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학재로 정승에 오른 정인지
뛰어난 학재로 정승에 오른 정인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12.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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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정인지(鄭麟趾)는 조선이 세워진 후인 1396년 경상도 하동에서 났다. 그리고 태종1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18세 때였다. 이 해 3월 11일자 춘추관 영사 하륜, 지사 정탁, 예조판서 설미수 등이 의논하여 급제자들의 답안지 중 가장 뛰어난 3인을 태종에게 올렸다.

태종이 다시 한번 “3개의 시권(試券-답안지) 중에는 잘되고 못된 것을 가릴 수 없는가”라고 묻자 신하들은 “두 개는 비슷하고 하나는 조금 처집니다”고 답했다. 태종은 “그렇다면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며 두개의 시권을 내밀게 한 다음 하나를 골라 집었다. 정인지의 시권이었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 8월 27일 상왕 태종은 직접 세종에게 “크게 될 인물이니 중용하라”며 정인지를 병조좌랑에 임명한다. 반면 세종1년(1419년) 1월 19일 병조좌랑 정인지는 명나라로부터 세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외교문서 고명(誥命)을 맞는 의식을 행할 때 황색 의장(儀仗)을 빼놓았다가 예조좌랑 김영, 병조정랑 김장 등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됐다.

주 책임자로 밝혀진 인지는 열흘 후 장40대를 맞고 병조좌랑에 복귀한다. 세종3년 3월 28일에 정5품 병조정랑 정인지는 또 다시 투옥된다. 상왕 태종의 지시였다. 병사들의 비상조치에 대비한 출동훈련을 지시했는데 정인지가 이를 태만히 했다가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후에도 정인지는 사소한 잘못으로 자주 견책을 당하곤 했다. 이는 정인지에게 관리로서의 재주, 즉 이재(吏才)가 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학문적 재능, 즉 학재(學才)가 뛰어난 정인지는 집현전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세종은 종종 극비를 요하는 심부름을 자신의 비서실장인 지신사 대신 신뢰하는 집현전 관원에게 시키기를 좋아했는데 실록을 보면 세종7년부터 정인지가 주로 그 임무를 맡았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 태종의 신하가 아니고 사실상 세종 자신이 키워낸 신하로 정인지는 김종서와 더불어 제1세대의 대표주자였다.

세종9년 3월 20일 인지는 이미 관직에 나온 신하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시(重試)에서 문과 장원급제자의 문재(文才)를 다시 한번 보여줌으로써 정4품 직전(直殿)을 뛰어넘어 종3품 직제학에 오른다. 그리고 9월 7일 인지는 세자(-훗날의 문종)의 교육을 맡는 좌필선으로 임명된다.

세종10년 12월 20일에는 집현전 전담관리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정3품 부제학에 오른다. 당상관이 된 것이다. 그의 승진 배경에는 이처럼 고비고비에서 학재가 큰 역할을 했다.

▲ 수목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등장한 정인지 / 드라마 영상 캡처

행정은 서툴러 실수연발

반면에 관리로서의 재능은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세종17년 6월 29일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지방행정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해 12월 17일 영의정 황희는 “충청도 감사와 수령들이 농정에 실패하고 현장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과거에 비옥했던 땅들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세종은 “인지는 내직에 있을 때에도 문학만을 전담했고 정사에 경험이 없어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인지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다고 하니 죄를 묻지 말라”고 답한다. 다음해 7월 21일에도 정인지가 나름대로 흉년 구제책을 올리자 황희는 현실성이 없음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정인지의 구제책을 기각시켜버렸다.

사실 이렇게 되면 정승은 물론이고 판서에 오르는 데도 큰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에서 예문관 제학과 집현전 제학을 거쳐 마침내 1440년(세종22년) 5월 형조판서에 오른다. 그러나 판서 중에서 요직인 이조나 병조판서는 아니었다.

1450년 2월 17일 세종이 훙(薨)했다. 5일 후 문종이 즉위했다. 다음해인 문종1년 자신의 라이벌 김종서는 그해 10월 우의정에 제수된다. 같은 날 김종서의 콤비인 황보인은 영의정에 오른다. 반면 정인지는 좌찬성으로 김종서의 바로 아래 직급이었다.

문종이 즉위 2년만인 1452년 5월 14일 훙하고 4일 후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단종 즉위년(1452년)에 정인지는 병조판서에 오르지만 당대 실력자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의 배척을 받아 한직인 중추부 판사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1년 후인 1453년 10월 8일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아마도 이 정난이 없었다면 정인지는 그후 한직을 맴돌다가 관직을 마쳤을 것이 분명했다. 정난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자신을 억압하던 김종서는 죽어 대역죄인이 됐고 정난공신에 오른 정인지는 하동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좌의정이 됐다.

사실 정인지는 정난에 관여하지 않았고 신망이 있는 중신(重臣)으로 반대하지 않은 공로였다고 할 것이다. 2등 공신에 책록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3년 후인 1456년 9월 세조는 흔히 사육신 사건으로 알려진 상왕(단종)복위기도사건이 실패로 끝난 후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명을 내린다. 사건 관련 주모자들의 부인이나 딸들을 정난공신들에게 나눠주도록 한 것이다. 그중에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 딸 내은금, 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귀속되었다.

좌의정이라고는 하나 실권은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정난공신들이 쥐고 있었다. 1458년(세조4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환급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됐다.

이런 점에서 정인지는 유학자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459년에는 취중에 직간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됐다. 그러나 그 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환급받고, 그 이듬해 하동부원군에 복직됐다. 조금은 위태로운 처신이었다.

성종9년에 83살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흥미로운 것은 실록 졸기(卒記)에 그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주로 세종 때의 일만 기록돼 있고 세조, 예종, 성종 때의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아부를 몰라 심지어 취중이긴 하지만 임금 세조에게 “너[爾]”라고 했다가 봉변을 당할 뻔하기도 했던 성품의 소유자였으니 세상과 비켜지낸 것으로 보인다. 대신 그가 관심을 보인 쪽은 재산 모으기였다. 졸기에 있는 그에 관한 평가는 그래서 따뜻하지만은 않다.

“정인지는 성품이 검소하여 자신의 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여러 만석(萬石)이 되었다. 그래도 전원(田園)을 널리 차지했으며 심지어는 이웃에 사는 사람들의 것까지 많이 점유했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이를 그르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정숭조는 아비의 그늘을 바탕으로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며, 그 재물을 늘림도 그의 아비보다 더하였다.”

그에게는 현조(顯祖) 숭조(崇祖) 경조(敬祖) 상조(尙祖) 네 아들이 있었다. 그중 맏이 현조는 세조의 딸인 의숙 공주(懿淑公主)에게 장가들었고 예종을 사실상 독살하고 성종을 세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해 하성군(河城君)에 봉(封)해졌으며 둘째 숭조도 좌리공신에 참여해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막내 상조의 아들 정세호(鄭世虎)의 딸은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과 혼인했는데 그 사이에서 난 셋째 아들이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선조(宣祖)다. 사족(蛇足)이지만 왕위에 오르기전 선조의 군호도 정현조와 같은 하성군(河城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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