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화를 이끈 개신교
한국 근대화를 이끈 개신교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10.08 00:3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로테스탄트는 1517년 유럽에서 중세 암흑시대를 종식시키는 빛을 밝히며 근대(近代)를 열었고, 이후 지난 500년간 문명변화를 주도해온 삶의 태도와 인식론적 기반을 형성시켜왔다.

실제 세계가 모델로 삼는 국가들은 대부분은 프로테스탄트적 기반 위에 있다. 인구 1000만 명 이상 국가 중 국민소득 상위 35개국은 미국,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한민국, 스페인 등 총 11개국인데, 그 중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면 모두 기독교 기반 국가이다.

기독교에서도 가톨릭 기반이 강한 나라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뿐이고, 나머지 모두 프로테스탄적 기반이 강하다. 만약 소규모 국가이지만 고소득 국가인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등까지 포함한다면 프로테스탄트적 기반이 강한 나라는 거의 대부분 근현대 문명을 열어온 대표국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근대문명사와 종교와의 관계를 볼 때, 프로테스탄트 500년 역사는 근대문명 발전과 깊은 상호관계를 갖거나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 특히 문명사와 개신교적 친화성과 관련해 기독교 인구가 2% 남짓한 일본은 예외라고 하더라도 한국은 예외로 보기 어렵다.

한국은 예외가 아니라, 명확하게 개신교의 확산과 한반도의 문명 변화가 함께 했다는 것은 지난 100 여년 간 프로테스탄트적 확산이 가장 강하고 빨랐던 나라가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의 27.6%로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인구만으로도 19.7%를 차지해 불교 15.5%를 넘는다. 아시아 44개 국가 중 오직 한국만이 개신교 국가로 분류된다.

개신교 비율이 10%를 넘는 국가는 한국뿐이다. 한국은 개신교만으로도 19.7%로 서유럽국가의 기독교 비율과 차이가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명확히 프로테스탄트적 기반에 서 있는 나라이며, 개신교문명과 유럽문명을 분리할 수 없듯 대한민국의 성공과 개신교 확산 및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내면화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한민국 기반은 프로테스탄트

한국에서 근대문명 체계가 만들어지는 계기는 봉건체제에서 근대체제로 이행을 시작한 1876년 개항이다. 특히 개항 이후 펼쳐진 기독교문명 및 기독교 선교사들의 역할에 절대적으로 힘입었다. 특히 1882년 미국과의 수호조약 이후 문명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요 활동은 기독교 조직에 의한 것이었다.

개항 10년 뒤인 1885년을 전후로 가장 고립된 폐쇄, 낙후 체제인 한국에서 펼쳐진 기독교의 활동은 커다란 전환의 시점이다. 상징적으로, 연세대를 만든 언더우드는 미국 기독교계에서도 가장 철저한 칼빈주의에 입각한 네덜란드계 개혁교회(뉴저지, New Brunswich신학교) 출신인데, 그는 1600년대 일본으로 가던 도중, 조선에 억류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 또 20여년 뒤 또 다시 억류당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의 선조들과 칼빈주의적 개신교라는 점이 정확히 일치한다.

이승만과 배재학당을 키운 독일계 감리교계의 아펜젤러는 독일 감리교계 개혁교회 출신이며 언더우드는 장로교계 출신으로 모두 한반도 선교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1885년 한국 최초인 인천 내리교회, 1887년 새문안교회 및 정동교회 등이 설립되었고 지역적으로도 미국 북장로회와 감리교회는 평안 및 황해도, 남장로회는 전라도 등을 맡아 학교, 병원 및 교회를 함께 만들었다.

근대교육으로는 여성 근대교육의 효시가 된  이화학당의 스크랜튼, 경신학교의 언더우드는 물론 기독교정신에 따라 오산, 숭실, 숭의, 정신, 배화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1910년 기준 장로교는 501개 학교, 감리교는 158개 학교, 그 외 교파를 포함하면 683개, 천주교 설립학교까지 포함하면 총 807개 학교가 기독교에 의해 운영되었다.

▲ 프로테스탄트는 교회확장 중심적 신앙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교회확장 자체가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올해 4월 방영된 CBS특별기획 다큐‘한국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이수정’중의 한 장면

프로테스탄트가 변화시킨 한국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첫 과제는 수백 년간 계속되어온 봉건사회의 종식이었다.

개신교는 미신과 토속신앙의 극복, 봉건적 계급제도, 남녀차별, 사농공상적 신분제도와 차별제도 폐지에 선도적 역할을 했고, 그것은 나아가 근대 기본권 개념과 천부인권(天賦人權)적 자유에 입각한 개인의 시대를 여는 토대를 만들었다.

