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기의 도전을 깊은 학식으로 이겨낸 명재상 신숙주(申叔舟)
격변기의 도전을 깊은 학식으로 이겨낸 명재상 신숙주(申叔舟)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11.2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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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식인 사회에는 지금도 옛날 임금에게 한결같은 충성을 바친 인물을 칭찬은 커녕 비난하는 습성이 있다. 그것은 실은 도학(道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성리학의 오랜 폐습이 무의식 중에 이어진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명분과 도덕만을 앞세워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려는 오만한 태도 또한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신숙주의 본 모습을 보려면 바로 이런 도학의 안경부터 벗어야 한다.

아버지 신장(申檣)이 공조참판을 지냈으니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실록 졸기(卒記)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기량(氣量)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서 글을 읽을 때 한 번만 보면 문득 기억했다”고 한다.

게다가 신숙주는 넓은 아량의 소유자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처음 맡은 보직이 전농 직장(典農直長)이었는데 이조(吏曹)의 담당 관리가 깜박하고 그에게 첩(牒)을 주지 않았다. 첩이란 일종의 공무원증과 같은 것이다.

사헌부에서 그 관리를 탄핵해 파직시켰는데 신숙주는 스스로 이조에 나아가 “그 관리는 첩을 전했지만 내가 스스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그 관리는 복직됐지만 신숙주는 파면당했다.

세종 23년(1441년) 신숙주는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제수됐다. 그의 가장 큰 행운은 세종이라는 성군을 모시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주로 예조에서 활약을 했다. 실록이 전하는 당시 그의 활약상이다.

“신숙주는 천자(天資)가 고매(高邁)하고 관후(寬厚)하면서 활달(豁達)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하고 의논(議論)에 항상 대체(大體)를 지녀서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하지 않았다. 대의(大義)를 결단함에 있어 강하(江河)를 터놓은 것과 같이 막힘이 없어서 조야(朝野)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오랫동안 예조(禮曹)를 관장하여 사대 교린(事大交隣)을 자신의 소임을 삼아 사명(詞命)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정음(正音)을 알고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번역하였으며, 한음(漢音)을 배우는 자들이 많이 이에 힘입었다.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무릇 그 산천(山川) 관제(官制) 풍속(風俗) 족계(族系)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를 지어 올렸다. 세종이 <오례의(五禮儀)>를 찬술했으나 아직 반포하지 못했는데 임금이 신숙주에게 명해 간정(刊定)하여 이를 인행(印行)하게 했다. 문장(文章)을 만드는 것은 모두 가슴 속에서 우러나왔고, 각삭(刻削)을 일삼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일을 할 줄 아는 신하였다. 후에 신숙주는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서장관(書狀官)이 됐다. 이 때의 일화는 그가 문약(文弱)한 선비라기보다는 강명(剛明)함을 갖춘 대인배였음을 한 눈에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사신의 일을 마치고 귀국할 때 태풍을 만나 모두 공포에 떨었으나 그는 홀로 태연자약하여 이렇게 말했다.

“장부(丈夫)가 사방(四方)을 원유(遠遊)함에 이제 내가 이미 일본국(日本國)을 보았고, 또 이 바람으로 인하여 금릉(金陵)에 경박(經泊)하여 예악 문물(禮樂文物)의 성(盛)함을 얻어보는 것도 또한 유쾌한 것이 아니겠느냐?”

▲ MBC에서 방송된 조선왕조실록 재연 프로그램 <툰드라쇼>에 등장하는 신숙주.

선비이면서 강명한 대장부

금릉이란 명나라 초의 수도였던 남경(南京)을 가리킨다. 아마도 예전에 표류한 배들이 중국 남쪽 해안으로 표류해 간 일들이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맹자(孟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이런 것이다.

이 때의 일을 기반으로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異同),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등을 모두 기록해 그후 조선의 일본 정책의 근간이 됐다. 특히 이 책에서 신숙주는 일본과의 우호가 궁극적으로는 조선에게도 도움이 됨을 강조한 바 있다.

귀국길에 동승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선원과 승선한 사람들이 모두 “아이 밴 여자는 배가 가는 데에 꺼리는 바인데 오늘의 폭풍(暴風)은 이 여자의 탓”이라고 하면서 바다에 던지고자 했으나 신숙주 홀로 “남을 죽이고 자기 삶을 구하는 것은 차마 할 바가 아니다”고 했는데 얼마 뒤에 바람이 잦아들어 일행이 모두 무사했다. 세종 때 그는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집현전의 직제학(直提學) 등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새로운 계기가 찾아온 것은 1452년(문종 2년) 세조(世祖-당시 수양대군)가 사은사(謝恩使)가 돼 중국에 갈 때 서장관으로 따라갔다. 이미 이 때 세조는 신숙주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해 함께 갈 것을 청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세조와 정치노선을 함께 하게 된다.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신숙주는 말 그대로 초고속 승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출발해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세조가 즉위하자 공신으로 책봉됐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낸 다음 세조 4년에 우의정, 그리고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무략에도 조예가 있어 당시 북쪽 오랑캐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자 세조는 정토(征討)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의견이 갈려 갈피를 못잡았는데 이 때 신숙주가 홀로 계책을 세워 치기를 청했다. 이에 신숙주가 몸소 강원도 함길도 도체찰사(江原道咸吉道都體察使)가 돼 나아가 토벌에 성공했다.

세조가 죽고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했다. 세조의 유명(遺命)으로써 원상(院相)을 설치하여 신숙주도 참여하였다. 원상이란 일종의 원로원 정치로 임금이 아직 어릴 때 대비의 수렴청정과 더불어 임금을 보좌하는 정치기구다.

신숙주 생애에서 예종의 시대는 어쩌면 가장 힘든 시기였는지 모른다. 예종은 아버지 세조와 정치를 함께 했던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그룹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예종은 마치 연산군의 전조(前兆)를 보여주는 듯했다. 실록 졸기(卒記)에 이런 표현이 있다.

“예종조(睿宗朝)에는 형정(刑政)이 공정함을 잃었는데 광구(匡救)한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한 마디로 예종의 횡포가 극에 달했는데 원상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바로 잡으려 힘쓰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원상이라고 해서 임금의 폭정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신숙주에 대한 비판은 다른 지점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신숙주는 한명회와 정치 노선을 함께 했다.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신숙주는 늘 한명회의 바로 반걸음 뒤에 있었다.

정치적 선택과 관련된 그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훗날 한명회에 대한 비판의 절반은 그를 향했다. 하지만 당시 실록의 사관들도 업적이 큰 신숙주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부담스러운 듯 아들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는 것으로 신숙주에 대한 비판을 대신한 듯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넷째 아들) 신정(申瀞) 또한 주살을 당했으니,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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