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구한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를 기억하며
시대를 구한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를 기억하며
  • 이종혁 자유한국당 최고위원
  • 승인 2017.12.13 1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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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에게 역사 인물 중 부동의 존경 대상 1위는 세종대왕이다. 오늘날 일본 국민에게 역사 속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 하면 바로 사카모토 료마를 떠올린다. 그는 천황도 아니고, 유명 정치인도 아니었다. 31살에 자객의 칼에 암살되는 무명의 젊은이였다.

그런 료마에 일본인은 왜 열광하는가? 전후 부흥기를 맞았던 일본이 또다시 침체기로 빠져든 요즈음, 책으로 TV 드라마로 왜 일본인은 또다시 료마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 하는가? 일본을 열강의 나라로 만든 역사적 계기, 메이지 유신의 단초를 연 사람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 일본 도쿄 시내에 있는 시카모토 료마의 동상

풍운아에서 선구자로

료마는 1836년 11월 15일(음력) 오늘날의 고치 현인 ‘도사번’에서 하급 무사계급인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와 어머니 사카모토 코우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카모토 집안은 오랜 기간 상업에 종사해 상당한 재력을 일궈 어린 료마는 유복하게 성장했다.

이런 료마가 외부 세계에 눈을 뜨고 일본의 개혁에 대해 크게 인식하게 된 계기는 자신이 성장한 도사번을 떠난 후 서구의 문물을 접하면서다. 일본 해안에 출현한 구로후네(黑船, 서양의 흑선함대)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문명이 몰려오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사무라이로서 검술을 익히며 살았다. 또한 당시로서는 자신이 속한 번을 떠나는 것이 극형에 처해지는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출생한 도사번을 벗어나 개화파이자 군함 부교 나미(軍艦奉行竝) 직책에 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만나고 그의 새로운 문명에 관한 견식에 감복해 그 자리에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듯 료마는 전통 일본 사무라이적 인식과 근대적 사고가 공존했던 인물이다.

이런 료마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개혁의 노선 투쟁과 함께, 누적되어 온 양 지역의 해묵은 갈등으로 인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1865년 어느 무렵이었다.

료마는 사쓰마번의 나카오카 신타로와 조슈번의 리더격인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회동을 주선하고, 조슈번이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쓰마번이 명의를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료마는 자신의 회사를 통해 조슈번의 무기 구매를 주선한다. 이로 인해 조슈번은 같은 해 8월 중순 영국의 상인에게서 총기 7300정을 매입할 수 있었다.

낡은 체제의 질서를 통합의 비전으로 돌파

심한 갈등관계에 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이러한 료마의 물밑작업으로 상호간 협력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1866년 1월 21일 드디어 료마의 주선으로 교토에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회담 끝에 사쓰마와 조슈는 동맹을 체결하게 되니 이를 ‘삿쵸 동맹’이라고 한다.

당시 료마가 제안한 두 지역의 동맹 명분은 세 가지. 첫째는 사쓰마와 조슈 모두 새로운 문명사조의 수용을 위해 개국정책으로 입장을 선회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양측 모두 서양과의 전쟁을 통해 신무기의 위력을 인식하여 새롭게 무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니 상호간의 반목은 위험하고, 셋째는 두 번(藩) 모두 에도 막부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동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카모토 료마의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또 하나의 큰 업적은 ‘대정봉환(大政奉還)’에 관한 구상을 내놓고 1867년 2월 하순부터 도사번의 참정(參政)을 설득하여 ‘대정봉환’을 도사번의 공식 입장이 되게 한 것이었다.

이렇게 메이지 유신의 큰 족적을 남긴 풍운아 료마는 1867년 12월 10일 메이지 일왕(日王)이 ‘왕정복고(1868)’를 선포하기 1년 전, 교토의 한 여관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사망한다.

당시 31세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요절한 풍운아 정객에 대하여 일본인들은 ‘근대 일본의 길을 연’ 국민적 영웅으로 열광한다.

심지어 일본의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나는 중학교 때부터 그를 숭배하며 마음속으로 따라 배우기를 했다”라고 할 만큼 현대 일본인들에게도 크나큰 영향을 남기고 있다.

그는 막부와의 내전에서 앞장서 전투에 나간 적도 없다. 그렇다고 선 굵은 정객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생애가 너무 짧아 무엇인가 부족한 면이 있다. 그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역사적 전환기에 있던 일본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전환의 시대에 일본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한 영웅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한국의 사카모토 료마를 기다리며

그런 료마의 비전이 앙숙 간이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하나의 동맹으로 묶어 250년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만들었고, 이런 힘들이 뭉쳐 메이지 유신을 가져왔다. 이렇듯 료마의 비전과 이를 이룩하기 위한 그의 열정은 마침내 근대강국 일본을 가져온 초석이 되었다.

‘어느 봄날 찬란하고 아름답던 벚꽃 잎이 떨어져 잠시 부는 봄바람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그렇게 짧고 치열하게 살다가는 것이 사무라이의 삶이라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정서와 료마의 인생 노정이 맞아 떨어진 면이 있지만, 료마는 일본에 대한 뚜렷한 비전으로 메이지 유신이라는 큰 변혁을 이룩하는 데 큰 획을 그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도, 그리고 정치적 보수 진영도 일본 막부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적삼아 갈가리 찢어져 있다. 이러한 때에 보다 원대한 비전으로 갈등 세력들을 통합할 인물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한 선구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나의 안위보다 시대와 사회와 국가를 걱정해서 공의의 장에 이끌려 나가는 호연지기의 지사(志士)들이 있어야만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다.
누가 이 암울한 시대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갈등을 넘어 통합의 비전을 가진 료마와 같은 인물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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