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신앙인물, 김효은 전 경찰청장
역사적 사건과 신앙인물, 김효은 전 경찰청장
  • 미래한국
  • 승인 2004.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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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승재 기자
전대협무력화 기도로 준비주동자 검거 욕심 버리고 안전해산 기도후 주요간부 체포전대협, 범민족대회에 역할못해 조직와해 계기92년 8월 10일. 이날은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날이다. 그러나 김효은(金孝?·68)전 경찰청장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날이다. 1963년 경위로 임관한 김 전 청장은 경찰생활 대부분을 경비분야에서 일해왔다. 범인검거, 수사를 해야 인정받는 경찰 내부에서 대간첩작전과 시위진압이 주임무인 경비분야는 힘들고 인정받기 어려워 누구도 꺼려했다. 그러나 김 전 청장은 서울시경 기동대장, 치안본부 경비과장 등을 역임하며 묵묵히 그 일들을 해냈고 92년에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발령받았다. 그리고 그 해 8월, 김 청장에게 ‘범민족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전대협’을 무력화시키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당시 전대협은 친북세력에 완전히 장악돼 각종 불법·폭력시위를 일삼는 대표적인 반국가·반체제 조직이었다. “당시 전대협지도부는 중앙대에 학생들을 모아 세를 규합한 뒤 인근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의 사저를 침탈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첩보를 접했습니다. 그 순간 기도했습니다. 저들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국가의 안정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중앙대는 물론 숭실대, 국립묘지 일대까지 완전히 포위한 경찰은 8월 10일 새벽 중앙대를 수색해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시위용품들을 압수했다. 김 전 청장은 그 날의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새벽 일찍 출근해 여느 때처럼 청장실에서 기도하고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나서는데 TV를 통해 황영조 선수가 1위로 골인하는 장면이 보였습니다.”이 때 김 청장은 ‘TV의 쾌거가 오늘 작전에서도 나타나게 해달라’고 다시 한번 기도했다고 한다. 중앙대에 도착했을 때 이미 현장 상황은 종료됐고 일부학생이 8층짜리 공대건물 옥상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체포해 실적을 거둘까’라는 인간적인 욕심이 났습니다. 하지만 경찰과 학생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자진해산을 유도하라고 지시하고 다시 경찰청으로 돌아왔습니다.”마침 그 날은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부임한 후 처음으로 교경협의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서울경찰청으로 돌아와 예배를 드리는 내내 중앙대 사태가 안전하게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는 김 청장. 사무실에 올라왔을 때 엄청난 보고를 받게 됐다.“서울 각 경찰서에서 보고가 올라오는데 태재준 당시 전대협 의장을 비롯해 대변인, 부산총련 의장, 대경총련 의장 등 77명의 전대협 주요 간부가 체포됐다는 것입니다.”출세를 위한 인간적인 욕심을 접고 기도하며 기다린 결과였다.학생시위진압에서 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린 김 청장은 나중에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됐다. 새벽녘 수사가 시작될 때가 황 선수의 골인시점과 맞물려 시민들의 함성소리에 학교 정·후문을 지키던 사수대의 경고소리를 지도부가 듣지 못해 피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김 청장은 TV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잠시 기도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랐다.이날 지도부가 와해된 전대협은 92년 범민족대회에 아무런 역할도 해낼 수 없었음은 물론 지도부 공백에 따른 조직 전체의 위기로 인해 결국 한총련이라는 새로운 조직으로의 변화를 시도해야만 했다.이날의 사건. 당시 관계자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오세창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제1기동대장은 “매년 새롭게 구성되는 전대협 지도부를 현역일 때 잡는 일은 당시 경찰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92년 경찰은 중앙대에서 그 일을 해냈고 그 결과 전대협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증언하고 있다.경찰의 분석대로 실제로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이 사건이 큰 전환점이 됐다. 이미 당시 학생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던 상황이라 충격이 더 컸다. 당시 전대협 핵심에서 일하다 지금은 평범한 사회인으로 돌아온 김모 씨(한양대 경영학과 89학번·아더 앤더슨 컨설턴트)는 “92년과 93년은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넘어가는 학생운동의 일대 전환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환점이 학생운동권 내부의 요구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매끄러울 수가 없었고 급하게 변화를 모색하게 된 한총련은 결국 무리한 투쟁방식을 택했고 그 결과 학생과 시민들의 지지로부터 멀어졌던 것입니다.”고 그때의 일을 말하고 있다.늘 기도하며 공무에 임했던 김 전 청장. 각종 시위현장을 몸으로 뛰며 저지했던 일들을 하나 하나 이야기하던 그는 79년 ‘YH사건’을 이야기할 때 잠시 뜸을 들였다.YH무역 여공들이 야당당사(민주당)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던 이 사건을 병력을 투입해 해산시키라는 상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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