근대 교육과 근대 의료체계는 모두 개인의 삶의 질과 개인의 생명을 중시하며 전근대적 봉건적 삶의 존재 양식을 바꿔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종교를 넘어 근대적 가치와 근대적 삶을 형성시키는 문명사적 변화를 만드는 기수였다.

나아가 반봉건 투쟁과 반식민 투쟁, 그리고 1945년 이후 반공산 투쟁 등 모든 전체주의와의 투쟁에 선봉에 섰던 것도 프로테스탄트였다. 자주 독립국가의 지향과 근대 민주공화제 건립의 기반이 된 3·1운동이 이념적으로나 주도적 활동가에서 모두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었고, 이승만 대통령이나 조만식, 안창호, 이승훈 등 민족지도자들도 모두 프로테스탄트적 기반에 입각했다.

신의주 의거나 황해도 신천투쟁 및 공산주의를 대상으로 한 반공투쟁의 주역들도 거의 프로테스탄트였고 옥구교회,  병천교회 등 6·25전쟁에서 공산주의로부터 가장 커다란 희생을 입고 재기의 중심에 섰던 것도 프로테스탄트였다.

괄목할 만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적 기반이 자유민주주의 도입과 정착 시기는 물론이고, 산업화시대에서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정신이 늦어진 인식론적 근대화를 형성시키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업과 공업에 대한 천시를 극복하고, 기업과 장사 및 무역에 대한 자존감 형성을 포함해 사농공상(士農工商)적 신분사회를 타파하고, 오직 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공급하고 서비스해주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보상체계야말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만든 근간이다.

수백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과거급제와 공무원 시험과 같은 공직자 중심에서 기업과 시장중심적 사회 변화와 인식 기반을 개신교가 만들었던 것이다.

높은 신분을 획득하거나 권력중심적 지배자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필요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바꿔냈으며 상공업사회의 변신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정신이 없었다면 봉건적, 전통적 한국 사회가 오늘날과 같이 근현대사회로 바뀌지 못했을 것이다.

명·청시대를 이은 500년 가까이 한반도는 폐쇄적 중국의 영향과 문명적 고립을 겪으면 근대화가 매우 늦어졌고, 서구 및 프로테스탄트와의 접촉은 불과 130여년부터 가능했다. ‘늦어진 한반도의 근대문명’과 프로테스탄트의 만남은 한반도 문명의 완벽한 변신의 계기가 되었다.

결국 500년 전, 1517년의 프로테스탄트 종교와 정신은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시작되어 영국으로, 다시 미국과 캐나다로 확산되었다가 19세기말 및 20세기 초중반에 걸친 약 100여 년 동안 아시아 극동지역인 한반도, 1945년 이후에는 한반도에서도 남쪽인 대한민국에 대거 집중되었고 그 결과가 대한민국 성공이다. 지난 130년 동안 대한민국만큼 프로테스탄트 종교의 확산과 정신이 토대가 된 나라는 찾을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적 개인은 봉건적 속박과 가톨릭적 교회에서 벗어난 ‘세속적(secular) 개인’이다.

‘세속에서 삶을 사는 구체적 개인’과 그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신성불가침적 사고는 근대의 출발이자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요체이다. 그 전까지는 개인이 아니라 봉건계급, 가문, 교회 및 신앙공동체에 속박되어 신분계급적 삶을 요구받는 것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세속적 삶 속에서 직업을 갖고 성실하게 일하는 개인과 그 개인의 자유를 정립했다.

물론, 개인 자유의 토대는 개인과 신(神)과의 직접 만남이란 인식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교회와 사제 혹은 교황이란 중간 매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과 만나는 개인이야말로 권리와 인권의 주체이고, 누구도 개인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유린할 수 없다.

교회와 사제는 개인이 신과 만나는 것을 도와주는 조력자일 뿐이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신분과 계급사회로부터 개인(individual)을 분리해내고, 국가에 봉사하는 신민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는 개인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존재로 바뀌도록 만들었다.

노비든 상민이든, 혹은 여성이든 인권과 자유는 구속될 수 없고 신분, 계급, 가문 등과 같은 집단적 구속으로부터 분리된 근대적 개인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신분 집단 등과 같은 봉건적 구성에서 벗어난 개인의 형성은 개인의 행복추구와 개인의 재산(property) 형성에 대한 존중과 연결된다. 권력 추구나 신앙적 사제의 길이 아니라 남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며 가족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상의 정립이다.

그리고 그 개인이 일한 결과로 만든 재산(property)은 오직 그 개인의 것이며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봉건적 구속으로부터 개인 해방이자, 자유와 재산권 보장에 기반한 개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에서 사농공상적 사회를 해체하고 물건을 만드는 기업과 물건을 공급, 유통하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공무원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분들보다 기독교 신자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이다.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정신은 근대문명 정신의 기반이고 한국사회에도 개방화와 산업화시대를 관통했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직업(일)이야말로 신의 소명

프로테스탄트는 일(toil)과 직업에 대한 인식을 바꿔 일이란 부역이 아니라 신의 소명(calling)으로 전환시켰다.

