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아본다>배재학당 설립 아펜젤러 ‘자유와 빛으로’(1998년 정동삼문출판사 刊) 가운데에서
<역사를 돌아본다>배재학당 설립 아펜젤러 ‘자유와 빛으로’(1998년 정동삼문출판사 刊) 가운데에서
  • 미래한국
  • 승인 2002.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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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학교이름 하사, 인재양성에 관심 표명
1885년 가을,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서울공사관에서 일하고 있던 젊고 총명한 해군장교가 국왕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내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과 교육사업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했다. 고맙게도 폐하께서 나를 환영하였고 우리 대표부에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가르쳐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교육사업에 대한 이처럼 우호적인 태도는 큰 도움을 되었다. 더욱이 왕은 1887년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심으로 학교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 말은 필요한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뜻인데 ‘대학’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1894년 일본과 중국이 불화 끝에 전쟁이 벌어졌다. 일본이 승리한 후 그들은 전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 은둔의 나라를 안전하고 평탄하게 자유와 문명의 세계로 인도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이어 개혁의 시대가 밀어닥쳤다. 진보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요청되었다. 정부에서는 학교를 세워야했지만 필요한 지식을 가르칠 교사가 없었다. 우리가 학생들을 맡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학무국(Educational Department)의 관리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몇 개월을 끈 후에 한국 정부와 우리 학교 교사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고 그에 따라 200명의 학생이 우리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외국인 교사와 한국 교사를 뽑는 일,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일, 교육과정 등이 모두 우리에게 넘겨졌다. 이 계약으로 선교부는 일년에 약 1,000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1898년 계약만기가 되었을때 왕은 재계약을 지시하였다. 1896년 2월, 내가 평상시처럼 학교 일을 보고 있을 때 내각의 관리가 아침에 찾아와 그날 오후 러시아 공사관-여러분도 알다시피 당시 국왕은 거기에 피신해 있었다-으로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정시에 갔다. 거기에 외무대신이 나와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를 왕과 왕세자에게 소개하였다. 또 매우 영광스럽게도 왕은 우리의 교육 사업이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였고 왕이 방문했을당시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대해 내게 개인적인 감사를 표했다. 지난 가을 서울을 떠날 때 황제 폐하께서는 황공하게도 내 귀국 여행의 안전과 즐거움을 비는 따뜻한 작별인사를 해주셨다. 형제들이여,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러나 교회는 서울에 있는 우리의 학교가 15년 동안 황제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 현재 그 어느 때 보다 더 사랑 받는다는 것을 알 권리가 있다. 우리는 어디서나 기독교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고 채플 참석이 의무적이며 주일 교회예배 참석도 의무화되어 있다. 만일 한국 정부 일각에서 우리의 기독교적인 규준을 약화하려 한다거나, 우리의 종교적 가르침의 자유를 박탈하려 한다면 우리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러한 시도에 저항 할 것이다. (1901년 1월 25일 필라델피아 전도자 모임 강연 발췌)1886년 12월 4일(토)11월 21일 ‘연합교회’ 회중 앞에서 ‘낙엽과 같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추수감사절에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의 추수감사절 설교를 했다. 그는 여러가지에 관해서 말씀을 전했다.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저녁에 미국인들의 식사 모임을 가졌다. 몇 사람을 빼고는 거의 모두가 참석했다. 19명이었다. 매우 즐거운 저녁이었으며 모두들 흐뭇해했다. 자정이 다 되어서 헤어졌다. 엘라의 탁월한 음식 솜씨 덕분에 모임이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이곳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며 매우 즐거운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생들에게 특식을 제공했는데 맛있게 먹는 것 같았다. 먹는 동안 별 얘기 없이 너무 급하게 먹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신사처럼 점잖게 행동했다. 지난 목요일 학생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 학교가 선교학교(Mission school)라는 보고가 들어가 정부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세 명의 학생들만 남았다. 그나마 두 사람도 조금 있다가 떠났다. 계속 남아 있는 학생은 한 사람뿐이다. 이런 학교에 남아 있다가는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서였다(여기서 박해는 참수를 말한다). 학교를 일으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나 먼저 무엇이 방해물인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초조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분명하다. 용감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도우소서.1887년 2월 21일(월)오늘 폐하께서 미션 스쿨인 우리학교에 이름을 내리시며 외무대신을 나에게 보내셨다. ‘배재학당’이라 하는데 ‘유능한 인재를 가르치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문제는 얼마 동안 계속 거론되었다. 외무대신도 언더우드가 학교에 대해서 물으며, 그것도 이름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것으로 우리는 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한국인 앞에 떳떳이 설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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