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100주년, 무엇을 보아야 하나?
러시아혁명 100주년, 무엇을 보아야 하나?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 승인 2017.12.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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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은 20세기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 혁명으로 평가될 만큼 전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반응은 극단적이었으니, 한편으로는 뜨거운 찬양과 지지를 보냈으나, 또 한편으로는 격렬한 분노와 반감을 연출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1917년의 러시아는 그야말로 혁명의 해였다. 1914년부터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했으며 국내에서는 사상자의 증대와 식량난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2월 22일과 23일 양일에 걸쳐 제정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여성들의 시위는 급기야 전제정(專制政) 타도와 전쟁 종식을 요구하면서 대규모로 확산되었다.

시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조차도 상관의 명령을 거부했고, 차르(러시아 황제)의 대신들이 시위대에 의해 구금되면서 정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전선 시찰차 수도를 비운 상태였다. 3월 15일 차르는 퇴위를 선언했다. 이로써 1613년 창건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진 것이다.

▲ 1917년 시작된 소비에트 러시아는 내부의 온갖 모순이 누적되어 1991년 74세의 나이로 붕괴되었다. / 사진출처 : Культура24

레닌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러시아의 2월 혁명은 2원적 권력구조가 등장한 것이 큰 특징이다. 즉 의회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고, 또 하나의 권력축인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결성되어 명령 제1호를 발동했다.

명령 제1호에는 병사의 소비에트 대표 선출 절차나 병사들의 시민권 확보, 장교의 학대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명령 제1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국가두마 군사위원회가 발포한 모든 명령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발포한 명령 및 포고와 상충하지 않은 경우에만 따르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병사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취지였으나 사실상 혁명진영의 모든 무장력을 소비에트의 통솔 아래 두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임시정부가 상부의 권력기구라면 ‘노병 소비에트’는 풀뿌리 민중의 권력기구였다.

임시정부는 전쟁의 종식과 토지분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4월 3일 망명지로부터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낭독하면서 혁명을 사회주의 단계로 밀어붙일 것을 촉구했다.

그것은 트로츠키가 구상한 연속혁명론(영구혁명론)을 수용해 부르주아 민주혁명에 만족하지 말고 내친 김에 사회주의로 바로 이행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레닌이 볼 때, 2중 권력이 임시방편으로서 갈등이 내재했기에 한 쪽의 승리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자유주의-부르주아지 세력이 강대하다고 믿었기에 혁명의 진척을 주저했다.

그러나 8월말에 터진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로 인해 혁명 자체가 위기에 처했고, 그 위기는 볼셰비키로 하여금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치게 만들었다. 결국 또 하나의 혁명이 필요했으며 반 차르 세력의 광범한 연대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레닌은 인민주의자들의 농민사회주의적 강령을 수용한 다음, 9월말에 발표한 ‘국가와 혁명’에서는 직접행동에 의한 권력 장악론을 들고 나와 혁명의 가능성에 회의하는 볼셰비키 당원들을 설득했고, 마침내 트로츠키의 동의를 얻어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11월 무장폭동으로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하게 된다.

이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생전에 산업혁명에서 후진 상태를 면지 못했던 러시아에서 서유럽의 산업국가들을 제치고 첫 번째로 공산혁명이 달성될 줄은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는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빈부격차의 심화와 노사 갈등 등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화되면서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자발적인 무장폭동이 발생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된다.

이 당시의 레닌주의는 서구에서 발아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된 인민주의를 결합해 러시아적 상황에 마르크스주의를 변형·재조정한 것이다. 레닌은 공산혁명을 앞당기기 위해 직업혁명가로 구성된 전위정당인 볼셰비키를 조직, 무장화하고 기타 필요한 이론을 다른 급진주의자들로부터 차용했다.

그에게 마르크스 다음으로 영향을 준 인물이 프랑스 사회주의자이며 혁명가인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였다. 블랑키의 혁명 사상은 소수의 잘 훈련된 활동가가 중심이 되어 독재정부를 구성해야 사회주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레닌의 통찰력에 의해, 전위조직인 직업혁명가 볼셰비키가 주도한 무장폭동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상으로 연결되었다.

집권한 볼셰비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실책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기민하게 내정에 집중했는데, 10월 26일 열린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노동자·농민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고, 평화에 관한 포고령으로 무병합·무배상의 즉각적 전쟁 종식을 선언하면서 독일에 대한 전폭적인 양보를 천명했다. 또 토지에 관한 포고령으로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이 이를 이용하게 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해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 러시아혁명은 한마디로 우리 민족에게 약과 독을 함께 안겨줬다고 볼 수 있다. / 사진출처 : rusvesna.su

한국독립운동에 ‘구원의 손길’

러시아혁명은 한국독립운동에 무엇을 가져다 줬나?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민족에게 약과 독을 함께 안겨줬다고 볼 수 있다. 선진국가들이 외면했을 때, 외로운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물질적 지원과 지침을 준 점에서는 약을 줬으나, 시베리아를 경유해 한반도에 공산당을 세포·조직하게 하고 공산주의의 ‘붉은 뿌리’를 내리게 하여 오늘날 북조선인민공화국을 창설하는 민족적 분단의 고통을 아직도 받게 한 점에서 치명적 독이었다.

우선 주목할 점은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권의 식민지 민족해방전략이다. 그것은 대외정책 중에서 자본주의국가들과의 평화공존정책은 수세적인 것이었지만, 식민지·종속국의 해방 및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은 적극적인 공세전략인 것이 특징이었다.