일하는 직업인이란 사제(司祭)의 길로 가지 못한 ‘열등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소명의 실천을 담당하는 존재란 인식은 근대를 여는 혁명이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일과 직업을 통해 신의 영광을 실현시켜야 했다. 그것은 일은 천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바꿨고 일은 안하면서 지배를 통해 풍요를 즐기려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냈다.

종교적 삶이란 신앙생활과 사제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세속적인 일과 직업으로 실현되는 삶이라는 인식이 정착된 것이다. 그 결과 근대적 상공업층이 만들어지고 상공업층인 부르주아가 문명과 산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프랭클린의 개념으로 보면 왕 혹은 공직자 앞에 서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소명을 실천하는 상공업자와 기업인이 된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내 개신교 칼뱅파를 의미하는 위그노(Huguenot)들은 1685년 이후 신앙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프랑스를 떠나 30만 명이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다른 지역으로 도피했다.

캘뱅파 위그노들은 실질을 숭상하며 제품을 만들어 파는 기술 장인을 상징했는데 그 계승은 프랑스가 아닌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및 미국으로 전해질수 밖에 없었다.

조선이 문명과 격리되었지만 대한민국 시대에 와서 근대문명이 꽃피운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toil)과 직업, 상업과 공업을 천시했던 중세유럽처럼 봉건적 조선시대에도 물건을 만드는 직업에 종사하고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존중받지 못했다.

그런 일은 천한 자들이 하는 것이었다. 양반은 이중적 가치관을 갖고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청빈(淸貧)을 자랑하면서도 농민이 만든 생산물을 소비하는 사회였다. 유교윤리에 따라 입신양명적 씨족 및 가문(家門)사회에 고착되었고 과거급제로 신분 상승을 도모하던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 프로테스탄트는 한국 사회에서 권력과 계급, 공직이 존중되던 사농공상의 신분격차를 종결시키고 상업, 사업, 제조업이 의미를 갖게 만들었다. 특히, 개인의 성공이란 더 이상 계급, 신분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능력이 기준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물건을 만들든지, 장사를 하든지, 무역을 하든지 아니면 남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이 성공하는 근대를 열게 된 것이고 그것이 한국 근대 산업화시대에 펼쳐진 개신교회와 개신교정신의 본질이다.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는 부(富)와 재산에 대한 인식도 바꿨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고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결과로 남게 된 재산 및 기부의 양은 곧 각 개인의 삶의 성적표가 된 것이다.

근면한 삶과 금욕적 생활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였고 그 결과는 재산이었다. 게으르고 생산하지 않으면서 남에 의존하거나 흥청망청 쓴 사람에게 재산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실과 절약의 결과물인 재산이 곧 소명을 잘 실천한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이것을 자본주의정신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화폐는 삶과 일의 효율성에 대한 측정 기준이었다. 하나님의 삶을 가장 잘 구현한 사람은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로부터 선택을 많이 받는 것이다.

커피점을 하든, 만두집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이 찾고, 선택하여 부자가 되었다면 그가 하나님의 뜻을 더 구현한 것이고, 천국에 가까운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특권계급과 그들의 게으름은 미덕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게 그것은 타락이었다.

합의와 계약에 의한 교환중심 사회가 민주주의

마지막으로 개인과 자유에 대한 보장으로부터 만들어진 근대 시민(citizen)을 그들의 합의와 교환관계 외에는 그들을 강제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사회 성격이 ‘권력적 지배중심 사회’냐, ‘합의적 교환중심 사회’냐 하는 것은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다.

힘과 무력, 권력과 계급신분 및 허구적 인식 체계를 해체시키고 오직 합의와 계약에 의한 교환관계로만 개인관계가 만들어지는 사회가 곧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원하는 것은 지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합의에 따른 교환으로만 얻도록 하는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도 하나님의 창조물인 개인을 지배할 수 없고, 오직 그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만 개인은 구속된다는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정신이다.

그 결과로 권력과 정부행위란 구성원들의 합의사항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고, 위임된 영역에 대한 대리행사일 때만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자유의 주체인 개인이 합의하고, 위임된 범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된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 상공업자들의 협의체인 길드(Gild)와 상공업 중심의 신앙공동체인 교회(Church)의 운영원리가 곧 민주주의적 공동체 운영의 토대가 되었다.

