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민주주의’라 쓰고 ‘떼법’이라 읽는다
‘숙의민주주의’라 쓰고 ‘떼법’이라 읽는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11.0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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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숙의 이전에 자유와 책임의 문제

탈원전 공론화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담론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고리원전공론위의 ‘원전가동 재개 및 원전 축소’라는 권고에 대해 자신의 신고리원전 중단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국민 여론이 우세하자 ‘숙의민주주의를 통한 국민 통합의 미래를 봤다’고 표현했다. 한국당과 보수 시민사회에서는 그러한 대통령의 주장에 ‘쑈통’이라는 레이블을 박았다.

숙의민주주의란 다수결로 결정하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방법론이다. 다시 말해 시민들의 참여와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이견들을 좁히고 설득을 중요시하는 민주적 절차를 뜻한다. 그래서 숙의민주주의는 심의민주주의라고도 하고 그 본질은 ‘사회적 선택(social choice)’을 위한 공론이 중시된다.

숙의민주주의 이론가로는 ‘민주주의와 숙의(democracy and deliberation)’의 저자인 스탠퍼드대 퍼시킨(James S. Fishkin)과 존 롤즈의 제자이자 역시 스탠퍼드대 정치철학 교수를 역임한 조슈아 코헨(Joshua Cohen)이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 지난2월25일촛불시위대가횃불을들고광화문앞거리를행진했다. / 연합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현대 대의제의 문제점을 유권자의 참여와 공론을 통해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다수결 이전에 객관적 자료들의 숙지와 반대자 주장에 대한 경청, 이슈에 대한 이해 등이 제시된다.

이러한 숙의민주주의가 요청되는 이유는 현대의 대중사회에서 유권자들이 공공적 문제에 대해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를 갖기 때문인데, 합리적 무지란 자신과 관계성이 약한 공공적 이슈에는 대중들이 이해의 노력을 잘 기울이지 않는 행태를 말한다.

이러한 행태가 ‘합리성’을 띠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인지의 경제화 때문이다. 즉 누구나 사람들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한다는 것. 예를 들어 농사를 짓는 농민은 농업정책에 대해서는 상당한 인지 노력을 기울이지만, 문화정책에 대해서는 인지 노력을 덜 들이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렇듯 합리적 무지가 적용되는 공공의 이슈에 사람들은 무엇이 좋은 정책인지 파악하기 힘들며 다분히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노선이나 인물의 주장을 지지하는 경향이 등장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공공성을 가진 정책은 합리적으로 결정되기 어렵고 정쟁으로 소모전을 겪거나 다수결이 강요되면서 어느 쪽으로 결정이 되더라도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남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숙의민주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엘리트 숙의’와 ‘시민 숙의’라는 두 방법론을 제시한다.

숙의민주주의는 성숙된 개인을 전제

엘리트 숙의란 그 분야에 전문성이나 권위를 갖는 이들이 먼저 정책의 타당성을 공론화로 검증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과학기술 정책이나 의료정책을 결정할 때 효과적일 수 있다. 단 이 엘리트 숙의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이들은 공론화 과정에서 기존의 어떤 결정이나 방향으로부터 자유롭게 독립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보장이 필요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시민 숙의민주주의, 혹은 대중 숙의민주주의는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고 대중들이 갖는 상식적 수준에서 정책의 방향을 공론으로 수렴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대중적 숙의는 정책에 참고만이 될 뿐, 결정력을 갖는 것은 아닌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숙의민주주의를 살펴본다면 이 제도는 장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숙의민주주의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보편적 이성’을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보편적 진리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따라서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다원적인 생각들은 보편성을 가진 주장에 수렴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철학은 고대인들이 가졌던 자연철학에 그 배경이 있다. 즉 인간의 사회가 취해야 할 정치와 도덕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 자연의 보편성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 같은 광장은 고대 민주주의의 공론장의 역할을 했다.

시민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폴리스의 정책에 의견을 제기할 수 있었고 또 그러한 정치공동체(Polity)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였다. 그리스는 이러한 시민의 정치 참여를 담보하기 위해 초기에는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공직을 정했다.

다만 고대 그리스의 공동체적 정치철학은 폴리스라는 도시국가가 가진 인구학적 특성에 기인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시 아테네와 같은 폴리스형 도시국가의 인구는 약 3만 명선이었다.

