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中日전쟁, 다시 연구해야
잊혀진 中日전쟁, 다시 연구해야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 승인 2017.12.15 1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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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37년 7월 7일 중국 베이징시 외곽 노구교(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몇 발의 총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 간에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중일전쟁은 장기지구전 형태로 진행되다가 급기야 미국의 금수조치에 화가 난 일본이 하와이 미 해군기지 진주만을 폭격(1941.12.8)하면서 전화(戰火)가 태평양으로 확대, 비화되었고 미국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따로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아마도 1949년 중국 대륙의 공산화가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과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충격적인 혁명적 사건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중일전쟁이 내포한 중대한 역사적 함의는 제국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의 독립이란 기쁜 선물을 안겨줬으며 중국 대륙의 공산화란 슬픈 비극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중국의 공산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6·25동란 때 모택동의 중공군 참전 결정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만약 중일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태평양전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주권회복은 가능했었을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그렇지만 중일전쟁은 탈냉전시대에 주류 역사학의 기술에서 배제되었으며, 미일간의 태평양전쟁에서의 참전 무용담과 정신대(위안부)의 사과 논쟁 속에 중일전쟁의 진상과 기록은 묻혀 버린 채 망각되고 말았다.

중일전쟁이 역사적 함의는 일본제국의 패망으로 한국의 독립이라는 기쁜 선물과 중국 대륙의 공산화라는 슬픈 비극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에 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인들은 일본군들을 일본악마(日本鬼子)라고 불렀다. / 출처 : 維基百科

역사에서 사라진 중일전쟁

결국 중일전쟁의 역사 서술은 태평양전쟁의 무거운 그늘에 가려지고 일본의 정신대(위안부) 문제와 과거사 논쟁에 매몰된 나머지 그 참혹한 전쟁이 후대에 주는 역사적 진실과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가 소홀히 취급되고 있으며, 단순히 한국독립운동사의 부문에서 간헐적으로 취급되지만 중국현대사 전공자들의 논문 주제의 흥미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중국 군부군의 장교로 항일전쟁에 참전했으며 미국에 건너가서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대학 교수가 된 레이 황 교수의 아래 발언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중국의 항일전쟁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는 대부분 비판을 받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중국이 벌인 투쟁의 성격과 범위를 통찰할 만큼 깊이 있는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실패한 진짜 원인을 파악하기엔 너무 피상적일 뿐 아니라, 1차 사료에서 뽑아낸 거리낌 없는 관찰과 수량 데이터는 문제의 근원과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은 중국 문명 전체가 스스로를 갱생시킨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주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레이 황/구범진 역, <장제스 일기를 읽다>(푸른역사, 2009), p.158.

1992년 8월 24일 한국은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고 그 이후 대만과의 학문적 교류의 단절은 더 심화되고, 중국 대륙으로부터 불어닥친 황사바람만큼 중국 본토와의 학문적 교류가 증가되면서 사회주의 모델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모택동이 추진했던 문화대혁명의 잔인한 기억들은 모두 사라지고, 다시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의 저자 애드거 스노우(Edgar Snow)식의 중국담론이 향후 30년 동안 우리 동양사와 중국근현대사 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세하게 된다.

중일전쟁의 중대성을 시민사회의 담론으로 확산시키지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첫째로, 무엇보다도 한국이란 주체가 빠져 있다는 점과 둘째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과 마치 별개인 것처럼 인식되는 왜곡된 지적 풍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정확한 역사용어의 사용이 대중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것을 물론 과거에 대한 역사 인식에 결정적 오류를 가중시킬 수 있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분리될 수 없으며,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한 묶음으로 처리하여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심지어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까지를 묶어서 15년전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시점이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에서가 아니라 1937년 7월 7일, 중국 베이징의 노구교에서 출발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는 것이다(문정인·김명섭 외,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제5장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일전쟁의 발발 원인을 돌이켜 볼 때 그 시점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지만 한편으로는 만주사변을 전후로 한 서구열강들의 일본에 대한 수수방관적 미온적인 태도가 일본의 침략적 팽창주의를 제어하지 못한 결과 중일전쟁으로 악화되었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 외교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전후 일본 외교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중일전쟁이야말로 외교의 참담한 실패를 자책하고 있다(오구라 가즈오, <일본 외교의 과오>). 재론의 여지가 없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도발 책임의 핵심에는 일본 군부가 중심부에 도사리고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전 일본 프랑스 대사인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가 말했듯이, 전쟁은 ‘군부의 폭주’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은 항상 군부의 책략인 동시에 외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오구라 가즈오, <일본 외교의 과오>, p.9), 과연 만주사변의 발발로 인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의 길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자동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열리고 말았던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전쟁의 신’이 유도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관계없는 불가피한 역사과정이었던가? 이런 의문점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만주사변의 원인이 된 만몽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을 검토하는 문제가 필요하다. 러일전쟁 이후 만몽은 “일본과 특수한 이익범위에 속한 특수관계에 있으므로 일본의 특수이익에 종속된다”는 논리가, 일본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일방적 논리로서 중국이나 서구열강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억지 논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에서 꾸준하게 확대·재생산되었다.

