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움직인 기도-美 존 버치협회(John Birch Society)
역사를 움직인 기도-美 존 버치협회(John Birch Society)
  • 미래한국
  • 승인 2004.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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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7월 중국에서 영예 훈공장을 받고 있는 존 버치
“더 작은 정부, 더 큰 의무, 하나님의 도움에 의한 더 낳은 세계.”(Less Government, More Responsibility, and - With God’s Help - a Better World.) 존버치협회(John Birth Society)가 추구하는 이상은 개인의 자유와 신앙의 수호, 자유시장경제와 자유경쟁, 애국심의 고취이다. 존버치협회는 1958년 로버트 웰치(Welch)에 의해 설립된 미국의 대표적인 애국단체다. 국내외 정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뉴아메리칸(The New American)지의 출판과 라디오·비디오프로그램제작 등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교육, 정부정책 결정에 대한 영향력 확대 등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1958년 설립 이후 꾸준히 성장 전국 50개 주에 지부를 두고 있다. 웰치가 존버치협회를 설립할 당시 미국사회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이후 경제와 과학기술면에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정의 가치, 신앙, 애국심 등 전통적 가치관은 점차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특히 소련과 중국을 무너뜨린 공산주의사상은 어느덧 미국사회와 정부 내부까지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웰치는 애국자였으며 독실한 신앙인이었고 신념을 위해 용기 있는 시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공산주의의 폭력적 습성과 거짓, 반기독교적 정신을 간파했고 전통적 삶의 양식과 신앙, 사회제도, 문화, 관습 등을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숨은 음모를 읽었다. 그는 미국사회에 스며들고 있는 거대한 음모를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집필활동을 하면서 존버치협회를 창설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음모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즈벨트와 트루먼 전 대통령은 스탈린은 자신들과 같이 정의와 평화를 원하는 단지 진보성향의 친구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몇 명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그는 1952년 출간한 ‘하나님이여 우리를 용서하소서’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2차세계 대전 이후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위협에 대해 설명했다. 동유럽국가와 중국의 공산화가 그것이었다. 그는 또한 진보좌파성향의 단체들의 영향력을 분석했다. 정부요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는 궁극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유의 땅’이며 ‘용기 있는 자들의 국가’인 미국이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에 의해 해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했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웰치로부터 공격을 받은 인사들과 진보적 언론은 웰치를 거세게 비난했다. 하지만 웰치의 반응은 담대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친구인지 적인지를 국가에 알려야 하는 일이다.” 이 글은 웰치가 미 의회도서관에서 자료를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중국에서 대위로 복무하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된 한 선교사 출신의 젊은이가 이 글의 주인공인 존 버치(Birch)였다. 희생과 용기의 신앙인 존 버치존 버치는 깊은 신앙과 개인주의적(libertarian) 가치관을 지닌 전형적인 미국시민이었다. 그가 26세에 쓴 글에서 그의 가치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가족들과 함께 타오르는 벽난로 옆에서, 좋은 책을 읽으며, 영육이 건강한 가운데 인생의 말년을 맞이하고 싶다. 내 곁에는 튼튼한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 그리고 내 소유의 밭과 숲이 있으리라.” 하지만 자유와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헌신은 그가 이러한 평화를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존 버치는 1918년 인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0년 아버지의 고향인 조지아주로 돌아온 버치는 독실한 남부 침례교회의 분위기 안에서 성장했고 머서대학(Mercer University)을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이후 아버지에 이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그는 선교사의 죽음과 박해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던 중국을 사역지로 택했다. 그의 지도목사가 그에게 “앞으로 더욱 많은 선교사가 중국에서 순교할 것”이라고 경고했을 때 그는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물러설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중국으로 향했다.중국 사역은 그가 21세가 되던 193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일본제국군은 이미 3년 전부터 중국을 침공해 장개석의 중국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주은래와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군은 지방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특출난 언어능력으로 6개월여 만에 중국어과정을 마친 버치는 중국 방방곡곡을 돌며 선교활동을 펼치게 된다. 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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