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어부스럼 만든 위안부 합의 파기 소동
긁어부스럼 만든 위안부 합의 파기 소동
  • 고성혁 역사안보포럼 대표
  • 승인 2018.01.19 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정부가 매우 격앙되어 있다. 지난 2015년 한일간 합의한 ‘위안부 문제 합의’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월 9일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양국간 합의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지는 않고, 일본이 출연하기로 한 10억 엔에 대해서는 일본과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는 정도의 입장이다.

한국 측의 명확한 입장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문제를 해결한 것도, 그렇다고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도 아닌 이상한 모양새만 드러낸 꼴이다. 당장 일본 정부는 반발하고, 위안부 피해자 측에서도 만족해하는 것 같지 않다. 한국 정부의 외교력은 민낯을 드러냈다. 어느 쪽도 얻은 것 없이 손해만 본 셈이다.

사단의 시작은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언급한 데서부터 불거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 12월 27일, 외교부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 결과를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일본과 합의한 ‘위안부 문제 합의’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강경화 외교장관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위안부 합의를 파기할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지난 4일 청와대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 8명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나눔의 집 등 피해자 지원 단체 관계자 등을 초청한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진실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났고 내용과 절차가 모두 잘못된 것이다”라며 종전보다 훨씬 강한 톤으로 합의 파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외교 부분에서 가장 대표적인 ‘적폐’로 규정했다.

이와 같은 소식에 일본 정가는 발칵 뒤집혔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 보고서’ 발표 직후 아베 총리는 “합의는 1㎜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확인했다. 아베 총리는 7일 NHK ‘일요토론’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해 한국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 논란에 대해 “국가 간의 약속”임을 재차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합의 파기건에 대해 매우 강경한 반응을 보이자 문재인 정부는 슬쩍 ‘반’ 발자국을 뺐다. 강경화 외교장관은 지난 2015년 12월 이뤄진 한일 양국간 위안부 합의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면서도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재협상을 요구할 경우 명분과 실리 모두가 불리함을 알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 보상기금으로 일본 정부가 화해·치유 재단에 출연한 10억 엔(100억 원)은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한다, 기금 처리는 향후 일본과 협의하기로 했다고 강 장관은 밝혔다.

1월 10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문재인 대통령신년 기자회견을 시청하고 있다. / 연합
1월 10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문재인 대통령신년 기자회견을 시청하고 있다. / 연합
격앙된 일본, 평창올림픽 거부할 수도

일본은 즉각 강하게 반발했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은 한국 측에 항의하겠다고 밝혔고,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합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다. 한국 측에 이행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아베 총리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에 대해 일본 정부 관계자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고 말한 것으로 외신은 전했다. 어찌되었건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합의 파기 소동’은 아무런 성과도 없는 긁어부스럼만 만든 꼴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 이전에는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구 일본제국은 ‘정신대 근무령’을 발표하고 일본, 조선, 중국에서 많은 여자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부대에 할당했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의 이름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다.

1990년대 들어 정신대라는 명칭에서 일본군 성노리개라는 측면을 부각하기 위해 언론 등을 통해 정신대라는 명칭보다 ‘위안부’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은 1991년 최초 공개 증언 이후 ▲일본 정부의 공식적 책임 인정 ▲진상 규명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해왔다.
2015 위안부 합의-한국측 요구 거의 받아들여졌다

그에 대한 결실이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다. 합의 사항의 핵심은, 일본 측은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문을 명기하는 것이고 한국 측은 소녀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약속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다음은 합의문 전문 내용 중 해당 부분이다.

 일본 측

1)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함. 아베 내각 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함.

2)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본 문제에 진지하게 임해 왔으며, 그러한 경험에 기초하여 이번에 일본 정부의 예산에 의해 모든 전(前) 위안부 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모색함. 구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전(前) 위안부 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하고, 일·한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모든 전(前) 위안부 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하기로 함.

