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의 유격대, ‘동키 부대’ 대원, 이 신 장로
한국최초의 유격대, ‘동키 부대’ 대원, 이 신 장로
  • 미래한국
  • 승인 2004.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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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신 원로 장로
[인물포커스]밝고힘찬나라운동 이 신(李信)집행위원장6.25 전쟁당시 한국최초의 유격대, ‘동키 부대’ 대원‘밝고힘찬나라운동’ 통해 젊은 인재 양성“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세 마디 외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일생을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해온 이 신(李信*70*서대문장로 교회)장로가 지난 달 29일 30년간의 현직 장로 생활을 마감하고 원로 장로로 추대됐다. 교회 신도들 사이에서 이 장로는 6.25 동란 중 가족 모두를 고향인 황해도 신천에 남겨두고 혈혈단신 월남한 실향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cm의 단신인 그가 6.25전쟁 당시 군번도 없이 적지(敵地)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던 전설적인 ‘동키(Donkey)부대’ 소속의 유격대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당시 내 또래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 됐습니다. ‘종교’를 ‘아편’이라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천서부교회’ 소속의 교우들과 함께 유격대원이 되어 공산군과 싸우기로 결정 했습니다.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죠.”그가 속했던 동키 부대 산하 `신천부대`는 미군과 국군의 지원 아래 큰 전과를 올린 부대로 대원들의 대부분은 신천 출신의 반공청년들이었다. 특히 ‘신천부대’는 1950년 10월 13일 신천군 내무서 공격을 시작으로 결사적인 반공의거를 일으킨 다음 해주로부터 후퇴하는 북한군의 트럭 행렬을 공격하여 상당량의 무기를 획득하기도 했다. ‘신천부대’는 병력수가 1천명을 넘었으며 서해지구 유격전 사령부인 백령도와 순위도 방어 임무를 담당했으며 내륙침투 작전에서도 혁혁한 무공을 세운 부대였다. “전쟁 기간 중 신천부대는 북한군 1개 여단을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 무수히 많은 전우들이 죽어갔습니다.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내 옆에서 낮은 포복을 하고 있던 친구가 전사하는 것도 봤습니다. 하나님의 가호, 그리고 김익두 목사님의 기도가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 장로가 출석했던 황해도 신천의 ‘서부교회’는 당시 유명한 부흥사로 수많은 이적을 행했던 김익두(金益斗*1874~1950) 목사가 담임 목사였다. 그는 젊은 시절 ‘개망나니 김익두’로 불릴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27세에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 W.L.)의 ‘영생’이라는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이후 김익두 목사는 ‘권능의 사자’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열면서, 도처에서 기사(奏事)와 이적(異蹟)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전쟁이 발발하자 김익두 목사는 이 장로를 따로 불러 안수기도를 해주면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리고 25살 이전에 네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결혼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후 끝까지 북한에 남아 교회를 지켰던 김익두 목사는 1950년 10월 14일 새벽 퇴각하던 북한 인민군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목사님은 끝까지 북한 땅에 남아 자신이 손수 지은 교회를 지켰습니다. 한때는 공산당이 그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변절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죠. 그러나 목사님의 순교는 공산당은 ‘악’(?)이라는 진실을 확실히 밝혀 주었고, 그가 북한 땅에 남아 최후까지 싸운 하나님의 참된 종이었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내게 안수기도를 해주셨을 때 목사님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나는 목사님 말씀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실제로 25살을 넘긴 이듬해에 결혼했죠.”인민군, 중공군과 전투를 치루면서 부대와 함께 월남한 이 장로가 처음 정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그는 미군 대위의 배려로 주한 미8군 소속 55보급창에서 ‘하우스 보이’(House Boy*미군들의 잔심부름과 궂은일을 해주는 소년)생활을 시작했다. “부두에서 물건을 하역하다 보니 가끔 `C-Ration`(미군 비상식량)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미군에게 말을 하고 그 자리에서 뜯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힘들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틈틈이 영어공부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동행하시는데 두려울 게 없었죠.” 갖은 고생 끝에 자수성가한 그는 평화통일촉진회 사무총장, 한국장로총연합회 회장,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부총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밝고힘찬나라운동’ 집행위원장, 한기총 산하 ‘사랑의쌀나누기운동위원회’ 사무처장, 재단법인 ‘대한성서공회’ 진흥부 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 장로는 나이도 잊은 채 여전히 복음의 확산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외국 가서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조국과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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