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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깨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 이상규 고신대 교회사학 교수l승인2017.10.11l수정2017.10.1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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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고신대 교회사학 교수  webmaster@futurekorea.co.kr

1517년 10월 31일, 목요일 정오 무렵 34세의 비텐베르크대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비텐베르크 성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조교라고 할 수 있는 청년 한사람을 대동하고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그날 게시판으로 향한 그는 95개 논제로 알려진 토론문을 게시판 중앙에 게시했다.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로 시작되는 이 문서는 교회개혁의 선언서이자 대헌장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스치는 그날 가벼운 외투를 걸친 이들이 주변에 있었으나 영문도 모른 채 지나쳤다. 그러나 이 작은 ‘게재’ 사건이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변혁사건의 시작이었다. 곧 사태는 심각하게 돌아갔다.

▲ 루터는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면죄부 판매 등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의도했을 뿐이었다. @ backtothebible.ca

루터가 쓴 95개 논제의 토론문

95개 논제는 독일어로 요약되어 벽보 형태로 인쇄된 뒤 독일 전역에 배포되었다. 두 주가 못되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한 달이 못되어 유럽 각처로 번져갔다. 이때는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발명된 지 70여년이 지난 때였다. 인쇄술은 루터의 사상을 전달하는 매체였다.

인쇄술을 통한 전파를 프랑소와 앙베르는 “하나님의 준비”라고 불렀고, 루터의 친구였던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는 ‘천사가 심부름꾼인 것 같았다’고 썼을 정도였다. 곧 루터의 다른 문서들도 인쇄술의 은혜를 입었다.

독일어로 쓴 ‘면죄부와 은총에 대한 설교’(Ein Sermon von Ablass und Gnade)는 1518년 한 해 동안 14쇄, 약 1만4000부가 인쇄되었고, 3년 만에 무려 23판까지 출판되었다. 루터의 소책자는 보통 10판, 15판 혹은 20판이 나왔는데, 1524년까지 약 100만부의 소책자가 배포되었다고 한다.

독일 전역에서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던 1520~1530년 배포된 소책자는 630여 편이었는데, 1518~1535년 판매된 독일어 책 가운데 3분의1 이상이 루터의 글이었다고 한다. 당시 독일 인쇄소 70여 곳 가운데 45개 인쇄소가 루터의 저서를 출판한 것으로 집계될 정도다.

루터의 저서는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이른바 팸플릿 전쟁(guerre des pamphlets)을 일으켰다. ‘팸플릿’을 의미하는 독일어 Flugschriften은 ‘돌아다니는 문서’라는 뜻인데, 1520년에서 1525년 어간에 ‘돌아다니는 문서’가 홍수를 이루면서 루터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당시 팸플릿은 대부분 8쪽이나 16쪽, 혹은 32쪽 정도의 소책자였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으므로 대중성이 있었다.

곧 격한 토론이 일어났고 개혁의 불길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갔다. 가장 놀란 이는 다름 아닌 루터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개혁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루터교 학자들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의 역할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른바 루터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카를 홀(Karl Holl)과 롤란드 베인톤(Roland Bainton)인데, 이들은 루터가 아니었다면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루터가 아니었다 해도 종교개혁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랑케(Leopold von Ranke)는 그의, <종교개혁사>에서 루터의 출현은 시대적 요청이었음으로 “루터는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Luther musste kommen)라고 썼다.

실제로 루터는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면죄부 판매 등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의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시작이 교회를 개혁하는 거대한 역사로 발전했다.

1521년 1월 3일 교황은 칙서(Decet Romanum Ponificem)를 내려 루터를 파문했는데, 그 이전에 교황 측 대사 제롬 알레안더(Jerome Aleander, 1480~1542)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463~1525, 재임기간 1486~1525)에게 루터를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선제후’(Princeps Elector, 選帝侯)란 독일황제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를 의미하는데, 프리드리히는 비텐베르크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 대학의 교수인 루터를 보호해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황청은 프리드리히에게 루터를 로마로 이첩해 줄 경우 추기경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곧 있을 황제 선거에서 프리드리히를 후원하겠다는 정치적 거래를 시도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며 루터를 보호해줬다. 그 덕에 루터는 바트부르크성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정치적 상황은 루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줬고 그를 보호해줬다. 황제 카를 5세는 루터파 이단을 박멸하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대립하고 있는 프랑스와 프란시스 1세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므로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 국민들을 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루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쇄기술이 논쟁 불붙여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만스펠트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다음날 피터교회(Peter's Church)에서 영세를 받았는데, 그날이 성 마르틴(St. Martin of Tours) 일이었기 때문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불리게 된다.

루터의 가족은 곧 만스펠트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루터의 학교교육이 시작된다. 곧 만스펠트(Mansfeld), 마그데부르크(Magdeburg), 그리고 아제나흐(Eisenach)에서 교육을 받고, 18살 때인 1501년 5월에는 에르푸트대학에 입학했다.

1392년에 설립된 이 대학에서 루터는 라틴어와 법률, 그리고 옥캄의 후예인 비엘(Gabriel Biel)을 통해 유명론 철학을 배우고 1505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7월 2일 에르푸르트 근방 스토턴하임(Stotternheim)에서 낙뢰사건으로 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2주일 후인 7월 17일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단했다.

짧은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1506년 수도(修道)의 맹세를 했고, 1507년 2월 27일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수도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의 천거로 1508년부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대학은 1502년 10월 16일 설립된 신설 대학이었다.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강의를 시작으로 하여 1509년 3월 신학사 학위를 수여받은 후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센텐치아 등을 강의했다. 1509년에서 1511년 어간 에르푸르트에 잠시 거주한 일 외에 루터는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 자격을 얻었다. 이때부터 루터의 대부분의 강의는 성경신학 분야였다.

