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 전쟁
프로파간다 전쟁
  • 미래한국
  • 승인 2002.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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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스푸트니크호가 성공적으로 발사, 지구 궤도를 도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소련의 프로파간다가 절정에 이르렀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종결된 유럽사회는 평화가 깃들기 보다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또 다른 긴장이 조성되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회복된 신(新) 독일의 중심지로서의 베를린이 아니라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되어갔다. 전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1945년 5월 초부터 두 달 동안 단독으로 이 지역을 관리했고 그 이후 44년 9월 12일 런던 협정에 따라 미국, 영국, 프랑스가 입성했다. 미·영·불 서방연합국들은 베를린 왕래가 소련에 의해서 언제든지 통제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고 있었다. 소련과의 협정이 서방 3국에게 항공로를 이용한 왕래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차, 수로 및 도로를 이용하는 왕래를 위해서는 추가 협정이 필요했다.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베를린은 소련과 서방연합국 사이의 비밀첩보망의 중심지였고 프로파간다(흑색선전)가 늘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소리없는 전쟁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국은 서베를린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한 서방세계의 창(窓)으로 간주했던 반면, 소련과 동독은 동베를린을 동독의 수도로 정해 서베를린 탈환의 기회를 엿보았다.소련의 비밀첩보 요원들이 운집해있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서방국들의 스파이들도 베를린을 중심으로 다양한 첩보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언론도 늘 베를린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끊이지 않는 뉴스거리를 만들어냈다.이런 상황 속에서 46년 2월 7일 미국 점령지역내 라디오 방송인 리아스(RIAS)는 개국되어 자유의 소리를 대변했고 동독은 ‘동독의 소리(Simme der DDR)’ 방송을 통해 사회주의 선전에 열을 올렸다. 베를린 내 ‘챨리 검문소’는 소련과 미국의 무기가 힘겨루고 있었고 언제라도 또 한번의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1961년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이런 힘의 대립에 대한 완화장치였으나 이를 계기로 이념과 체제가 나뉘고 가족, 친구, 이웃들이 헤어졌다. 이런 가운데 동독은 탈(脫) 스탈린 현상의 위기를 적절히 극복하고 공산당 SED를 중심으로 경제에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동유럽 국가들의 경제공동체인 코메콘 회원국들과 수많은 기술협정과 다양한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56년부터 1960년까지의 제2차 5개년 계획은 6.6%의 경제성장과 총생산의 33% 증가라는 야심찬 내용을 담고 있어 국민생활은 점점 좋아졌다.또한 1957년 소련이 최초로 스프트닉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성공적으로 올리는 데 성공함으로써 공산권의 프로파간다는 최고조에 달했다. 전 세계 언론의 초점도 모두 이 엄청난 이벤트에 모아졌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고 소련의 대륙간 로케트가 핵무기를 탑제해 아메리카 대륙까지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서방세계는 즉시 기술개발에 착수했고 우주개발경쟁 시대를 거치며 점점 소련의 기술을 능가해갔다. 프로파간다를 통해 서베를린를 공산화하고 독일에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시키려 했던 공산권의 계획도 이런 과정을 거쳐 서서히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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