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정치성, 스포츠의 정치학
올림픽의 정치성, 스포츠의 정치학
  • 조희문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8.01.02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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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동계올림픽은 한국에서 열리는 두 번째 올림픽이다. 지난 88년의 서울올림픽에 이어 동계올림픽까지 열게 되는 것이니 흔치 않은 일이기는 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창올림픽에 북한을 참가시키기 위해 사방으로 뛰고 있다. 북한 참가 여부가 올림픽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가 예의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각종 제재를 이어가고 있지만, 문 대통령은 북한 참가를 확정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다는 식으로 나가고 있는 중이다.

국가안보까지도 양보할 수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북한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진정 성공의 열쇠일까? 참가는 하더라도 핵문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북한이 오히려 선전의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를 목표로 한다지만, 실리도 명분도 없는 평화를 좇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동맹국과의 신뢰를 해치는 결과를 자초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도 나온다. 

올림픽은 평화를 실현하는 축제가 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보아 정치에 동원된 경우는 여러 번이지만 그 때문에 평화와 화해가 증진되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정치가 개입할수록 올림픽은 더 멍들었을 뿐이다.

▲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 기간 중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을 홍보하고 있다.

베를린올림픽-히틀러의 거대한 선동

레니 리펜슈탈이 감독한 <올림피아>(1938)는 1936년의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다. 1부 ‘민족의 제전’은 개인기록을 다투는 육상종목을 주로 담았고 2부 ‘미의 제전’은 단체경기 중심으로 구성했다.

미국 흑인선수 제시 오웬스의 100m 시합,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마라톤 역주 모습은 1부에 담겨 있다. 손기정 선수는 당시 ‘기테이 손’이란 이름의 일본 선수단에 포함되었지만 동아일보는 그의 우승사진에서 가슴에 붙은 일장기 사진을 지웠고 ‘일제저항운동’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흑백영상이지만, 당시로서는 고급, 첨단 장비라고 할 수 있는 비행기, 이동트럭, 망원렌즈 등을 이용한 항공촬영, 근접 촬영, 이동촬영 덕분으로 화면 구성의 다양성을 높이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베를린올림픽의 웅장함과 장엄함 속에서 각 종목 선수들이 투혼을 쏟아붓는 디테일을 살펴볼 수 있다.

<올림피아> 1,2부는 올림픽을 영상에 담은 최초의 기록영화로 남아 있다. 이전까지 선수들의 활동은 현장이 아니면 보기 어려웠다. 현장에서 보는 경우라도 세부적인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정한 방향과 거리가 있는 탓에, 먼 풍경을 바라보는 수준이었다. 사진으로 본다 해도 경기 전이나 후의 모습을 담은 것일 뿐 생생한 순간을 실감하기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올림피아>는 그 순간들을 영상으로 재현했다.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이지만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새 차원이었다.

레니 리펜슈탈(Lenni Ridfenstahl, 1902~2003)은 ‘히틀러 영화’를 만든 여성 영화감독이다. 어린 시절 무용가를 꿈꿨으나 공연 중 무릎 부상을 당한 이후 영화 배우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푸른 빛>(1932)은 레니 리펜슈탈이 자신의 영화사를 세운 후 처음 만든 영화. 주연, 감독, 편집을 맡은 이 영화는 대중의 관심을 모았고, 특히 아돌프 히틀러의 눈에 들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을 때였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을 이끌고 있던 히틀러는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나치스(NAZIS)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얕잡아 부르는 의미로, 정적(政敵)들이 만들어 낸 명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이 말이 전 세계의 통칭이 되었다.

