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 ‘新보수’, ‘三黨 합당’ 에서 길을 찾다
한국당 ‘新보수’, ‘三黨 합당’ 에서 길을 찾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11.21 22:4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위주의 보수 시대는 탄핵으로 종말을 고했다. 신보수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때다.

최근 자유한국당사에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영정과 함께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것이 나란히 걸렸다. 홍준표 대표는 최근 대구에서 열린 ‘위기의 대한민국,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토크콘서트에서 “이 나라를 건국하고, 5천 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줬으며, 민주화까지 이룬 세 분 대통령의 업적을 이어받겠다”고 했다.

세 대통령을 각각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지칭했던 홍준표 대표.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선 독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강단과 결기, 추진력을 보면 대한민국 지도자 가운데 그만한 지도자가 없었다고 생각한다”며 존경한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문제는 김영삼 대통령의 위상이다. YS(김영삼 대통령의 약칭)는 보수 진영 내에서 그 평가가 양극으로 갈린다. 홍준표 대표의 표현처럼 ‘민주화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과거 3당 합당을 통해 군부의 권위적 통치시대를 끝내고 문민정부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이 주장된다. YS는 집권 초반에 86%라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그 만큼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컸다는 증거다.

▲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1월 1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있다. / 연합

한국당 당사의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사진

홍준표 대표의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김영삼 대통령의 ‘민주화 아버지’론은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심판이라는 상황에서 보수의 탈출구를 모색하는 정치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복당한 김무성계와 통합되는 푸른한국당 이재오계 등을 친박과 분리해 아우르려면 역시 민주계 인사들의 정통성을 전략적 노선으로 배치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나왔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김영삼 띄우기가 보수 내에서 컨센서스가 이뤄지기 전에 정략적으로 나온 아젠다라는 점이 걸린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처럼 그 공과가 논의되어야 함에도 이제까지 제대로 평가가 이뤄지지 못한 점은 사실이다.

YS의 공적으로는 금융실명제와 역사바로세우기가 거론된다. 이 가운데 금융실명제는 그 효과에 대해 찬반이 다시 갈린다. 경제정의를 실현했다는 평가와, 한국의 관습적 금융거래 질서를 단칼에 파괴해서 지하경제의 비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 간에 타협점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역사바로세우기 역시, 보수내 그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검찰의 전두환 대통령 불기소 발표에 김영삼 대통령은 ‘쓸데없는 소리’라는 말로 소급입법을 주문해 시행했다.

이로써 내란과 폭동이었던 5·18광주사태는 ‘5·18특별법’에 의해 민주화 운동으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광주사태 청문회에서는 노무현, 이인제와 같은 신인 정치인들이 스타로 떠올랐다.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를 내세워 한국이 본격적으로 국제 자본시장 질서에 편입되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우리 안에 세계화 없는 외부로의 세계화는 국제 표준의 미비로 인해 IMF 사태를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임기 말에 이르면 그 레임덕은 심각해져서 대권 도전에 나섰던 이회창 후보는 YS 탈당을 공개 요구했고, ‘YS 화형식’이 이벤트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진영에서 무엇보다 YS에 대한 평가절하는 그가 92년 미국이 북한 영변 핵시설을 공습하려 했을 때 막아섰다는 것과, 그 결과 북한의 핵무장으로 대한민국 안보가 결정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인식에 착근해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YS의 반대가 주효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NSC에서 최종 검토 끝에 실익이 없다고 판단되어 철회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YS에 대해 보수진영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를 홍준표 대표는 어떻게 보수를 설득해서 분열의 한국당과 보수를 통합시킬 수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홍 대표의 결단이 무조건 틀린 것이라고 폄하하기에는 성급함이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 흐름 속에서 정치적 지형의 변화를 보면 김영삼 대통령의 위치가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산업화 古보수와 민주화 新보수의 결합, 3당 합당

이승만, 박정희 시대는 권위주의 통치시기였다. 이승만은 국민소득 80달러도 안 되는 나라에 2000달러 정도에 달하는 민주주의를 장착시켰다. 대한민국은 스위스보다 30년 앞서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고, 6·25전쟁 기간에는 일본 수준의 노동법을 도입했다.

당연히 국민들이 그러한 민주제를 내면화하기에는 역사적, 문화적 경험이 일천했던 반면, 사회주의 경험은 익숙한 것이었다. 당연히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권위주의 통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국민의 민주주의 훈련과 제도는 4·19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초래했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주적으로 등장해서 민주적으로 물러난 대통령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러한 4·19 과정에서 이승만 편에 서지 않았다. 그는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자유당을 탈당해 동지들과 민주당으로 이적했고 4·19 이후에는 여당인 민주당 의원이 됐다.

YS 민주계의 시작이었다. YS는 집권 후인 1994년, 4·19를 의거에서 혁명으로 격상시켰다. 그런 YS는 박정희 대통령과도 정적의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고 YS가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반공투사이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정치사에서 이승만을 공화주의 모색기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를 권위주의 통치시대로 이해하고 김영삼을 우파 리버럴, 김대중을 좌파 리버럴로 정의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3당합당은 우파 리버럴로 가름할 수 있는 YS 민주세력들과 권위주의 산업화 세력 간에 정치적 대타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어차피 80년대 후반 시대정신은 중산층의 대두로 피플파워라는 민주와 자유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대세였다.