그리고 여성과 외국인, 노예들은 참정권이 없었기에 국가 정책에 대한 공론화는 오늘날 광역화된 현대 국가들에 비해 훨씬 수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숙의민주주의는 오늘날 지방분권이 발달한 스위스나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대의 민주제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얻는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왜 대의 민주제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인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보려면 먼저 대의 민주주의의 대의(代議)의 의미를 유념해야 한다.

대의제란 ‘대신해서 결정하는’제도가 아니라, ‘대신해서 논의(議)’한다는 의미다. 즉 대의제에서 의회는 주권을 대리하거나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를 위해 국정을 대신해서 논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화제에서 주권의 최고 의사결정자는 대통령이고, 의회는 대통령의 통치적 결정을 위해 국정을 토의하는 공론장의 역할이 그 본질이 된다.

그러나 의회가 행정권에 우월한 나라에서 주권적 결정은 사실상 의회에 주어지게 되는데, 이때 의원들은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의 뜻을 따라야 할 의무가 없게 된다.

의회민주주의에서 의원은 유권자들의 인구 비례적 대표로서 의회라는 공론에 참여하는 이들이고, 따라서 어떤 의사적 결정도 그 정치공동체와 국민 전체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무를 갖게 된다.

이러한 문제로부터 의회민주주의, 즉 대의제에서 주권자와 대리자간에 주인-대리인 문제(Proxy problem)가 발생한다. 즉 대의원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주권자의 이해관계보다 우선할 수 있는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자유의 문제는 숙의할 수 없다

이러한 대의민주제의 모순을 가장 날카롭게 파악한 이는 18세기 프랑스의 마지막 고전주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Rousseau)였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유를 원해서 국가를 만들었지만 도처에서 압제의 사슬에 신음하고 있다’고 썼다. 즉 자유를 위해 시민들은 군주제를 타도하고 주권을 자신들이 넘겨받았지만 그 주권을 위임함으로써 다시 대의자들로부터 속박을 받는다는 고발이었다.

루소는 ‘대의제에서 주권자는 단 하루만 주권자가 된다. 바로 투표일이다’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대의제의 문제로부터 루소는 ‘인민들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즉 한 정치사회는 사회계약을 통해 주권이 성립되고 그러한 주권은 단일하고 분할되지 않는다는 점으로부터 만장일치적인 일반의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루소는 그러한 인민의 일반의지(General Will)를 전체의지(Total Will)와 구별했다.

루소는 ‘권력은 인민의 일반의지로부터 나온다’는 주장과 함께 ‘인민의 일반의지는 선(善)에 구속된다’고 못 박았다. 다시 말해 아무리 많은 수의 유권자가 동의하더라도 선의 원리에 구속되지 않는 다수의 의지는 일반의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헌법으로 ‘도적질은 정당하다’는 규범을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다. 단순한 이치인 듯하지만, 현실에서 루소의 일반의지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루소의 입장에서 소수가 다수의 결정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그것보다 더 일반의지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종종 민중적 결정 또는 포퓰리즘을 루소가 정당화한다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루소는 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전체주의자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루소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개인들이 상대적인 가치들과 다원성 앞에 놓였을 때는 ‘선(善)에로의 의지’를 가지고 결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결단한다면 다수의 의지는 공동선에 더 가까워진다고 루소는 본 것이다.

루소의 이러한 ‘선(善)의 추구’를 전제하는 인민의 일반의지를 관철하는 민주주의가 바로 심의민주주의 또는 숙의민주주의의 철학적 배경이 된다. 루소로부터 공리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참여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도출하고 이를 자유민주주의보다 더 성숙한 민주주의 원리로 주장해 왔다. 이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 간에는 운명적인 긴장이 존재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왜 숙의민주주의가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는 Liberal democracy로 해석하는 이들과 Freedom and democracy로 해석하는 이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다. 자유민주주의를 Liberal democracy로 이해하는 이들은 민주의 원리가 자유의 원리에 구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럴까.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선명한 대답을 보여준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로버트 노직(R. Nzsick)이었다. 그는 벤덤의 지적 전통을 계승한 공리주의적 자유주의자인 존 롤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노직의 ‘안구추첨(Eye ball Rottery)이론’은 자유와 민주의 갈등적 사례를 논의하는 데 유용하다.