히틀러는 레니에게 1933년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기록영화 제작을 의뢰한다. 몇 차례 사양 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신념의 승리>(1933)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고, 히틀러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에 히틀러는 레니에게 또다시 전당대회 기록영화 제작을 의뢰하면서 전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역시 뉴렌베르크에서 열린 전당대회를 수록한 <의지의 승리>(1935)는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미학적으로는 다큐멘터리의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치적으로는 나치를 찬양하는 노골적인 선전 영화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히틀러는 대만족이었고, 레니는 나치 제국의 가장 위대한 영화인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레니가 진정 나치주의자였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히틀러에게 열광했다는 점과 영화 만드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 탁월한 수준의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히틀러는 독일민족지상주의와 인종론. 즉, 게르만족은 인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종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지배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가장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은 유대인으로, 그들은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실시하더라도 그들의 천성적인 열등성과 해악성은 개선되지 않으며, 항상 주위 환경을 부패시키거나 또는 해악을 만연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우수한 민족은 그들의 열악성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격리시키거나 또는 절멸시켜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베를린올림픽은 당의 강령과 자신의 이념을 과시하며 독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봤다.

히틀러는 우선 경기장부터 압도적인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설계하라는 주문을 냈다. 건축가 베르너 마르히가 선발되어 베를린 서쪽의 그루네발트 숲에 스포츠 단지의 중심 건물로 웅장한 경기장 올림피아슈타디온을 건설했다.

올림픽 중앙 경기장 이외에도, 50만 명이 입장할 수 있는 광대한 육상 경기장인 ‘마이펠트’, 2만 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발트부네 원형 경기장, 이외에도 다양한 올림픽 경기를 열기 위한 100개 이상의 다른 건물들이 마련되었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짓는 작업은 1934년에 시작되어 1936년 여름에 완공되었다. 커다란 타원형의 대칭적인 형태를 한 이 경기장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1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기획한 것이 올림픽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선전하는 것이었고, 당시로서는 가장 영향력이 큰 영화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 일 또한 레니 리펜슈탈에게 할당되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영화가 바로 <올림피아>였다.

베를린올림픽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정치적 의도와 목적이 노골적으로 배어 있는 이벤트였다. 정치가 스포츠와 문화·예술을 동원한 악명 높은 사례였다. 이념적인 측면을 접어둔다면 베를린올림픽은 거대한 축제였다. 시설은 웅장했고, 선수들은 몰입했으며 관객은 열광했다.

히틀러는 거대한 축제를 주도하는 탁월한 지도자로 각광 받았다. 근대올림픽을 창시한 창립자 쿠베르탱은 베를린 올림픽을 스포츠 정신이 최고로 발현된 ‘생애의 역작’으로 평가했고 히틀러의 나치 정부는 박수를 치며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회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라는 창설자 쿠베르탱의 말은 올림픽 정신의 상징처럼 인용되고 있지만, 실제로 쿠베르탱은 지독한 성차별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초기 올림픽에 여자들은 배제되었고, 흑인이나 아시안, 비 백인계 들에 대해서도 편견에 가득찬 언행을 보였다. 백인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쿠베르탱이 보기에,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선전하려는 히틀러의 전략은 찬양할 일이었다.

 

흑인 영웅 제시 오웬스의 반격

베를린올림픽은 웅장했고, 독일은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만족스러운 결과였지만, 히틀러를 당황스럽게 만든 인물도 있다. 미국팀의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1913-1980). 그는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4관왕을 기록했다.

백인 그중에서도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던 히틀러에게 흑인 선수 오웬스의 활약은 예상하지 못한 역습이었다. 그중에서도 400m 계주는 오웬스 본인도 뜻밖에 출전한 종목. 미국 팀 선수 중에 유태계 선수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유대인을 혐오하는 히틀러가 미국팀에 압력을 넣어 해당 선수를 제외시키라는 주문을 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미국 팀은 해당 선수를 제외시켰다. 결국 오웬스가 그 빈 자리 중 하나를 채웠고, 우승까지 이어졌다.

