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개혁에 중국 영향력은…
북한개혁에 중국 영향력은…
  • 미래한국
  • 승인 2002.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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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개혁’과 중국지난 7월 북한이 일련의 경제개혁 내용을 발표했을 때 적지않은 사람들이 의구심이 있는 눈으로 북한의 동태를 보고 있었다. 최근 홍콩과 중국에서 나오는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북한은 본격적으로 내부체제 개혁에 착수한 것 같다. 처음에는 북한에 대한 보도가 너무 산발적이어서 그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북한이 의도하는 목표와 개혁의 우선순위가 분명해 지고 있다. 북한이 추구하는 개혁은 우선 그 動機부터 따져봐야 할 것같다.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고 주장해온 김정일의 태도로 보나 이제까지 중국의 개방정책을 ‘반대’해 온 전력으로 볼 때 그가 직접 내부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실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은 매우 대조적인 인물이다. 김정일은 1980년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이래 1983년 부터는 사실상 김일성과 ‘맞상대’할 만큼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김정일은 김일성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자기주장을 폈다. 예를 들면 김일성이 가장 열열히 ‘소망’한 일이 있다면 미국과의 관계개선이었다. 미-중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 1979년이래 김일성은 중국을 통해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간간이 흘러나오는 김일성과 등소평의 대화의 일단을 보면 중국이 적극적으로 ‘중계’를 해서 ‘미국과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도록 도와 달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김일성은 애걸하듯이 매달렸다. 김일성은 중국의 예를 보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고 심지어 ‘工作’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정반대였다. 김일성은 중국의 예에따라 ‘조선도 개혁·개방을 하겠다’면서 경제특구도 만들고 외국인 투자법도 만들었으나 내면적으로 이들 개혁조치를 흐지부지하게 만든 사람은 다른아닌 김정일이었다. 1984년 김정일은 중국을 다녀와서 ‘중국은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면서 맹렬하게 중국식 개방정책을 비판했고 심지어 등소평을 사회주의의 ‘배신자’ 라고까지 혹평했다.그 후에도 이들 父子간의 갈등은 계속됐다. 김일성이 외화벌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평양에 외화전용상점을 개설하도록 지시하고나면 김정일은 돌아다니며 외화상점을 패쇄시켰고 김일성이 경제관료들을 독려하면서 경제성장과 대외무역을 적극 일으킬 것을 지시할 때 김정일은 군사력 제일주의를 들고 나왔다. 김일성은 죽기 3일전까지 경제일꾼들에게 “무역을 일으키고 외화획득을 통해서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절절한 유언을 남겼지만 김정일은 아비의 ‘유훈’통치를 한다면서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중국은 5년동안 계속되는 경제의 마이나스 성장과 자력으로 해결가능성이 전혀 보이지않는 식량난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북한체제는 ‘위기’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고 보게 되었다. 이런 중국의 관점은 우리와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1993년~1997년사이에 북한이 ‘붕괴’한다면서 소란을 떨었지만 정작 중국이 북한을 위험스럽게 보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1998년이후였다. 중국은 이 때부터 북한의 내부개혁을 지원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중국은 북한을 死?的 利害관계가 있는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은 한반도정책의 중심이 이미 ‘한국쪽으로 넘어와 있는 상황’에서도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이 중국이 북힌의 危機 ‘가능성’에 적극 대처하는 이유다. 1999년 5월 윌리엄 페리 한반도 조정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가자 6월 3일부터 김영남, 홍성남, 백남순등 70여명의 대표단이 북경을 방문했다. 이들의 방문은 중국의 10차 5개년 계획기간(2001~2005)동안 대북지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지만 중국은 이 때를 북한의 내부개혁을 적극 설득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같다. 하여간 이 때가 전환점이었다.2000년 6월 중국은 한국의 ‘협조요청’을 수용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물론 중국은 ‘정상회담’ 그 자체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다. 부수적인 의도가 있다면 남북간 경제교류가 크게 진전되고 이를 계기로 북쪽이 내부체제를 획기적으로 고치기를 바랐다. 남북간의 경제교류가 활성화되려면 북쪽의 내부체제‘개선’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2001년 1월 김정일의 상해방문은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김정일이 “上浿가 失地開闢을 했다”면서 중국이 종용하는 내부개혁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이 때 김정일은 80여명의 전문가를 데려갔다. 아마 이 때부터 양국이 공동으로 한 팀을 만들어 북한의 실정에 알맞는 내부개혁의 ‘설계’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같다. 2001년 9월 강택민의 평양방문에는 부부장급 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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