노직은 어떤 미래에 안구이식 수술 기술이 일반화되었을 때를 가정한다. 그때가 되면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볼 수 없는 소녀가 있다면 그것은 소녀의 책임이 아니기에 사회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가 된다. 따라서 평등을 위해 두 눈이 멀쩡한 사람들 가운데 두 명을 추첨해서 한 사람으로부터 한 개 씩의 안구를 뽑아낸 후 소녀에게 이식한다.

이후 한 눈을 제공한 이들을 위해 또 추첨을 해서 역시 안구 이식을 하는 제도다. 이는 민주주의의 평등 원리로서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제도는 정당한가? 그러한 안구 추첨에 동의할 국민들이 있을까.

결국 민주주의에는 민주의 원리로써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자유의 문제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즉 정당한 소유와 자유는 타인에게 피해로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 한, 동의 없이는 다수결로도 침범할 수 없는 자유라는 것이 노직의 주장이었다.

노직의 이러한 주장은 ‘가장 적은 파이의 몫을 차지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높은 비율의 파이의 분배가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정의’라는 롤스의 주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분배가 생산에 기여한 공로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정당한 소유의 침해를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숙의민주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노직의 정의와 롤스의 정의는 사회적 선택의 문제가 되고 만다. 파이를 어떻게 자를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그 파이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이가 가장 많은 몫을 가져 가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민주적 사고는 공동선을 위해 ‘내가 가질 파이의 조각이 어떤 것이 될지 모르게 자르는 것이 정의’라는 민주적 사고를 하는 이들과 양립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이 문제는 자유와 평등의 문제가 민주적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된다. 숙의민주주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다른 질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바로 플라톤이 우려했던 중우(衆愚)정치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중우민주주의로 가기 쉬운 숙의민주주의

중우민주주의를 뜻하는 라틴어 오클로크라시(ochlocracy)는 ‘ochlo’(떼거리)+‘cracy’(통치)의 합성어이며 다른 말로는 ‘mob rule’(떼법)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촛불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은 민주주의다>라는 책도 나왔다.

대부분 진보진영의 정치학자들은 촛불민주주의를 숙의민주주의로 평가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촛불민주주의’는 광우병대책위원회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했다. ‘뇌송송 구멍탁’이라던 미국소 광우병을 지금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천민성, 곧 떼거리 민주주의 ‘오클로크라시’를 잘 말해준다. 촛불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작 숙의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합리적 공론의 장을 벗어나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사실을 미신과 허구로 감싸는 ‘우리식 민주주의’는 숙의민주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민주(民主)를 ‘국민이 주인인 정치’로 교육받고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어원에는 그 어디에도 국민이 주인이라는 개념은 없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국가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근대적 국가개념일 뿐이다. 데모크라시는 아테네 시민들(demos)이 동등하게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krat)는 뜻이다. 근대 민주주의 개념 또한 ‘시민(市民)의 정치 참여’였고, 이때 시민이란 덕성과 책임을 가진 납세자였다.

2006년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탄핵을 기각했을 때 이를 ‘민주주의의 심판’이라며 반겼던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는 ‘민주주의의 파괴’라며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이런 행위는 데모크라시가 아니라 ‘떼법’, 즉 ‘mob rule’이자 오클로크라시다.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타락은 ‘우리식 민주주의’에서 비롯되는 점이 크다. 민주주의의 전제인 ‘책임적 자유’를 ‘계급적 자유’로 보고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부자들과 기득권 보수층의 전유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올바로 정착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숙의민주주의란 강요와 협박의 민주주의가 되기 쉽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여전히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바탕한 자유민주주의이며 자유로 자유를 파괴하려는 자, 민주로 민주를 파괴하려는 자들에 대해서는 법치의 관용을 배제하는 것이 정치적 공동체를 유지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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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2017-11-08 22:36:13
토네이도의 중심은 준 무중력 상태인데 기존의 중력 이론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토네이도의 중심이 설혹 완전히 진공이 된다고 하더라도 물기둥을 10미터 이상은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직경이 거대한 물기둥이 수백 미터의 높이로 형성될 수 있는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노벨 물리학상 후보에 오른 과학자들(김정욱, 김진의, 임지순, 김필립)도 반론을 못한다. 반론을 못하는 이유가 궁금하면 그들에게 물어보거나 이 책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