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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유내강으로 재상에 오른 맹사성(孟思誠)

[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l승인2017.10.11l수정2017.10.1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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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webmaster@futurekorea.co.kr

흔히 여말선초(麗末鮮初)를 격변기라 한다. 그래서 그 시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아무래도 영욕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1360년생인 맹사성은 당대의 실력자 최영(崔瑩)의 손녀 사위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파란을 만나지 않았다.

우왕 12년(1386년)에 문과에 급제한 맹사성은 차곡차곡 진급을 거듭했고 조선이 건국되고도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郞)을 지냈고 정종 때에는 주로 간언을 맡는 직책에 있었다. 그리고 태종 때에는 좌사간을 거쳐 동부대언, 이조참의를 지낸다.

그는 오로지 관리의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일 뿐 시세(時勢)에 곁눈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직무 수행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은 있었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에 오른 그는 태종의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한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잠시 역모의 혐의를 받고 있을 때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했다.

조대림은 태종이 가장 신뢰했던 재상(宰相) 조준(趙浚)의 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태종도 조대림을 의심했다가 진행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면서 목인해라는 자의 농간에 조대림이 놀아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서는 상황을 즐기고 있던 터였다.

즉 태종으로서는 사위 조대림을 처벌할 생각은 없이 일단 일이 흘러가던 것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맹사성은 대사헌으로는 원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실제로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실록을 통해 맹사성의 관력(官歷)을 추적해 보면 이 일 말고는 특별한 허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저 중앙의 요직과 지방의 관찰사를 오가며 치적(治積)을 쌓아간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비결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남에게는 너그러운 그의 천품이 흔히 환해풍파(宦海風波)라고 부르는 벼슬살이의 고단함을 순항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 KBS 드라마 <장영실>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맹사성

세종 시대의 쌍두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맹사성은 음율에 정통했다. 그래서 1412년에는 그가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영의정 하륜(河崙)이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종 말기에 이조참판을 거쳐 마침내 예조판서가 되어 판서의 반열에 오른 그는 이후 호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쳐 세종 초에는 인사를 책임지는 이조판서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황희보다 1년 뒤늦은 1427년에 우의정이 되어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로써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이라는 세종 치세의 쌍두 마차가 탄생했다. 태조 때의 조준 김사형, 태종 때의 하륜 조영무에 이은 황희 맹사성 콤비의 탄생이었다.

이후 세종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황희 맹사성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였다. 정사 하나 하나를 두 명의 정승과 토의해 가며 결정했다는 것을 이 표현만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맹사성이 우의정으로 있을 때 눈길을 끄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에게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의 감수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려고 했다.

그러자 평소 직언을 잘 하지 않던 맹사성이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도 이에 따랐다.

즉 성군(聖君)이라는 세종도 실록을 보고 싶어 했고 그것을 저지시킨 장본인이 바로 맹사성이었던 것이다.

조선 초의 관리이자 문필가인 성현(成俔)의 책 <용재총화(&#24949;齋叢話)>에는 그의 넉넉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려 있다.

고향인 충청도 온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그가 비를 만나 경기도 용인의 어떤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방에 들어가니 경상도에서 올라온 부호(富豪)가 패거리를 잔뜩 거느린 채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고 우의정 맹사성은 방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부호는 맹사성을 불러 함께 장기를 두자고 했다. 이에 응한 맹사성과 한창 장기를 두던 중에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서로 공(公)자와 당(堂)자를 끝에 붙여가며 문답을 하자는 것이다.

이에 맹사성이 먼저 물었다.
“무엇 하러 서울에 가는 공(公)?”
“녹사(錄事) 벼슬을 얻기 위해 올라간당(堂)?”
“내가 그대를 위해 그 자리를 얻을줄공(公)?”
“우습구나. 당치도 않당(堂).”

이들의 공당(公堂) 문답은 여기서 끝났다. 한양으로 돌아온 맹사성이 의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녹사 시험을 보러 들어왔다가 맹사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떠한공(公)?”
그 사람은 물러가 엎드리며 말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당(堂)!”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맹사성이 전후사정을 이야기해줬다.  함께 했던 재상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 사람은 실제로 맹사성의 추천으로 녹사가 되고 훗날 지방의 유능한 관리가 됐다고 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맹사성의 면모는 여유로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다. 그 여유로움이 환난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줬고 그 눈이 그를 이조판서와 정승 자리에까지 올렸기 때문이다.

그후 황희는 영의정으로 자리를 비키고 그가 마침내 1432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처신 명망

맹사성은 고려 말부터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마치 하나의 임금 밑에서 일을 한 듯이 관품이 높아졌다. 태종 때 고초를 겪은 것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정치 바람을 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윗사람에게 아첨을 일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논어’ 태백편에서 공자가 말한 이 한 마디가 아닐까?
‘그 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윗자리를 넘보지 않고 윗자리에 나아가서는 아랫사람들의 일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79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그의 치적보다는 그의 행실을 높이 평가해 이렇게 말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가 얕은 자라도 만나보고자 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꾸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이 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사성의 집 아래에 있으므로 늘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석린(石璘)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맹사성은 예(禮)를 알아 재상에 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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