즉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인 식민지 독립운동을 선전선동함으로써,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모순을 전술적으로 이용해 자본주의국가들을 약화시키고, 간접적으로 자본주의국가들에 포위된 소련의 독립을 옹호·지원하는 동시에, 식민지를 혁명기지화하여 제국주의의 몰락을 앞당기자는 세계혁명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정권은 세계혁명을 겨냥하여 코민테른을 결성(1919.3.2)하고, “공산당은 식민지의 해방혁명운동과 함께 피압박민족의 운동일반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원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천명했다.

코민테른은 제2차 대회에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1920.7.28)를 채택하고 몇 가지 원칙을 도출했다.

첫째, 선진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과 후진국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제국주의 타도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서로 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논리를 도출했다.

둘째, 농업 문제로 인한 농민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셋째, 후진국의 인민대중은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급의식의 발전에 의해 공산주의와 결합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넷째, 민족해방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진행의 중요성과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강조했다.

일제의 질곡에서 노예 상태로 신음하고 있던 우리 민족은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환호했다. 이 선언에 한껏 고무된 33인의 서명자들과 한국 민중은 서방연합국이 일제의 만행을 규탄, 한국의 주권 회복을 지원해 줄 것으로 믿고 맨손에 태극기를 흔들면서 3.1만세운동의 대담한 비폭력 평화퍼레이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받은 것은 기관단총의 가혹한 탄압이었으며,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것은 따뜻한 지원의 손길은 커녕 침묵과 냉담이었다. 그러하기에 신생 레닌 정부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는 절망에 빠진 우리 한국민족에게는 가뭄속의 단비와 같았으며, 그 독립을 위한 그 지침과 물질적 지원은 후일 그 대가가 무엇이든 암흑 속에서 비치는 희망의 등대처럼 ‘구원의 손질’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좌익이라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활약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20년대 이후 좌익이 한국독립운동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기존의 보수성향의 우익운동가들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을 가열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소련 공산당이 자행한 대한독립군 학살

이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류로 등장한다. 대표적 인물이 상해임정에서 활동한 이동휘를 들 수 있다. 이동휘는 볼셰비키혁명의 와중에서 공산주의에 접촉한 경험이 있고, 1919년 상해로 와서 임정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조직 재편을 놓고 충돌했다.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주장해 구미식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대통령 이승만과 노선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1921년 레닌이 보낸 독립자금을 수령하는 과정에서, 자금 전달책인 김립이 김구에게 살해되자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시베리아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진보적인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과 중국 유학 기간동안 사회주의를 접하면서 점차 수면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사회주의 10월 혁명에 영향을 받은, 몰락한 양반과 인텔리겐자, 민족주의계열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하지만 ML파, 화요파, 서울파 등 파벌들의 난립으로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상은 한국공산주의자들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도 없다. 아시아에서 코민테른의 최우선적 관심사는 첫째로 일본 문제였으며, 둘째로 중국의 공산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928년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사실상 공산당 조직이 파괴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활개 치는 세상은 1945년 8·15란 분단의 해방공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일제 시절 시베리아 및 연해주는 한국독립운동의 터전이요, 삶의 보금자리였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일제에 쫓겨서 망명해온 조선인들을 어떻게 처우했던가? 레닌의 지침에 의하면, 국제프롤레타리아의 단결과 제3세계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즉 결과적으로 한인 항일운동의 무장해제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유시참변으로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소련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자유시참변은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인 공산주의자와 모의해 대한독립군단을 공격, 무장해제시킨 사건이다. 분산되었던 조선의 독립군들이 모두 모여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뤄 놓은 것을 赤軍(적군)에 의해 사살, 부상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탈출한 사람은 드물었고, 이로써 연해주 지방의 조선독립군 세력은 모두 와해되었다.

사실상 내전 기간을 통해 볼셰비키는 일제와의 전면적인 무력투쟁을 회피하고 있었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주둔 명분을 없애려고 하던 참이었다. 볼셰비키는 대일협상을 성공시켜 일본군의 철병을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한인의 항일투쟁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독립군 소탕작전을 볼셰비키에게 맡긴 것이다. 현재 검인정이나 국정교과서에서는 자유시참변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고 역사적 진실이 묻혀있다. 고작해야 독립운동 단체의 주도권 다툼으로만 서술되었을 뿐, 대일협상을 전개한 볼셰비키의 음모가 은폐·누락되어 있다.

모방의 대상-서구 근대화의 대안, 비서구적 근대화모델

러시아는 1929년 대공황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남았으며, 2차 세계대전에서 주요 승전국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는데, 그것은 스탈린의 공업화의 성공 덕분이었다. 러시아는 스탈린 시기를 거치면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엄청난 변화를 보여줬고, 근대화에서 서구식 경로가 아닌 다른 길(사회주의식)도 있음을 과시했다.

즉 러시아혁명은 서구적 근대화가 아닌 대안적 근대화의 선택지임을 증명했다. 특히 제3세계 지도자들은 스탈린의 5개년 경제계획을 자신들의 공업화 및 근대화의 전략모델로 찬양했다. 5·16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는 서구식이 아니라 권위주의 정부의 힘을 기반으로 한 계획경제 플랜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이 바로 그것이다.

1917년 시작된 소비에트 러시아는 내부의 온갖 모순이 누적되어 1991년 74세의 나이로 붕괴되었다. 그렇다면 1948년에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창설된 북조선인민공화국은 어언 70세로 접어드는데, 과연 북한식 공산주의 체제는 소련의 소비에트 체제보다 더 길게 그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인가?

북조선이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주의의 결합에 의해 탄생된 정권이기에 우리가 추진할 자유통일의 대상이란 점에서 러시아혁명은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또한 체제 전쟁에서 극복할 대상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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