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익의 국토기행...짧고도 긴 슬픔과 아름다움 - 공주(公州)
유우익의 국토기행...짧고도 긴 슬픔과 아름다움 - 공주(公州)
  • 미래한국
  • 승인 2003.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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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무령왕릉 연문
(46) 짧고도 긴 슬픔과 아름다움 - 공주(公州)도읍이 사비(扶餘)로 옮겨간 후 공주가 얼마나 허망했을까?높은 자리에서 ‘국민만 바라보고’ 막 나가는 양반들, 이 백성들이 그대들의 영구불망 송덕비를 세울 것 같소이까? 짧은 기간에 긴 역사를 만든 고도(古都)를 찾아나섰다. 새로 난 찻길은 달리기에 근사한 만큼 감회 또한 별나다. 경부고속도로 천안 갈림목에서 공주 가는 고속도로로 들어서니, 시원스럽게 트인 전경에 옛날 생각이 절로 난다. 조치원에서 천안에서 갈라져서 그리고 때론 대전 유성으로 돌아서 국도와 지방도를 시외버스 타고 갔었지. 철도도 고속도로도 가지 않는 돌아앉은 역사도시를 안타까워하면서.
▲ 영세불망 송덕비
왕도 공주가 비운의 역사를 뒤로 하고 충남 도청이라는 지방 중심지가 되어 그나마 최소한의 체면을 되찾은 것은 1896년이었다. 초야에 묻혀 세 왕조의 흥망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몸을 일으키는가 했더니,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었던가. 일제가 놓는 철도를 거부하여 호남선이 대전으로 돌아가니 변방에 머무르기를 자청한 셈이었다. 그로 인한 도시 성장의 차이로 얼마 후 신흥 교통중심지 대전에 도청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고, 이어 고속도로 노선의 설정에 있어서도 한번 돌아간 물꼬를 되돌릴 수 없었으니 역사와 지리의 관성이란 이리도 기막히게 완강한 것이었던가!길고 지루했던 장마가 언제였던가 싶게 가을볕이 밝고 화사하다. 유사 이래 최대의 비바람으로 몰아닥친 태풍 매미가 남녘땅을 할퀴어 크고 아픈 상처들을 남겼지만, 그래도 들녘은 의연히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에 오랜만에 보는 포플러 몇 그루까지 얼마 남지 않은 햇살을 느긋이 즐기고 있다. 달이 구름에 가렸기로 한가위를 감사하지 않으랴, 한해 농사가 흉년이 되었다고 하늘의 섭리를 원망하랴. 나는 천년하고도 다시 오백년을 엎드려 지내는 인구 13만의 지방 소도시 공주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기다려 마침내 이어진 공주를 지나는 지름길,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는 25번 고속국도다. 한양서 남도 가는 길이라면 처음부터 이리 났어야 할 것이던 것인데, 호남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가 다 난 뒤이니, 이름만이라도 ‘백제고속도로’로 지어 대접하면 안 될까?불과 64년(475~538)의 왕도였지만 공주는 영원한 백제(百濟)의 수도다. 고구려의 침공으로 위례성이 함락되자 한성(漢城)과 함께 한강유역을 내어주면서 백제의 남하는 시작되었다. 비단강(錦江) 유유한 흐름을 만나 곰나루(熊川)에 터 잡으니, 계룡산(鷄龍山) 기대고 들판이 기름지다. 둘러보니 천혜의 요지라, 잠시 추스러 간다는 게 다섯 임금에 걸쳐 문화를 꽃피웠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긴 역사의 뿌리를 내린 곳이다.
▲ 공산성 금서루
길을 내고 전답을 일구며, 산성을 쌓고 터를 닦았다. 누각을 세우고 사찰을 일으켰다. 기와와 질그릇을 굽고, 나무와 돌과 금속으로 갖은 장식을 다듬어냈다. 글을 짓고 노래를 부르며 힘을 모아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나 공주는 떠나가고 짓밟히고 잊혀지는 역사를 되풀이해야 했다. 도읍이 사비(扶餘)로 옮겨간 후의 공주가 얼마나 허망했을까? 왕국이 나당연합군에 패한 후 옛 왕도의 비통함이 어땠을까? 그리고 나라가 왜에 빼앗겨 넘어간 후에 해양제국 옛 수도의 애절함은 또 어땠을까?‘북공주 출구’를 놓치고 나서 어쩌나 하고 가다 보니 ‘남공주 나들목’이 나온다. ‘아무려나 공주로 들어가니 다행이로구나’ 하던 참에 지척에 무열왕릉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반갑다. 전화위복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날은 일이 척척 맞아 들어가기 마련이다. 왕께서 인도하셨다면 성은이 망극한 일이렷다.
▲ 무녕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
잃어버린 왕국의 빛을 되살려낸 것은 1971년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武寧?陵)의 발굴이었다. 무령왕(斯磨, 462~523)은 동성왕의 둘째아들로 40세에 즉위하여 22년 간 재위하면서 안으로 민생을 안정하고 밖으로 국위를 강화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살아서 국력을 강화하여 아들 성왕으로 하여금 백제 중흥기를 열게 한 성군이 죽어 1500년이 지난 뒤에 다시 왕조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니, 그로써 백제사의 정확한 연대와 문화예술의 높은 수준이 문화사에 길이 빛나게 된 것이다.1호에서 7호까지 고분군의 능들은 번호가 매겨져 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과 왕족이지만 이름을 알건 모르건 한자리수의 번호를 받았다. 그러니 나 같은 평민이 아무개라는 이름 석자 외에 여러 자리의 주민등록번호와 평생 쓸 수 있는 전화번호에 e-mail 번호까지 부여 받은 것은 홍복이 아닌가. 입구의 ‘고분군 모형관’을 곁눈으로 힐끗 보고 지나쳐 무령왕릉이라는 7호 고분으로 다가갔더니, 주먹만한 자물쇠로 굳게 잠겼다. 도굴은 다 당해 놓고 그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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