중일전쟁을 촉발한 노구교 사건(1937년), 일본은 이 사건으로 중국이 계획적으로 무력 대항한 것으로 단정하고 중일전쟁을 선포했다. 사진은 지난 2014년 노구교 사건 77주년 기념식이 열린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주변의 모습

일본 군부와 중국 민족주의의 충돌

제국일본은 군부의 독주를 통해 아시아의 맹주 혹은 패자가 되려고 했는데, 이것은 영국이나 미국의 협조 및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증과 다름 아니다.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1886~1949)와 같은 관동군 참모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하면서 향후 대소전과 대미전의 결전을 예상했으며, 그 전쟁들은 지구전이 될 것이므로 만주와 몽고 같은 내륙을 병참기기로 삼아서 지구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일본 사회에서 설득력을 가졌다는 점이 중일전쟁이란 비극의 씨앗을 잉태했다.

또 만주사변을 전후로 한 중일의 외교관계에서 중일전쟁으로 가야만 했던 역사적 배경을 놓고 볼 때 중일 양국의 외교적 입장이 타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 빈틈을 노리고 일본의 군부와 중국의 민족주의가 파고들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대일외교는 민족주의 열풍에 휩싸인 대중의 기대감과 정권 담당자의 대일정책에서 괴리감이 너무 컸다는 점에서 실책을 범했다. 우선 중국이 처한 환경을 전제로 한다면, 외국의 군대가 조차지에 상주하고 있었고, 각종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상태였으며, 독자적으로 군사적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일본군과 전면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국민당측이든 공산당측이든 모두가 인정한 점이다.

30년대 일본의 만주 진출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지위가 급속히 추락하면서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이권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영국이 아시아에서 퇴각함으로써 동북아에서 세력균형이 붕괴되고 힘의 진공상태가 초래된 점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동북아의 영향력 차원에서 미국은 영국이 물러간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지만, 일본과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아직은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국은 일본의 만몽 및 중국정책에 대해 큰 비용도 들지 않고 희생도 불필요했던 ‘불승인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전 중국인들을 더 애타게 했을 뿐이다.

중국에 대한 국제적 원조가 대공황으로 인해 부족해서 일본에 대한 중국의 저항력이 역부족이었다고 하더라도 대일외교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대일외교는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중국 민중의 정서와 그들이 원한 기대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비록 준전시상태였다고 하더라도 정부와 국민간의 거리를 적절하게 메꾸지 못했고, 그들을 설득하지 못한 점에서 내정에서 실패한 것이다.

만주사변의 발발을 전후로 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대응방식은 반일민족주의운동을 고양하면서 일제불매운동, 일화폐사용금지, 일인배척운동 등을 벌였고 간헐적으로 무력투쟁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국제연맹과 서구열강에 읍소하는 외교방식 등을 병행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기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여기에다가 일본군이 물러갔을 경우,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 모택동의 공산당은 내전을 준비해야 했기에 힘을 비축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중일관계는 고대중국의 삼국지처럼 물고 물리는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제국일본의 패망의 근본 원인은 정당정치가와 일본 외무성이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결과에서 초래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헌법상 천황의 통수권이 책임정치로부터 독립되었기에, 군부가 제국헌법상의 통수권을 구실로 해서 정책결정상의 실권을 장악하더라도 그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이것이 결국 일본 파시즘의 등장을 가능케 했고, 군국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즉 천황의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독재권력이 일본 제국의 파멸을 몰고 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만주사변을 전후로 해서 일본 외무성은 외교권을 침해한 군부의 잘못된 행위를 준엄하게 꾸짖거나 엄중한 징계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30년대 일본 외교는 브레이크 없이 무한질주하는 군부가 저질은 불법행위를 사후승인하면서 군부와 타협을 거듭해 외교의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대만과 학술교류, 자료수집 확대해야

더 적극적으로 대만과의 학술연구교류와 자료수집을 진척해 중국대륙중심의 학술적 편향성을 극복해나가야 중일전쟁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측의 자료는 논외로 하고) 두 가지만 거론해 본다.

첫 번째로, 중일전쟁으로 가는 길목을 튼 서안사건에 대한 보다 심층적 연구가 아쉽다. 주모자 장학량은 49년 장개석의 국부군이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참배한 이후 대만으로까지 끌려가서 감금되었고, 나중에는 장개석의 사후 석방되어 하와이에서 장수(長壽)의 생을 마감하면서 많은 인터뷰와 귀중한 회고록을 남겼다. 그런데, 장학량의 자서전에 대해 국내에서는 거의 번역·소개가 되지 않고 있다.

두 번째로 장개석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다. 특히 90년대 말, 대만에서 장개석 문서가 개방되면서 서방 연구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서방에서 장개석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우리 동양현대사 학계에서는 대만 측의 연구 동향을 소개하는 모습에서 미진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장개석평전>(조너선 펜비/노만수 역)과 <장개석의 일기를 읽다>(레이 황/구범진 역) 등이 번역 소개된 점은 다행한 일이다.

끝으로 제국일본 패망이 중국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은 심대하다. 30년대의 제국일본이 내건 ‘대동아공영권’은 일본만의 자기도취(自己陶醉)의 구호로서 동북아에서 다른 민족국가들은 동의하고 협조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이 자칭 G-2국가로서 군림해 동북아의 맹주 노릇을 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및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다.

그 이유는 중국이 국제적으로 인정된 자유민주주의적 시장질서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데 공산당 1당독재체제로서 자국 중심의 전통적 중화주의식 팽창주의를 부활시키려한다는 주변 국가들로부터의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동북아의 분위기는 중국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키면서 동시에 북한의 핵실험 및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더불어 갈등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일전쟁 80년을 맞이해 중국은 한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의 노력이 필요하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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