3) 일본 정부는 상기를 표명함과 함께, 상기 2)의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동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함.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하는 것을 자제함.

 한국 측

1)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표명과 이번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조치를 평가하고, 일본 정부가 상기 1), 2)에서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함.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조치에 협력함.

2)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 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함.
합의 내용 자체는 그 어디도 문제가 없다. 다만 문재인 정부는 윤병세 외교장관이 ‘이면합의’는 없었다고 했지만 ‘적폐’를 파헤치다 보니 ‘이면합의’가 있었다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  그 이면합의 내용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등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설득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 관련 적절한 노력 △제3국에 위안부 기림비 등 설치 미지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합의문 내용을 좀 더 구체화 했을 뿐 문제될 것이 없다.

일본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사과와 배상을 외교문서로 남긴 만큼, 상호주의에 맞게 우리 정부 역시 소녀상 문제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설득하고 행정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입장을 바꿔 일본의 혐한론자들이 한국대사관 앞에서 주구장창 시위를 벌인다면 우리 역시 일본 정부에 시정 요구와 협조 요청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면합의’라는 것도 외교 관례에서는 허다하다. 그것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폭로’하는 것처럼 언론플레이 하는 것은 외교상 결례다.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일본이 양보한 측면이 크다. 이유는 한국이 요구한 위안부 피해자 보상과 ‘진정한 사과’를 문구 명문화 하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추가적인 배상이나 그 어떤 협의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미 1965년 한일국교수립 당시 일본은 한국에 포괄적으로 배상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요구를 들어준 이면에는 미국의 압력과 ‘소녀상’ 문제가 있었다. 친중반일의 외교로 기우는 박근혜 정부를 한·미·일 삼각동맹의 틀에 다시 들어오게 하기 위해 미국은 노력했다. 인권이라는 보편적 문제로 일본의 양보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런데 한국 정권이 바뀌자 과거 문제를 또 다시 들고 나오는 것에 일본은 경악했다. 보상과 진정한 사과를 해도 반복되는 한국의 요구에 어쩌면 일본은 ‘정나미’가 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정계 뿐만 아니라 일본 언론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본 <석간 후지>는 1월 6일자 보도에서  ‘무법국가’(無法國家)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석간 후지는 한국이 2015년에 일본과 체결한 ‘위안부 합의’에 대해 ‘잘못’이었다며 ‘파기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국가 간의 약속을 뒤집으려 하자 일본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시적인 ‘무법국가에 제재 조치’를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분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저널리스트 무로타니 카츠미 씨는 “한국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 계속 미루고 싶은 것이 본심이다. ‘파기’, ‘재협상’을 계속 풍기면서 일본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일본을 불쾌하게 만드는 전술을 취하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합의 파기를 공식화하면 일본도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의 비자 면제 체류 기간을 ‘90일 이내’로 축소하는 등 가시적인 제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도 나왔다.

타쿠쇼쿠 대학의 후지오카 노부카츠 객원교수는 “문 대통령이 위안부 할머니에게 한 사과는 국내용 퍼포먼스다”라고 비판하면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일본 정부는 1mm도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밝힌 것은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한국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로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격앙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아베 신조 총리가 다음 달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석하도록 하는 한국 정부의 요청도 거절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본 언론에 나타나기도 했다.

