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예제(禮制)를 세운 ‘미스터 원칙’ 재상 허조(許稠)
조선의 예제(禮制)를 세운 ‘미스터 원칙’ 재상 허조(許稠)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11.0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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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허조는 고려말 판도판서(훗날의 호조판서에 해당)를 지낸 허귀룡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18년(1369년)에 태어났다. 맹사성과 마찬가지로 권근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17세에 진사시, 19세에 생원시에 합격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아마도 이 무렵에 일어난 일인 것 같다. 자신이 과거 시험을 볼 때 좌주(座主-시험 책임자)였던 염정수가 사형을 당했다. 염정수는 고려의 명신 염제신의 셋째 아들로 목은 이색의 문하이며 하륜, 권근, 정도전 등과도 가까웠다. 우왕 밑에서 지신사 대사헌 등을 지냈고 최영에 의해 1388년 제거당한 것이다.

당대의 실력자가 우왕과 최영이다 보니 누구 하나 장례를 치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실록에 따르면 “(염정수의) 문하생과 옛 부하 직원이었던 관리들이 감히 가 보는 이가 없었는데, 허조만이 홀로 시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관을 준비하여 장사지냈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맹사성이 음악(音樂)에 능했다면 허조는 예제(禮制)에 밝았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그를 발탁해 봉상시(奉常寺) 승을 맡겼다. 이 때 허조의 나이 20대 중반일 때였다. 봉상시란 국가의 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시호(諡號) 등을 정하는 국가기구로 고제(古制)에 여간 밝지 않고서는 맡기 힘든 자리였다.

그는 철저한 주자학 신봉자였기 때문에 국가의 전례를 주나라의 선례와 주자의 이념에 따라 개혁해나갔다. 특히 허조가 주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그가 이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부모의 상을 당해 그 자신부터 ‘주자가례’에 따라 상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는 겉으로는 유학을 숭상한다고 하면서도 집안의 상을 당하면 불교식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 조선의 명재상 허조는 중증척추장애인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태종의 신임을 얻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허조를 중용할 것을 적극 추천했다. KBS 대하드라마 <세종대왕>의 한 장면

성균관 재직 중 석전의식 복원

그후에는 1397년 성균관 전부라는 직책을 맡아 어릴 때의 스승이자 당시 성균관 대사성을 맡고 있던 권근의 도움을 빌려 공자에게 제사를 올리는 석전의식(釋尊儀式)을 원래의 격식에 맞도록 복원했다. 1400년에 사헌부 관리로 있다가 완산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아예 관직에서 물러났다.

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정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사헌부에 있다가 좌천된 것으로 볼 때 당대의 실력자나 그 지인들을 탄핵하다가 밀려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곧은 성품을 감안할 때 특히 그렇다.

태종2년 7월 28일 태종은 인사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인 이조정랑이 결원이 되자 후임자 선정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아직은 정권 초이기 때문에 인재들을 충원하는 요직인 이조정랑 자리에는 능력도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을 앉혀야 했기 때문이다.

훗날 이조정랑 자리는 본인이 물러나면서 후임자를 추천하게 함으로써 당쟁의 핵심 요인이 된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국왕이 직접 후임을 고를 때였다. 그 때 태종은 후보자들의 명단이 적힌 리스트를 보다가 허조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내가 사람을 얻었다”고 말했다.

1407년 세자 양녕이 진표사로 명나라에 갈 때 태종은 ‘특별히’ 허조를 사헌부 집의로 임명하여 사신단의 서장검찰관을 맡도록 했다. 이 때에도 허조는 예제 전문가로서의 능력이 발동해 명나라 문묘에서는 원나라 때의 학자 허형(許衡)을 다시 제사하고 한나라 때의 유학자 양웅(楊雄)을 내친 것을 보고 와서 조선에서도 이와 같이 하도록 건의를 해서 관철시켰다. 일종의 도통(道統) 정립과 관련된 문제에서 명나라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1411년 예조참의로 승진한 허조는 학당과 각종 사당의 제사예법을 바로 세웠고 신분에 맞는 상제(喪制)를 정립했다. 그래서 태종은 의례상정소 도제조도 겸하도록 했다. 의례상정소란 바로 그런 일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이었다. 허조의 일처리에 만족한 태종은 허조를 참판으로 승진시켰다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던 1418년 예조판서로 임명한다. 예제전문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예조판서 허조는 3년 후인 1421년 의정부 참찬에 오른다. 이 무렵 태종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풍양이궁에서 신하들을 초대해 주연을 베풀곤 했다. 연회가 끝난 뒤 태종은 허조를 조용히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그 때 태종은 허조의 어깨를 짚고 세종을 쳐다보면서 “허조는 나의 주석(柱石)이다”고 말한다. 

세종은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허조를 보면서 “지금 내가 경을 칭하는 뜻이 무엇 때문인지 아는가?”라고 묻는다. 모를 리 없었다. 내 아들을 부탁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허조가 놀라고 감격하여 울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태종은 허조에게서 예제 정립의 재능을 취했다면 세종은 그의 사람을 고르는 안목을 취했다는 점이다. 세종은 자신이 행사한 첫 번째 각료 인선인 세종4년 9월 25일 인사에서 허조를 이조판서로 임명한다. 이조는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곳이다. 그 후에도 세종8년 11월, 세종14년 6월에 허조는 이조판서로 제수된다.

이조판서 재직 당시 허조는 주변 사람이나 친척이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은 기꺼이 추천했다고 한다. 당연히 견제의 목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세종이라고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한번은 세종이 허조를 부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이 사사로이 좋아하는 자를 임용한다고 하더라.” 이에 대한 허조의 대답이 걸작이다.

“진실로 그 말과 같사옵니다. 만일 그 사람이 현재(賢才)라면, 비록 친척이라 하더라도 신이 일부러 피하지 않았습니다. 또 만일 그 사람이 불초(不肖)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외람되게 사사로이 친하다는 이유로 자리를 주겠습니까?”

세종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승 승진은 아주 늦은 편이었다. 세종이 볼 때 예조나 이조의 특정 업무에는 탁월했지만 성격이 강직해 종합적인 업무 처리가 요구되는 정승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70세를 눈앞에 둔 1438년에야 우의정에 오르고 다음해 6월 좌의정으로 승진하지만 10월에 병이 들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세상을 떠난다. 그의 졸기 중 허조라는 사람의 인물됨을 보여주는 한 구절이다.

“성품은 순진하고 조심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사서(四書)’와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과 성리(性理)의 여러 책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좋아하여 읽었다.

비록 갑자기 일을 당하여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으며, 제사(祭祀)를 받들기를 반드시 정성으로 하고, 형(兄-허주)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고,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용이 있었으며, 반드시 경조(慶弔)와 문병(問病)을 친히 하였었다.”

보기에 따라 무미건조하고 꼬장꼬장한 학자의 풍모를 갖고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처신으로 인해 초단기 정승 재직에도 불구하고 황희와 더불어 조선 500년 최고의 정승이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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