당시는 히틀러 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 미국 사회에서도 흑백 인종 차별이 극심했다. 그런 점에서 오웬스는 흑인을 멸시하는 모든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보란 듯 어퍼컷을 날린 셈이었다. 히틀러는 내놓고 싫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아리안 백인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던 의도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이후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베를린올림픽의 웅장한 이미지는 단지 정치적 선전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올림픽이 정치 영향에 멍든 사례는 또 있다. 1972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뮌헨올림픽은 테러로 피범벅이 되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라는 조직에서 분리된 과격 테러조직 ‘검은9월단’은 선수촌에 침투해 이스라엘 선수단 2명을 사살하고 9명을 인질로 잡았다.

서독경찰은 진압에 나섰지만 결국 인질 9명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테러범 8명 중 5명이 사살되고 3명은 생포되었다. ‘검은9월단’의 존재가 전 세계로 알려졌고, 중동의 정치적 갈등이 심각하다는 사실도 부각되었다.

1967년의 중동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돌아가자, 이에 분노한 아랍권 특히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테러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올림픽 테러는 충격과 파장 면에서 핵폭탄급이었다.

격노한 이스라엘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팔레스타인 요인에 대한 표적 암살을 겨냥한 ‘신의 분노’ 작전을 시도했는데, 7년에 걸쳐 테러분자 10명을 암살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암살은 국가안보를 지키는 합법적인 도구”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1980년의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도 국제 정치 갈등에 휘청거린 경우로 꼽힌다.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 하계 대회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처음 열린 행사.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세계 여론이 요동치고 있을 때였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쿠데타가 발생, 친소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소련이 군사적 지원을 한 것인데, 소련의 아프간 진출은 세계 여론의 반발을 일으켰다.

카터 미 대통령은 반소(反蘇) 여론을 업고, 아프간 철수를 요구했다. 이를 실행하지 않으면 모스크바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고 밝혔고,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불참을 권유했다. 미국을 비롯 일본 중국 등 66개국이 불참을 밝혔다. 한국도 참가하지 않았다.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3회 하계 올림픽은 모스크바올림픽 불참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을 비롯한 14개 공산권 국가들이 참가를 거부했다. 연속으로 두 대회가 이념과 정치에 휘말려 찢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열린 24회 하계 대회는 자유진영과 공산국가들이 모두 참가했다는 점에서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지만 역설적으로 정치적 의미를 더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이듬해인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열었다. 177개 국 2만 2000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 대회가 특히 주목받은 것은 남한의 운동권단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여대생 임수경을 대표로 파견한 사건 때문이다. 정부 측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반국가적 행동이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사회주의 국가의 청년학생들이 반제·반전(反帝·反戰)의 기치 아래 모여 친선과 평화, 단결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여는 행사로, 1947년 7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제1회 대회가 열렸다. 스포츠를 이용한 이념 선전 행사이지만 지금은 유명무실한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을 참가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은 올림픽을 남북한 평화 증진 또는 대화의 계기를 만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탁월한 지도자 이미지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북한참가를 희망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내놓았다.

북한과 분산 개최를 할 수 있다거나 선수단, 응원단 참가를 기대한다거나 마지막 순간까지 참가를 기다린다거나 올림픽 기간 동안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거나 연기, 축소할 수도 있다는 식의 발언을 쏟아냈다. 지난 연말에는 민주평통을 통해 세계 각국의 북한대사관에 꽃다발을 보내기로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북한이 핵무기를 볼모로 대한민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등 동맹국과 다른 나라들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시선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를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다.

1938년 9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4국회담(뮌헨회담)에서 돌아온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히틀러의 계략에 속은 줄도 모른 채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성취했다’고 허풍 떨었던 일은 독재자에게 희롱당한 어리석은 지도자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문 대통령은 그 일을 반복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올림픽을 정치에 종속시키려는 대통령, 감성과 선동을 앞세운 이미지 정치의 확장을 노리는 노회한 지도자라는 인상으로 남을지,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적 안정을 되찾은 대통령으로 기억될지는 평창올림픽이 가를 수 있을까. 

=조희문 미래한국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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