역대 굵직한 한일협정은 한국에 모두 이익

위안부와 연결된 시민단체들은 항상 1965년 한일협정을 문제 삼았다. 피해  당사자에 대한 보상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매우 선동적이고 복선이 깔려 있다.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는 어디 위안부만 봤냐는 반론이 나온다. 당시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이가 피해자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장기저리 정부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유상 2억 달러 지원을 약속받았다. 일본이 한국에 지원한 무상 3억 달러는 일본에게도 매우 큰 금액이었다. 도쿄올림픽을 개최하던 해 1964년 일본의 수출액은 11억 달러였다. 총 수출액의 3분의 1이 넘는 금액을 한국에 제공했다. 70년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일본의 경협자금이 큰 종자돈 역할을 한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흔히 한일협정을 통해 받은 돈이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금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식민지배 배상금이 전혀 아니다. 우리는 대일청구권이라고 하지만 일본은 경제협력기금으로 한국에 제공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이 필리핀 등에 제공한 배상금은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금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전쟁 당사자가 아니었으니 전쟁 배상금으로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렇다고 명목상 식민지배 배상금으로도 할 수 없었다. 더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 미국, 프랑스도 식민지배 배상금으로 보상한 선례가 없었다. 이런 문제로 한일회담은 결렬되기 일쑤였다. 결국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공산권에 함께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협력이 무엇보다 절실했던 미국이었다. 미국의 중재로 청구권의 구체적 명칭은 생략하고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마무리했다. 실질적 내용은 한국의 요구가 대부분 관철되었다.  한미간 혈맹관계는 대일 협상에서도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5년 한일협정을 비판하는 이들은 경제 발전 성과보다 대일경제의존도를 심화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이 교역할 수 있는 나라를 감안한다면 현실을 무시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위안부 피해 보상 관련도 마찬가지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배 배상이 아니라 경제협력으로 청구권에 응했다. 따라서 한일협정이 위안부 피해자를 무시했다는 것도 본질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은 성과면에서 제2의 한일협정이라 할 만했다. 2015년 3월 외교부는 이런 내용이 포함된 1597권(26만여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전두환 대통령, 천황 사과와 반도체핵심기술 얻어내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정부는 우리나라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국빈 방문하는 ‘무궁화 계획’을 수립하면서 과거 식민지배의 상징적인 책임이 있는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사과를 받아낼 계획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천황의 사과는 만찬사 등과 같이 공식적인 형태여야 한다는 입장을 일본에 직·간접적으로 전달했다.

결국 히로히토 천왕은 1984년 9월 6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만찬 때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 양국간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라고 밝혔다.

86, 88년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실질적인 경제협력도 이끌어 냈다. 최대 성과는 일본이 기술이전을 꺼리던 반도체 관련 기술을 한국의 민간기업이 이전받을 수 있는 기술협력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반도체 입국(立國)은 1984년 일본과의 협력이 그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미·소 냉전 하에서 전두환·레이건의 밀착이 밑거름 역할도 했다.

회담은 아니지만 일본 각료의 독도망언과 과거사 인식 문제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11월 방한한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에게 “이번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말한 것이 비화되어 IMF를 초래했다는 말도 있다. 일본이 한국에 투자한 자금을 일거에 빼가면서 IMF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어쨌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일본과 맺은 굵직한 협상에서 한국은 실질적인 이득을 봤다. 그렇다고 일본이 손해를 봤다는 뜻도 아니다. 일본과의 무역 불균형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국이 수출주도형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일본의 자본과 기술은 큰 역할을 했다.

만약 감정적으로 일본과 등진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이 입게 된다. 거창한 이야기 할 것도 없다. 2017년도 일본을 방문한 여행객 수는 600만 명을 넘었다. 현재 일본은 무비자 여행이 가능하다. 관계가 악화되면 일본은 무비자 입국을 제한하려 들것이다. 산업 구조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카메라 소자인 CMOS는 일본 소니가 거의 독점 공급한다. 일제 CMOS가 없으면 스마트폰 생산은 어렵게 된다.

문재인 정부의 어설픈 ‘적폐청산’은 일본과는 위안부 합의 파기 소동을 일으켰고, UAE와는 임종석 비서실장이 직접 가야 할 정도로 문제가 되었다. 중국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굴종외교는 한국의 국격 자체를 떨어뜨렸다. 문재인외교는 첩첩산중 오리무중 그 자체다.

고성혁 역사안보포럼 대표
고성혁 역사안보포럼 대표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