루터는 대학 동쪽에 위치한 수도원의 작은 연구실에서 숙식하며 연구했다. 이곳에서 구원에 관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였고, 이 고민을 성경 연구를 통해 복음적 진리,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깨닫는 소위 ‘탑 속의 경험’(Turmerlebnis)을 하게 된다.

루터가 언제 종교개혁신학의 핵심인 복음적 구원관을 터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1515년에서 1516년 어간에 저술한 로마서 강의가 1519년에 쓴 갈라디아서 강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복음주의신학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루터의 ‘탑 속의 경험’은 적어도 1515년 이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시편 강의(1513-1515)에 이어 로마서를 강의하면서(1515-1516)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과 통찰력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로마서 1장 17절을 주해하면서 ‘하나님의 의(義)’는 수동적인 의로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신 ‘덧입는 의’(imputed grace)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깨달음은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 당시 루터의 사상적 우산 아래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진리였다. 루터는 후일 이 때의 발견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은 감격을 체험하였으며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고.

루터는 갈라디아서(1516~17), 히브리서(1517~1518), 시편(1519)을 강의하고 주해했는데, 이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의 성경연구와 어거스틴 연구는 대학 전체의 관심사였으며 하나님 곧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계속 전개되어 갔다.

이제 스콜라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러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했는데, 1517년의 95개 논제 이후 현실화 된 것이다. 면죄부 논쟁과 함께 격한 토론이 전개되었고 개혁은 과감하게 추진되었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요한 엑크(Johann Mayr Eck, 1486-1543)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선한 동료도 얻었다. 필립 멜란히톤, 마르틴 부써, 요한 브렌츠, 빌리카누스 같은 이들이었다.

1520년에 쓴 3가지 문서를 비롯하여 루터의 작품들은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비록 그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그에 대한 지지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1520년 10월에 출판된 로마교의 성례관을 비판한 ‘교회의 바벨론 감금’(Von babylonischen Gefaengnis der Kirche) 초판 4000부가 불과 수일 만에 매진되었고 그해 15쇄나 인쇄되었다.

루터는 확신에 가득찬 개혁자였다. 1521년 보름스제국의회 회의록 원본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때 루터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 이것은 그의 신앙적 결의였다.

이단으로 몰린 루터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 죽음에 직면해 있던 그는 바트부르크성에 은거하여 에라스무스가 1516년 편집한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1522년 2월에 완성했고 1523년 9월 첫 3천부가 출판되었다.

1년 뒤에는 12쇄가, 10년 동안 85쇄가 인쇄되었고, 15년 만에 20만부가 소진되었다고 한다. 그가 성경 번역을 중시했던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가 교회 부패의 근본 원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루터는 예식순서, 성상, 성직자의 복장 등은 비본질적인(adiaphora) 문제라고 봤으므로 루터교 예배에는 로마 가톨릭적 전통이 많이 흡수된 점은 아쉬운 일이다. 농민전쟁의 위기를 겪으면서 루터는 혁명이 아니라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루터는 1525년 6월 13일에는 수녀였던 케더린 폰 보라(Catherine von Bora)와 결혼했다. 보라는 25세의 여성으로 루터보다 16년 연하였다. 그의 결혼은 많은 사람의 비난거리가 되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비극으로 시작된 개혁운동이 희극으로 끝났다”고까지 했고, 로마교의 비난은 이보다 심했다.

루터는 1526년 6월 7일 첫 아들을 시작으로 6남매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역병으로 고아가 된 여섯 아이를 입양하기까지 했다. 루터가 공개 입양한 첫 인물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프로데스탄트로 불린 개신교 운동

루터의 신학은 1521년 보름스 의회 당시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후 자신의 입장을 확장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이자 최종 권위로 받아들였다. 그가 이해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에 기록된 언어 그 이상이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곧 성육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말하면서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서신으로 간주했다. 행동 규범은 강조되나 복음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요한계시록의 가치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경시했다. 그는 교회도 성경도 최종 권위가 아니며 복음, 곧 성육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속에 잠재하는 복음이라고 봤다.

루터의 신학을 보통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그의 신학을 관통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신앙의 문제를 인간 이성으로 탐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의심했던 중세 후기의 사상적 전통에서 성장했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듯이 사변에 의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즉 신 인식과 연관하여, 중세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theology gloria)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천국으로 기어오르려는 인간들의 노력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본 것이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을 비판하면서 특별히 신학에 철학을 도입한 것 즉, 신학의 ‘철학화’를 공격한다. 그러나 루터는 “참된 신학과 하나님 인식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십자가의 신적 계시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 계층화된 교계 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찾던 로마가톨릭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참음으로 신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주장한다.

율법과 복음은 루터 신학의 중심 주제인데, 율법과 복음의 대조적 관계는 하나님의 계시가 심판의 말씀인 동시에 은혜의 말씀임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는 공존하며 심판의 말씀 없이 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이 양자관계는 신자는 의인이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임을 의미한다.

또 루터는 교회와 국가에 대한 관계에서 두 왕국론을 주창했다. 또 예정론을 말하면 칼빈을 생각하지만 루터도 예정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인 믿음에 의한 칭의의 논리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개혁자 쯔빙글리와는 성찬관의 차이로 연합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루터교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수도사이자 교수, 설교가, 교육자이자 교회개혁자였던 루터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마감하고 1546년 2월 18일 63년 2개월 10일을 산 후 아이스레벤에서 사망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깁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주여,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여.”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개혁한 ‘교회의 교사’였다.

▲ 호주신학대 신학박사 / 한국 교회와 역사연구소 소장


※<월드뷰>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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