권위주의 통치세력은 군사독재정치라는 프레임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웠고, 87직선제 개헌을 통해 문민시대 권력 이양을 준비하던 때였다. 이때 김영삼은 과감히 결단했던 것이다.

3당합당 결과 YS는 헌정 사상 첫 번째 국민 직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위대한 문민정부라는 타이틀이 뒤따랐다. 이는 권위주의 통치세력의 헤게모니를 우파 리버럴로 이어받고 이제 보수라는 기준은 더 이상 5, 6공일 수 없었다. 하지만 녹록지만은 않았다.

YS는 5공세력과 충돌했다. YS는 군사 쿠데타를 예방하기 위해 군 출신 엘리트들인 하나회를 숙청했다. 이로부터 군 출신 엘리트들의 반발이 나오고 급기야 전두환으로부터 ‘주막 강아지’라는 혹평을 YS는 들어야 했다. 정치 감각이 남달리 탁월했던 YS는 그런 상황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전두환을 향해 ‘골목 강아지’라고 받아쳤다.

이 헤게모니 투쟁은 결국 ‘역사바로세우기’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한국 정치의 보수적 흐름은 YS를 중심으로 하는 우파 리버럴, 즉 서교동계와 DJ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 리버럴, 즉 동교동계로 양분됐다.

이때 전통적 보수세력이라 할 수 있는 3공 박정희 추종세력과 5공 전두환 추종세력 간에 분화가 생겼고, 이들은 YS를 ‘사쿠라 보수’로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즉 권위주의 古보수세력은 문민 新보수를 철없는 리버럴 자유주의자들로 밀어내면서 상대적으로 YS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회창을 자신들의 ‘대리 집사’로 삼았지만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패배하고 차떼기당의 오명을 남기면서 그 정치적 생명력이 끝났다.

이후 우파 리버럴 新보수는 이명박을 중심으로, 권위주의 古보수는 박근혜를 중심으로 진영이 갈라지는 양상을 노정했다. 그 경쟁의 결과는 우파 리버럴의 승리였다.

하지만 권위주의 古보수는 이명박의 통치운영을 ‘실용주의’라고 비판하고 대결 양상을 지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파 신보수 리버럴들은 YS로부터 정치적 유산을 받은 것이 없었기에 정무적 능력들이 일천했다.

MB정부는 실용과 테크노크라트 위주의 통치행위는 국가통치가 아니라 기업경영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는데, 광우병사건과 천안함사건, 연평도 피격 시에 보여준 이명박 정권의 태도는 한심한 것이었다. 보수의 진영은 중도적 신보수 리버럴과 안보 중심의 古보수로 양분됐다.

보수 우파의 지지도 하락은 2012년 대선에서 보수는 그 어떤 선택지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권위주의 古보수의 아이콘,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맞아야 했다. 이로써 친박이라 불린 세력들은 2012년 대선의 승리를 ‘정권연장’이 아니라 ‘정권교체’로 정의하기를 선호했다. 보수내 단층(斷層)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권위주의 古보수는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시 출발점으로 가야 하는 보수

소통의 스킬도 모두 권위에 의존했다. 세월호로 망가진 출발은 결국 친중적 흐름을 타고 한미동맹에 이상 징후를 드러낸 후  최순실게이트에 의해 탄핵심판으로 몰락했다. 보수진영 자체가 와해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 보수는 자신을 정의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리고 실패한 정치세력이 아니라 성공한 정치세력을 찾아내 그 전통을 이어받아야 하는 문제를 갖게 됐다. 그 출발점은 더 이상 몰락한 古보수로의 반동이 아니라, 건국과 산업화, 그리고 그들과 3당합당으로 민주화의 시대를 연 新보수의 태동점이라는 인식은 자연스럽다.

이제는 더 이상 보수도 독재와 민주, 반공 대 친미라는 개념으로 투쟁할 것이 아니라, 누구의 민주가 더 올바른 민주이며, 누구의 안보가 더 올바른 안보인지로 전선을 구축해야 할 시기에 온 것이다. 그러한 고리로 홍준표 대표와 한국당이 민주화의 아버지로 김영삼 대통령을 수용하겠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제 보수의 진영도 시대적 인식을 새로이 해야만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체로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우리의 시대정신을 모두 상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박정희, 이승만의 사상을 계승 발전하더라도 그들에 갇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박정희 유일사상’에 갇힌 보수들을 본다. 다른 정치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박근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보수내 엘리트 지식인들이거나 성공한 자산가들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홍준표, 김무성과 같은 정치인들이라면 그저 ‘무능한 김영삼의 떨거지들’이라는 배타적이고도 편리한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어떤 투쟁력도, 시대의 불의에 맞서 분연하게 떨쳐 일어날 생각도 용기도 없는 관조자들임을 모른다. 이런 이들이 보수에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한다면 보수에는 비전이 없다. 과거와 같이 권위주의 古보수의 입맛에 맞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Rescue Korea 2018-01-28 11:33:47
YS는 보수가 아니다. 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