개신 교회와 길드의 운영원리가 정치적 운영원리로 확장된 개념이 민주주의로 발전된 것이다. 직업중심적 상공업자들의 길드(협회)운영과 지역중심적 신앙인들의 교회운영은 서구 유럽민주주의의 중요한 원형(prototype)이자 민주주의 경험이 되었고 그것이 확산된 것이 바로 국가적 차원의 민주주의이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개인이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자 하는 다른 개인들과 각자의 재산을 조금씩 출연해 교회를 만들고, 목회를 이끌 지도자인 목사를 모셔오거나 선출하고, 장로 중심으로 대의원(의회) 조직을 만들어 교회 및 교회재산 운용,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평가와 교체 등을 진행시켜온 것이 민주주의의 원형이다.

그 결과로, 지금도 프로테스탄트적 기반을 가진 나라들만이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유럽국가들이라도 가톨릭적 기반의 나라들의 민주주의 수준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고 그런 민주적 방식은 프로테스탄트를 제외한 다른 종교 공동체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도 예외가 아니다. 아시아에서 프로테스탄트적 기반을 가졌기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민주주의적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한국의 근대와 민주주의는 바로 1919년 3·1운동에서 만들어졌고, 나아가 임시정부(1919)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1948)로 결실을 이룬 것이다.

3·1운동은 2%밖에 되지 않던 기독교인이 중심이었으며 3·1선언문을 발표한 민족지도자의 절반을 기독교인들이 차지했고 일제에 의한 체포자의 25%가 기독교인들이었다.
자유에 기반한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체 운영원리인 민주주의가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빨리 뿌리내리게 된 것에는 프로테스탄트와 교회적 기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한국 민주주의는 기독교적 자유를 지키려는 분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지켜지고 발전된 것이고 평안도, 황해도 및 함경도의 기독교인들까지 월남해 끝까지 지켜낸 결과이기도 하다.

평안도와 황해도 등의 장대현교회, 산정현교회, 창동교회 등 기독교가 함께 만들고 지킨 나라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회복해야 할 프로테스탄트 정신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혁명 500년을 기념하면서, 한국 문명사를 개척하고 세계적 모델국가를 만드는 주역이었던 개신교 130년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어느덧 우리가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본질의 구현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은지를 검토하고 다시 시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대한민국 근대문명을 개척해온 프로테스탄트는 어느덧 교회중심주의와 교회 내에 계급을 만들고 있다.

1517년 정신과 달리 대형교회니 소형교회니 하면서 교회 크기를 중요시하고, 신도 숫자로 등급이 되고 있다.

장로, 권사, 집사 등 직분 그 자체가 계급(신분)이 되고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수준과 헌금 액수가 우열을 가르는 요소가 되어 있다. 등급을 만들고 더 높은 등급이 천국에 더 가깝다는 식의 사고는 면죄부만큼이나 1517년 정신에 정면으로 반한다.

프로테스탄트는 교회 확장 중심적 신앙 활동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신앙인의 삶과 직업 및 사회 활동을 돕는 것이어야지, ‘교회 키우기’에 목적이 둬져서는 안 된다.

교회 확장 자체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직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현하자는 소명 실천을 돕는 데 치중해야 한다. 1517년 이전 대형 성당을 만들자는 것과 지금 교회를 키우는 것에 근본적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최고 문명국가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정신이다. 개신교 500년이 만든 변화의 본질은 바로 세상에 뛰어들어 소명적 직업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실현시켜나가는 데 있다.

교회중심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사회에서 펼쳐내는 구체적 삶과 실천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구현된 나라로 만들자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정신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는 교회중심에서 사회에서의 신앙실천 중심으로, 크기와 직위중심에서 하나님 뜻의 실천이라는 활동중심으로, 마지막으로는 성경 해석보다 성경적 삶의 구현으로 나아가는 것이 프로테스탄트 500주년을 맞는 4만 교회와 960만 프로테스탄트의 소명이다.

특히, 오늘 대한민국이 남다른 문명 주도의 길을 가다말고, 길을 잃고 혼란으로 빠져버린 것도 가장 크게는 중심을 잡아야 할 개신교가 프로테스탄트정신과 교회 역할을 구현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무엇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잃는 것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길 잃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또 종교자유조차 없는 전체주의 북한과 중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모델을 보고 따라왔던 개발도상국 및 신생독립국 모두의 ‘길 잃음’이 될 것이기도 하다.

▲ 고려대 정치외교학 박사 / MBC 방문진 이사 / 자유민주연구학회 회장 역임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진실 2017-10-08 14:29:34
인간의 장기가 이식되면 원래 주인의 생명과 상관없이 계속 생명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의 주체에 의해서 통제되는 단일생명체인가 아니면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살고 있는 연합생명체인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노벨 물리학상 후보에 오른 과학자들(김정욱, 김진의, 임지순, 김필립)도 반론을 못한다. 그 이유가 궁금하면 그들에게 물어보거나 이 책을 보라! 이 책은 과학으로 철학을 증명하고 철학으로 과학을 완성한 통일장이론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