 했다.

애국과 문화운동

한국교회의 애국의 용단과 행동은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서 구체화 되었다.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던 날, 백성들은 비통에 빠졌고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민영환은 자결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사수국권’이라 쓴 경고문을 종로 네거리에 계시하고 통렬한 구국 연설을 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일경의 칼에 부상을 입고 감금되었다. 일제는 반일 저항의 거점이 한국교회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정치화에 대해 선교사들은 우려했다. 장로교의 게일 선교사는 애국청년들이 교회로 몰려와 신앙보다는 애국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잘못된 교회의 방향에 대해 위조애국을 비판하면서 자결·신체장애·허황한 맹세·게릴라의거·냉혹·무정의 저항을 비판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애국심을 비판하기보다 그 방법이 비성경적임을 비판해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바로 잡아 줬다.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의 글에 문명과 부강의 새시대를 열어 갈 수 있는 생각은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구원도 기독교에서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공언을 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 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며, 교회가 있는 곳마다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만세운동이 있던 곳마다 교회가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애국하는 교회였다.

문서와 문예활동의 시작은 1889년 10월 정동 언더우드 집에서 ‘한국선교서회’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기독교 관련 서적들이 성경을 비롯해 예외 없이 서민층이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출판되어 최현배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거룩한 뜻이 여기서 실현되었다”고 했다.

한글도 글이라는 인식을 한국인에게 심어준 것도 기독교회였다. 1892년의〈찬미가〉1894년〈찬양가〉1908년〈찬송가〉가 모두 한글로 되었다. 독립신문이나 그리스도신문(1897)도 한글로 출판되었다. 선교사들의 한글 연구가 왕성해 한글 문법책, 한영사전, 한국관계 동서문헌수집, 한국서지학의 금자탑을 세운 이들이 모두 선교사였다.

민주주의 정신함양, 한국가요, 분묘, 사회, 경제, 화폐, 신분제, 문화, 정치를 비롯 종교, 생활, 지력(地歷), 질병, 건축, 인종학, 상역(商易), 항해, 주선(舟船)등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개화를 시킨 것이 기독교였다.

사회변화에 직면한 교회와 그 반응

3.1독립운동 이후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퍼져서 교회는 1907년 평양대각성운동기에 버금가는 급격한 발전을 이룩했다. 해외 선교도 강화되어 오늘날엔 해외 선교사 수가 매년 1000명 이상씩 증가해 3만 명에 육박해 세계 선교의 모판이 되어 있다.

문제가 있다면 한국교회의(한국적) 형성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지적되기도 했다. 신앙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시(詩) 나 가(歌)나 작품으로 심지어 토착화된 신앙 고백이 없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교역자의 무식을 탄식하며 그런 이유로 교회가 소외의 길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교단들이 분열로 서로 다투고 경쟁관계에 있는 한국교회는 연합운동의 기운을 곧 형체화 했다. 문서선교, 청년운동, 교육 및 의료사업에 괄목할 만한 교파간의 협력이 진행되어 왔다.

비기독교적 세력에 대항하려는 다분히 선교 전략적 의미가 있으나 ‘한 몸 된 교회’ 사상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하나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연합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심지어 이단 사상들이 교회 안에서 자라나기를 시작했으나 성경 중심의 기독교 본래의 정신을 따라가는 한국교회는 크게 동요 되지 않고 부흥 성장 해왔다.

칠야와 같은 형극의 길을 가면서도 우리 교회는 영적진흥과 교육진흥을 통해서 그 위기를 극복해 나아갔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 교육이 폭발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1918년에 기독교학교(초·중·고) 790개교에서 1921년엔 1187개교, 학생수 2만9772명에서 5만3824명으로 급증했다. 교육의 역할이 민족 사회의 부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인지라 한국의 교회가 이 나라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전대미문이었다.

성경 사경회가 한창이던 한국교회는 오직 말씀 반석 위에 세워진 든든한 교회로서 ‘우리는 아직도 은혜의 복음을 믿고 세속주의, 인본주의, 상대주의, 물질주의’를 배격하고 종교개혁자 루터가 지금 한국에 온다면 ‘죽으면 살리라’고 모든 원리 즉 역설적 진리를 삶의 원리로 믿고 아씨시의 프란시스의 기도를 아래와 같이 할 것이다.
   
주여,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는 자가 되고
이해 받기보다 이해하는 자가 되고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는 자가 되고
받기보다 주는 자가 되게 하소서.
용서 받기보다 용서하는 자가 되고
죽으면 영생 하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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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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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실 2017-10-08 14:35:26

    기독교인들이 착하게 살더라도 천당에 가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천당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단 한 명의 천사만 지구로 보내서 천당의 위치와 모습을 설명해주면 모든 지구인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일도 안하시는 하나님이 수많은 천사들을 동원해서 70억의 인구를 일일이 천당이나 지옥으로 안내하고 관리하는 복잡한 시스템을 운영할 리가 있겠는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유명한 과학자들도 반론을 못한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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